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92화 (692/740)

692화 나갈 걱정?

“크합!”

“으냐아아앙!”

“아, 시발!”

저마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키는 녀석들.

언제 바닥에 누웠던 건지 뭍으로 나온 생선처럼 팔딱인다.

식은땀을 흘린 탈모맨이 목을 매만지고, 냥펀이 품에서 황금 망치를 꺼내 든 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핥짝이야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인상을 쓰고 있고.

나 또한 기록자와 동기화되었던 만큼 충격이 없지는 않았으나.

[정신 보호(SSS) Lv.MAX]

[혼돈이 다른 존재의 혼돈을 거부합니다.]

비교적 멀쩡할 수 있었다.

나도 혼돈 수치가 높아서 크게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만.

‘남의 혼돈에 침식되는 게 보통 거지 같은 게 아니군.’

이렇게 남의 몸을 빌려 겪어 보니 장난 아니다.

그냥 내가 겪은 경험이면 덜할 텐데, 다른 사람과 링크된 상태로 겪으니까 더 그렇다.

내가 가지고 있는 혼돈, 스킬, 권능, 오감 모두 그 사람을 기준으로 맞춰지니까.

“아오. 기록하던 놈 허접했던 거 아냐?”

“그럴지도? 어린애 입장에서 보면 고블린도 무시무시하자낭.”

“상대적인 거라 쳐도 장난 아니던데. 더더욱 싸울 맛이 나겠군!”

지금 우리가 느낀 충격이 상대적인 거라 온전히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지만 경계할 필요는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기록이 진실이라면.

“숭배자의 왕은 99층에 있어.”

“혼돈의 파편일 줄은 몰랐지만.”

나도 그건 몰랐다.

모든 숭배자들의 왕인 만큼 최상층에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혼돈의 파편일 줄이야.

거기다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겠군.’

멀리서 보였던 시커먼 구체.

그건 놈의 본체가 아니다.

놈이 뿜어 대는 아우라 같은 거지.

일종의 기운이라고 보면 됐는데.

“놈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통제력이 사라진다라.”

“완전 괴물 아니냥?”

“하하하! 그래도 할 만하지 않을까? 우린 그 정도는 아닐 것 같은데.”

냥펀의 말도, 탈모맨의 말도 맞다.

놈은 강하다.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어떤 적보다 강하겠지.

그럼에도 가능성이 있는 건.

“우리도 혼돈 수치가 낮지는 않아.”

혼돈 수치의 중요성을 알고 일찍부터 점수를 올려 왔다는 것.

의도했던 것보다 많이 얻게 되기는 했는데 상관없지.

오히려 좋다.

놈과 싸울 단서도 얻었다.

“혼돈 수치에 따라 역할을 바꿔야 해.”

“그 수준이 얼마인지도 파악해야 하고.”

“으음. 무기나 그런 것도 혼돈이 깃든 걸로 준비해야겠는걸?”

“근성과 의지도 한몫하지! 아! 신성력이나 마기가 짙으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핵심은 혼돈 수치.

스스로의 능력이든 장비에 깃든 거든 충분한 양이 필요하다.

그조차도 없다면 그나마 혼돈에 저항하는 신성력이나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 마기가 강력해야 하고.

다행히 모두 멤버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벌써 꼬리를 말 생각은 없다.

‘혼돈의 파편이랑은 이미 싸워 봤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그동안 마주친 혼돈의 파편이 한둘인가.

물론 그놈들을 숭배자의 왕과 동급으로 칠 생각은 없다.

같은 혼돈의 파편이라도 객체마다 능력 차이가 크니까.

당장 91층에서 만났던 놈과 델버튼을 비교하면.

‘델버튼이 훨씬 강하지.’

그리고 예상컨대 베드록 바알루제는 델버튼보다 강하다.

그러니까 99층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거겠지.

오필리아가 이걸 왜 준 건지 알겠다.

사용할 거면 안전지대에서 쓰라는 말도 이해가 됐고.

-쩌적.

우리를 끝으로 내구도가 다했는지 기록 구슬이 깨진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저런 괴물을 상대하려면 여러 사람이 있는 게 좋을 테니까.

것보다.

“99층에도 사람들이 있군.”

“NPC인지 등반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록 마지막, 기록을 회수한 인물이 있었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놈들 같았는데.

‘탐사를 하고 있다고 했지.’

놈들의 정체도 목적도 모른다.

NPC인지 아니면 등반가인지.

숭배자의 왕을 잡으려는 건지 놈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건지.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기록체라고 했어.’

사람을 소모품으로 쓸 수 있는 존재라는 거다.

뭐, 어쩌면 기록자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호문쿨루스나 크리쳐일 가능성도 있다.

‘오필리아는 이런 걸 어떻게 얻었지?’

위에서 협조하는 NPC가 준 건가.

그녀를 돕는 NPC가 많다는 건 알고 있다.

그녀는 구원자.

동시에 알려진 게 많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일단은 넘어가자.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록을 보는 것으로 시간이 많이 흘렀다.

[샤워(S) Lv.MAX]

땀으로 젖은 몸을 샤워로 깔끔하게 했고.

“이준석이 일어났을 거야.”

“병문안은 해야징.”

녀석을 보러 이동했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많아서 제대로 이야기도 나눠 보지 못했다.

더불어 다른 상위 헌터랑도 대화하지 못했고.

97층은 스마일캡이 있으니 초코쪼코를 통해 정보도 얻어야 한다.

테키드의 저택으로 향했다.

* * *

병상에 누워 있는 이준석.

그곳에는 오필리아와 이지키일, 요정 클럽 인원도 있었다.

“이제 안정만 취하면 될 거예요.”

“고맙습니다, 오필리아 님.”

오필리아 덕분에 상태가 꽤나 호전되었으나 한동안은 요양해야 한다.

이준석이 우리를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이런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니 죄송스럽군요.”

“편히 누워 있어. 환자는 쉬어야지.”

핥짝이의 말에 이준석이 미소 짓는다.

“그동안 연합 관리하느라 고생했잖아. 이참에 여유 좀 즐기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업무는 누워서도 할 수 있으니까요.”

지금도 커뮤니티를 켜고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는 모양.

저 정도면 일 중독 아닌가.

“예전부터 몸을 쓰는 것보다는 사무적인 일을 좋아했습니다. 형과는 달랐죠.”

본인 적성과 맞다면 다행이고.

듣자 하니 탑에 들어오기 전에는 대기업에서도 일했다는 모양이다.

중간에 이직하고 나서는 대형 길드에서 일했고.

나름 엘리트 과정을 밟아 온 녀석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동안 쌓아 온 굿즈에 싸인을 받고 사진을 찍어 포토북을 만들고 싶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옆에는 피규어를 시작으로 브로마이드, 스탠딩 실리콘 등등 온갖 물건이 있었다.

그 와중에 다꾸용 스티커는 어떤 놈이 만든 거냐, 진짜. 탑에서 저걸 어떻게 만들었냐고.

몰래 불태우면 혼날까?

살짝 나쁜 생각이 들었지만 참았다.

이준석의 말마따나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현재 연합 사람들 대부분이 상위 층에 도달했습니다. 더 이상 신규 인원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죠.”

더 이상 탑의 초대를 받는 사람은 없다.

다르게 말하면 바깥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탑에 남은 이들만이 위로 향하는 상황.

“다만 그나마 최근 소식과 노블 나이트의 예측 보고서, 몇몇 특수한 능력을 지닌 이들의 정보를 종합해 보면.”

빠르게 허공을 살피던 이준석이 손가락 3개를 들었다.

“3년. 늦어도 3년 안에는 최상위 층을 달리고 있는 분들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밖으로?”

“예. 이미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만큼 멸망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현재 밖에 있는 전력을 추정해 본 결과, 3년 뒤 대부분의 나라가 멸망하거나 국토 대부분을 내줄 겁니다.”

이준석이 홀로그램을 펼친다.

사무 능력과 관련된 스킬 같았는데, 그곳에는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지도 한쪽에 적혀 있는 D-0.

-촤르르륵.

이윽고 숫자가 올라갔으니.

D+254.

러시아의 국토 1/5이 사라지고 아프리카 쪽에 멸망하는 나라가 발생.

D+410.

호주가 붕괴되고 영국이 붉게 물든다.

몬스터 사이에 고립된 나라들이 내륙으로 들어오며 분란이 생기고 혼란이 가중.

D+529.

아프리카 대다수의 나라가 무너진 후 중국이 분열.

북한은 진작에 망했고 중국과 남미가 국토 절반을 내준다.

D+743.

세계에 있는 나라 절반이 망했으며 살아남은 나라들이 공동체를 설립.

비교적 굳건했던 미국과 캐나다도 핵심 지역을 제외하면 국토를 포기.

D+803.

인구수가 많은 만큼 헌터도 많은 인도가 무너졌다.

동남아 또한 괴멸 직전.

유럽의 3/5. 아시아의 5/7가 국토를 상실한다.

인원이 한곳에 모여 방어선을 구축했기에 생긴 변화.

D+918.

더 이상 항공도, 항해도 불가능.

자체적으로 살아남아야 했지만 식량 수급 자체가 극한의 난이도를 자랑하며 극심한 기아에 시달린다.

D+1,095.

3년이 지난 시점.

“제 기능을 하는 나라는 고작해야 한 손에 꼽힐 겁니다. 어디까지나 예상 시나리오지만요.”

세계지도 대부분이 붉게 물들었다.

초록빛을 띠는 지역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곳에 한국이 있기는 했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멸망한 세계에 남은 나라가 버텨 봐야 얼마나 버티겠는가.

“실제로 이 정도는 아닐 겁니다. 어디까지나 지금 밖에 있는 헌터들을 기준으로 계산한 거니까요.”

“가능성은 있다는 뜻이군.”

“계산이 맞으면 1년 안에 첫 번째 혼돈의 파편이 활동할 겁니다.”

그렇다는 건 이미 재앙은 모두 등장했다는 뜻이다.

특이 게이트 역시 마찬가지.

이미 있을 수도 있다. 발견되지 못했을 뿐.

“선택해야 합니다. 밖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위로 향할 것인지.”

등반을 하는 건 좋다.

위로 올라갈수록 강해지거니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

또한 100층을 클리어한다면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희망 사항이지만.

아직 100층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으니까.

어쩌면 별다른 일 없이 밖으로 내보내질 수도 있다.

지금도 꾸준하게 밖으로 나가는 이들이 있긴 하다.

쁘찡연합 역시 오지혁과 김소담을 비롯해 희망자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던가.

“노블 나이트는 더 이상 내보낼 수가 없어요. 지지자들 중에서 찾아야 하죠.”

“빅스타 길드 쪽에 도움을 요청하기는 할 겁니다만,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정상으로 향하는 게 목적인 오필리아.

그나마 이유가 있다면 빅스타 길드 정도 되려나.

사실 인원수만 따지자면 쁘찡연합이 많기는 한데.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란 말이지. 통제가 강한 편도 아니고.’

연합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려운 선택이다.

동시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빠르게 탑을 정복하고 나가면 되잖아?”

결국 3년 내로 나가면 된다는 거 아닌가?

물론 그동안에도 문제가 생길 테니까 가능한 빠르게 등반해야겠지만.

나와 멤버들이 탑에 들어온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올라가야 할 층도 몇 개 없다.

못해도 1년 안에 100층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으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요.”

오필리아가 팔짱을 낀다.

“96층에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모였으니 힘을 합치면 가능할지 모릅니다.”

“스마일캡, 걔도 97층에 있잖아. 그 녀석까지 합류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오필리아의 말을 송곳 요정이 받는다.

“확실히. 그자까지 같이 움직이면 모르겠네요.”

찌리리 요정까지 동의하는 걸 보니 스마일캡이 진짜 거물이긴 한 모양.

나야 녀석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건 멤버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때는 진짜 괴물 같았어요.”

“아아. 미친놈이 마왕 먼저 잡겠다고 악마 썰고 다녔잖아.”

“같이 탑에 들어온 사람이라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탑에 들어온 지 오래된 만큼, 스마일캡과 마주쳤던 이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들어도 평범한 놈은 아니다.

그러다 문득. 우리를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여러분은 잘 모르겠군요. 그는 강해요. 암묵적으로 등반가 중 가장 강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죠.”

“애초에 등반가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게 스마일캡이야. 무려 98층까지 갔다 왔으니까.”

찌리리 요정과 송곳 요정이 말한다.

등반가 중 최강.

누구보다 높이 오른 자.

100층에 도달할 거라 예측되는 인물 중 한 명.

루키 그룹의 수장인 동시에 97층의 지배자.

등반가뿐만 아니라 NPC들도 그를 따른다.

그게 스마일캡이다.

“조금은 희망이 생기는 기분이군요.”

오필리아가 낙관적인 견해를 보인다.

다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끼이이.

문이 열리며 초코쪼코가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건 모르겠고 문제는 해결되겠네.”

문틀에 등을 기댄 녀석이 환자실에 모인 이들을 훑었다.

“밖에 나갈 사람 필요하다고 했지? 많이 나가게 될 거야.”

조금은 냉소적인.

하지만 진지한 표정을 지은 초코쪼코가 위를 가리켰다.

“그 대애애애단한 스마일캡도 98층을 클리어하지 못해서 97층에 있는 거니까.”

못마땅하다는 듯 삐죽 내민 입가가 비틀린다.

“이 위부터는 지옥이야. 누가 나가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안 나갈 수 있을지 고민해.”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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