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1화 기록체
소동은 금방 끝이 났다.
이번 기습의 주범이자 그동안 모습을 숨기고 활동했던 배신자가 잡혔으니까.
포탈을 타고 위로 올라간 녀석은 스마일캡에게 당했다.
정황을 봤을 때.
‘올라가자마자 당한 모양이군.’
그러지 않을까.
내가 가짜 이준석의 영혼을 베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코쪼코가 스마일캡의 연락을 받았으니.
이 부분이 살짝 신경 쓰인다.
헤리드 포터.
그 녀석이 죽은 후, 정보를 좀 모아 봤다.
어떤 놈인가 궁금해 가지고.
“캐나다 출신. 초기 헌터까지는 아니고 대략 들어온 지 6년 정도 됐나.”
탑이 아니라 바깥세상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그렇다.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수준.
아니지.
엄밀히 말하면 빠르게 탑을 올랐다고 봐야 한다.
한국이야 나와 멤버들이 공략을 뿌려 댄 덕에 이런 거니까.
등반 초기에는 서버가 분리되어 있다.
우리가 뿌린 공략이 그다지 유용하지는 않았다는 뜻.
서버에 따라 준비된 시련과 등장하는 몬스터가 다르니.
“이명이 시체수집가. 그렇다고 네크로맨서 계열은 아니야.”
“악질이네, 이 녀석.”
다리를 꼰 채 서류를 읽던 핥짝이가 눈을 찡그린다.
동의한다.
그가 해 온 일들은 탑을 기준으로 생각해도 과한 면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실력은 진짜였는지 이름을 좀 날렸던 모양.
‘그런 놈이 숭배자가 되었다라.’
끔찍한 일이다.
그만한 힘을 가졌음에도 숭배자의 끄나풀이 되다니.
인류의 손해였고 등반가의 수치였다.
“이런 녀석이 밖에 나가도 괜찮은 거냥?”
“조치를 취했다고 했어. 오필리아랑 빅스타 쪽에서도 움직였고.”
스마일캡은 놈을 죽였다.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나라면 놈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 했을 테니까.
왜냐.
‘96층까지 오른 놈, 그것도 숭배자가 밖으로 나가면 곤란해져.’
심지어 놈은 시체를 다루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체이탈로 제압한 상대에게 빙의하는 것도 가능하잖앙.”
이준석이 당했던 것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스며드는 것도 가능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게 가장 까다로운 문제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내가 이준석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상한 점을 눈치챘으니까.
다른 사람, 다른 환경, 처음부터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는 환경에서 일이 벌어졌다면?
‘다른 사람 몸에 들어가 테러를 일으킨다든가.’
그럼 정말 희대의 빌런이 등장하지 않았을까.
탑은 폐쇄적이기라도 하지.
밖이었다면 지구 전역을 돌아다녀야 했을 거다.
그 와중에도 놈을 잡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암만 생각해도 놈을 그냥 죽여 버린 건 위험한 행동이었으나.
“미국 측에서 캐나다 정부랑 접선한다니까, 뭐.”
“스마일캡이 걔 영혼에 각인 박아 놨다던데. 밖에서도 찾을 수 있겡.”
“그게 가능해?”
“몰랑. 가능하니까 그랬겠징.”
일단은 믿는 수밖에 없었다.
탈모맨의 의문에 확실히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정도로 자신했다면 믿을 수 있겠지.
일이 잘못될 경우 책임은 본인이 지겠다는 뜻이니까.
‘설마 스마일캡도 숭배자인 건 아니겠지?’
순간적으로 그런 의심도 들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아닐 거다.
적어도 내가 만났을 때까지는 숭배자가 아니었기도 했거니와.
‘숨겨 봤자 97층에 올라가면 내가 확인할 수 있거든.’
숭배자라면 내가 놈들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런 짓은 안 하겠지.
듣자 하니 오필리아나 다른 상위 헌터들이랑도 교류하고 있다고도 하고.
“일단 이 일은 마무리 짓자.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게 없어.”
“동의. 고민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잖아.”
“노블 나이트가 나가면 오징오징이랑 소담이한테도 연락한다고 했엉.”
“둘은 잘 지내려나? 탑에서 이어진 인연이 연인으로! 바깥까지 이어지다니. 크으! 이게 낭만이 아닐까!”
탈모맨이 콧김을 내뿜는다.
이 녀석, 이런 거 좋아했지.
원체 정도 많고 순박한 놈이라 그런지 포인트가 다르다.
‘얘가 있어서 다행이야.’
칙칙하게 머리만 굴리는 사람만 모였으면 분위기 딱딱할 텐데.
“핥짝앙, 저기 못생긴 애가 너 노려본당.”
“뭘 봐, 이씨. 정수리 예뻐서 봐준다. 여기만 살짝 밀어 볼래? 촉감 괜찮을 거 같은데.”
“뒈진다, 진짜.”
“꺄악, 너무 무서웡!”
“공블아이의 까칠함과 공듀의 상큼함 조합!”
“이게 바로 갭 모에인강?!”
“뭔데, 뭔데? 갭 모에가 뭔데!”
꺄르륵, 꺄륵!
음. 방금 말 취소.
애들 하는 꼴을 보아하니 그럴 일은 없겠군.
핥짝이와 냥펀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어금니가 꽉 물어지네.
그건 그거고.
“이준석은 이따 병문안 가는 거지?”
“맞아. 빙의 부작용인가. 영혼 쪽 타격 있어서 오필리아가 봐주기로 했어.”
이준석을 만나 보고 싶었지만 안전지대의 회복 옵션으로도 회복이 더디다.
신성력 계열에서는 원 탑인 게 오필리아.
더불어 괜히 구원자 권능을 가진 게 아니라는 듯 기적에 가까운 회복 능력을 지니고 있다.
‘노블 나이트가 탱커 위주로 맞춰진 이유가 있지.’
오필리아와 함께하는 노블 나이트는 성퀴벌레 그 자체다.
현실판 성녀와 팔라딘이라고 해야 하나.
해외에서도 여왕 혹은 성녀라 불리고 있으니 말 다 했다.
이준석은 그쪽에 맡기기로 하고.
“우리도 할 건 해야지.”
이번 배신자 소동으로 등반가와 NPC의 분열은 막았지만 의심이 싹텄다.
가르티가 말한 대로면 상위 헌터 중에 배신자는 더 없는 것 같지만.
‘그 녀석도 모든 걸 파악한 건 아니니까.’
혹시 모른다.
아직 더 남아 있을지.
그런 의구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고 그건 다른 등반가도 마찬가지였다.
곧바로 티가 나지는 않겠지만 나중에는 또 다른 불화의 씨앗이 될지 모르지.
그러니 더더욱 등반에 집중해야 한다.
숭배자들이 문제다?
‘결국 놈들이 딴짓 못 하게 압박하면 해결될 문제거든.’
90층대에는 숭배자들의 왕, 베드록 바알루제가 있다.
정황상 놈이 있는 위치는 90층대 끝 무렵.
놈을 처리하면 그걸로 더 이상 숭배자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할 거다.
물론 그 전에 플래티넘 등급 한 명을 잡아야겠지만.
‘이제 한 명 남았어.’
가르티는 나와 동맹을 맺었고 파히루는 내 손에 죽었다.
남은 한 명만 죽이면 숭배자의 최고 관리자는 가르티가 되며.
‘숭배자들이 날뛰는 걸 미리 파악할 수 있지.’
일단은 그거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위에 대한 정보를 얻는 건 중요했고.
-스윽.
난 오필리아가 건네줬던 물건을 꺼냈다.
94층, 드래곤 산맥에서 받은 물건.
“그거야? 오필리아가 줬다는 거?”
“언제 여나 했는데 이제야 여네.”
관심을 보이는 멤버들.
배신자 때문에 일이 꼬이지만 않았어도 진작 열었을 거다.
결과적으로 멤버들이 다 모였을 때 볼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연다.”
-딸깍.
조심스럽게 목함을 열었다.
안에 있는 건 자그마한 구슬.
정확히는.
“이거 기록 구슬이넹.”
누군가의 오감을 연결해 기록해 주는 아티팩트였다.
도대체 누구의?
권능으로 살펴보았지만.
[혼돈에 의한 손상이 심해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주의!]
[해당 기록을 열람 시 혼돈이 침습할 수 있습니다!]
오염된 수준이 너무 심해 확인이 불가능.
결국에는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건데.
“안 볼 사람은 지금 말해.”
“들었지, 탈모맨?”
“음? 내가 왜?”
“혼돈 때문에 탈모 심해지면 어떡행!”
“탈모 아니라고!”
오케이.
다 본다는 거구만.
그럼.
“봐 보자고.”
눈빛을 주고받은 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록 구슬에 손을 얹었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혼돈.
-파지지지짓!
껄끄러운 감각이 온몸으로 퍼지며 시야가 암전했다.
* * *
여긴 어디인가.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그것이었다.
동시에 느껴지는 감정.
‘공포.’
온몸이 짓눌릴 거 같은 압박감.
등 뒤로 흘러내리는 식은땀.
부상을 입은 건지 찔리는 듯한 통증이 이어지고 바짝 마른 입은 침조차 삼키기 힘들다.
선명하고도 명백하게 기록을 남긴 자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시야가 흔들린다.
“후욱. 후우.”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달린다.
기록자의 감각을 동기화해 만든 기억이라 시야가 제한된다.
그저 남의 몸에 깃든 유령처럼 그가 느끼는 것들을 마주할 뿐.
과거에는 초목이 우거졌을 산맥.
불어오는 바람이 뜨겁다.
불길에 휩싸인 나무가 등을 떠밀 듯 열기를 뱉어 내고 솟아오른 재 가루는 하늘을 뒤덮었다.
‘쫓기고 있다.’
혹은 도망가고 있거나.
전력을 다하듯 허벅지가 뜨겁고 긴장감으로 목 근육이 팽팽하다.
기록자가 뒤를 훔쳐본다.
하늘로 올라가고자 하는 갈망인가.
나무를 집어삼킨 불길이 위를 향해 몸을 흔들고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어둠?’
거대한 어둠이었다.
저게 무엇일까.
산? 아니면 바위?
물질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정형화되지 않은 어둠이 꾸물거리며 주변에 있는 것을 파괴했고.
-주륵.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흔들렸다.
기록자의 눈과 코로 뜨끈한 피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진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부정한 무언가의 형체.
파괴적이면서도 느긋한 그것은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두근. 두근.
그저 세차게 박동하는 기록자의 심장 소리만이 거세게 들릴 뿐.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어 시야 곳곳을 살폈지만 생명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고통이 찾아왔다.
“크하아악!”
기록자의 비명.
성대의 떨림이 직관적으로 느껴졌다.
발등이 사라졌다.
무엇에 당한 거지?
어떠한 징조도 없었다.
함정이 발동한 것도, 습격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증발했다?’
사라진 발등 주변에는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땅도 파헤쳐지지 않았다.
갑자기. 마치 물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헛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고통은 진짜였고.
-콰드드드득.
달리던 속도에 더해 더 이상의 충격을 버티지 못한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다.
등을 달구던 열기와 달리 한없이 차가운 바닥을 긁었다.
땅을 움켜쥐며 앞으로 나아갔다.
노력이 성과를 이룬 것인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가 빨라진 듯했으나.
“으윽! 으그윽!”
속도가 빨라진 이유는 단 하나.
발등을 시작으로 하체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피를 흘렸다면 기어 온 길을 따라 길게 이어지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저 멀리 존재하는 어둠은 기록자가 흔적 하나 남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존재.
기록자를 비웃듯이 조여 오는 공포.
혼돈이 춤을 추며 기록자의 회복 능력과 패시브 스킬을 비틀고 파괴한다.
-빠득.
머리가 앞으로 손을 뻗으라 명령했으나 애꿎은 가슴만 들썩인다.
숨을 들이켜려 했으나 눈물만이 쏟아진다.
비명을 질렀으나 손가락이 멋대로 움켜쥘 따름이다.
진득하게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감각.
‘혼돈.’
혼돈은 규칙과 상식을 파괴한다.
혼돈은 자기만의 규칙을 만든다.
혼돈은 상대의 영역을 침범한다.
그건 육체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것이었다.
“끄으으읍!”
완전히 자신의 신체 통제력을 잃은 기록자는 그 자리에 웅크린 채 죽음을 기다렸다.
서서히 몸을 잃어 가며, 조금의 저항도 거부당한 채.
오감마저도 뒤엉켜 세계와 고립되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제 기능을 수행한 것은 청각이었고.
기록자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으로 다가오는 수십 개의 발소리.
자그마한 희망을 가지며 몸부림친다.
그 꿈틀거림이 제대로 실행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사적으로 여기에 있노라고. 살려 달라고 외쳤다.
바람이 이루어진 것인가.
지척에서 발소리가 멈춘다.
“저 망할, 혼돈의 파편은 여전하군.”
조금은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 건가?
“베드록 바알루제. 저놈 때문에 99층이 남아나질 않겠어.”
“기록체는 어떻게 할까요?”
“이미 오염됐다. 기록만 뽑고 파기해.”
너무나도 냉정한 명령.
이미 모든 감각이 엉망진창이라 생각했건만.
-서걱.
섬뜩하고도 짜릿한 통증이 목덜미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