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86화 (686/740)

686화 같은 시간 다른 장소

화합의 날 바로 다음 날에 생긴 문제.

냉철히 말하면 습격은 전날 밤에서 새벽 사이에 있었다.

축제가 동트기 직전까지 이어졌으니 더 그렇겠지.

아직까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 전날 술을 먹으며 보냈으니까.

취기가 오르지 않더라도 분위기에 취해 놀다가 지쳐 잠든 이들이 태반이다.

당장 탈모맨도 계속 자고 있지 않았는가.

‘아예 취하려고 독한 것만 골라 마시기도 했고.’

스킬 숙련도가 높다 보니 아예 패시브 스킬을 억눌러 취기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덕분에 이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이거, 서로 의심할 것 같은데.”

“누군지는 몰라도 영악하넹.”

“으음. 첩자라고 해야 하나. 전쟁에서 분탕질하는 녀석이 가장 위험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단순히 상처만 입은 거라면 술 마시고 시비가 붙어서 싸운 거로 생각하겠지만.

‘사망자가 있어.’

심지어 노블 나이트다.

다른 상위 그룹과 달리 탑 내부, 커뮤니티 등에서 인지도가 있는 곳이 몇 있다.

쁘찡연합이야 기본적으로 서로 어울려 노는 것에 집중되어 있지만.

“노블 나이트는 사명감이 있어. 지지받는다고.”

어디까지나 함께 노는 커뮤니티적인 느낌이었지,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돌진하는 집단은 아니었다.

그에 반해 노블 나이트는 인류 구원이라는 대의를 가지고 나아가는 곳이었고.

물론 연합 또한 위를 향하고 서로를 끌고 밀어 주며 등반하자는 모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게 연합의 정체성이라고 묻는다면, 글쎄.

방향성과 목표는 비슷할지언정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달랐다.

그렇기에 노블 나이트는 숭고하고 다른 이들의 응원을 받는다.

그중 한 명이 죽었다.

‘특히 해외 쪽에서 분노가 클 거야.’

쁘찡연합이 대한민국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면 노블 나이트는 미국을 시작으로 글로벌한 지원을 받는 곳이니.

당장 빅스타 길드가 긴밀하게 협조해 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등반가, 더 나아가 인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거라는 것.

“의심되는 자가 있나?”

“모르겠어. 일단 등반가 중에 살인자 칭호를 받은 이는 파비오뿐이야.”

테이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살인자 칭호를 추가로 받은 인물이 없다는 것.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NPC가 공격했다는 건가.”

“확정 지을 건 아니지.”

적어도 축제에 참여한 인원 중 등반가가 습격했을 가능성은 적다는 것.

상처만 입은 게 아니라 사망자가 있다.

등반가가 했다면 반드시 살인자 칭호를 받는다.

습격은 필드가 아닌 안전지대에서 벌어졌으니까.

“인원 제한을 넘겼으니 NPC들도 시스템 퀘스트를 받았을 거야.”

“파비오도 공격받았으니 등반가에게 앙심을 품은 NPC가 공격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겠지.”

지난밤 동안 96층이 어떻게 굴러갔는지도 알려졌으니까.

심지어 파비오는 꽤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분위기를 따라 그를 용서한 자들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한 이도 있겠지.

가능성은 두 개다.

“진짜 NPC가 움직인 거거나 아니면 NPC가 한 것처럼 꾸민 거거나.”

“파비오가 범인일 가능성도 있어.”

핥짝이가 말했다.

냉정하지만 냉철한 지적이다.

안전지대에 살인자 칭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파비오 스펜서뿐이니까.

그가 노블 나이트를 공격하고 자해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나 그는 이번 습격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

그의 말에 무게가 실리는 건 당연하다.

만약 그가 NPC가 공격했다고 선언한다면.

‘96층은 분열된다.’

상황이 복잡해진다.

96층은 정상으로 향하기 전 유일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등반가와 NPC가 대립 각을 세운다?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해.’

차라리 클리어 방법이라도 있는 층이면 모를까.

적의를 가지고 NPC들이 등반가를 공격해 대면 답이 없다.

무법자도 무법자지만.

‘포탈은 안전지대에 있어.’

위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안전지대를 거쳐야 한다.

달리 말해 서로 죽고 죽이게 될 경우.

‘등반가는 97층으로 향할 때마다 공성전을 벌여야 한다는 거지.’

이게 무슨 미친 소리란 말인가.

최악을 상정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실현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일단은 진정하자.

아직 구체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무작정 의심하기 시작하면 용의자의 범위가 너무 넓어진다.

애초에 습격한 대상이 한 명인지 여러 명인지도 모르지 않나.

단서를 찾고 하나씩 범위를 줄여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비오는 테키드가 데리고 있다고 했지?”

“노블 나이트도 옆에서 지키고 있어요.”

훌륭한 판단이다.

각 세력의 대표라 불릴 만한 이들이 모여 있으니 추가 습격은 없겠지.

중간에 선동될 일도 없고.

NPC가 공격했다! 하더라도 피스 랜드의 수장인 테키드가 직접 환자를 돌보고 있는데 넘어가는 멍청이는 없겠지.

수많은 가능성이 있지만.

‘이거 누가 일부러 분란을 조장하는 것 같단 말이지.’

난 이쪽에 힘을 좀 더 두었다.

너무 공교롭다.

파비오가 목적이었다면 진작에 실행할 수 있을 테니까.

애초에 실수로라도 파비오를 살려 뒀을 리가 없다.

어떤 놈이 자신을 본 목격자를 남겨 둘까.

의도를 가지고 살려 둔 거라 보는 게 합당했다.

“왔군.”

파비오는 테키드의 저택에 있었다.

상처가 깊은지 파비오는 눈만 겨우 뜬 상태였다.

“몸 상태는?”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질 거다.”

말할 정도의 힘은 있는 것 같고.

“습격한 사람은 봤나?”

“대충은. 변장을 한 상태라 특정하기는 힘들다.”

성별, 키, 체형 모두 꾸며진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괜찮다.

예상했던 부분이니까.

“사용한 무기나 스킬 같은 거라도 괜찮으니 천천히 말해 줘. 언제 어디서 당했는지도.”

그것만 알면 권능을 통해 용의자를 좁혀 나갈 수 있으니까.

환자를 상대로 너무 몰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빠르게 해결할 수 있으면 하는 게 맞았으니.

잠시 천장을 올려다본 파비오가 말을 이었다.

중간중간 상처가 쑤신지 얼굴을 찡그렸지만 알아듣는 데 문제는 없었다.

요약하자면.

‘새벽 4시쯤. 사람들이 좀 빠졌을 때 골목.’

단검으로 기습했고 첫 타 명중 관련 스킬을 사용한 것 같다라.

은신 스킬은 덤이고.

거기에 더불어.

“NPC일 가능성이 있다고.”

“가슴 쪽에 푸른빛이 있었으니까.”

NPC의 특징.

이들은 탑으로 들어오는 대가로 심장을 저당 잡힌다.

블루 하트.

심장 대신 푸르게 맥동하는 푸른빛.

등반가와 NPC를 나누는 분명한 특징이었으나.

“단언하지는 않는군.”

“노골적이니까. 꾸미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파비오는 NPC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축제 때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가 안전지대에 집착한 이유에는 동료의 죽음이 있었다.

96층, 무법지대에서 영주권을 얻지 못한 동료가 죽었으니까.

물론 여기서 죽어도 90층으로 가거나 밖으로 나가지 진짜 죽는 것은 아니었으나.

‘분노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하지.’

그렇기에 NPC에 강한 적의를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칠 생각은 없다.”

녀석은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 맞다.

심장 부근에 푸른색 빛을 내는 보석만 붙이고 있어도 블루 하트 흉내를 낼 수 있다.

그저 두꺼운 옷이나 외투만 걸쳐도 블루 하트를 가리는 건 문제없다.

일부러 보여 주고 떠나는 것 같지 않은가.

또 하나.

상대는 강하다.

‘아무리 기습당했다고는 하지만 파비오가 당했어.’

파비오가 안전지대에서 온갖 짓을 벌였음에도 지금까지 멀쩡한 이유.

안전지대의 특성도 있지만 가진 무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 전투력을 가진 사람은 NPC를 합쳐도 그리 많지 않겠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녀석이라고 저항하지 않은 건 아니다.

본인이 말하길 당하기 전 녀석의 옆구리를 찢었다고.

상처가 남아 있지는 않을 거다.

안전지대에서는 상처가 재생되니까.

중요한 건.

“그 녀석, 내가 보기에는 등반가다.”

어렴풋이 본 옆구리의 문신이었다.

치명상을 입고 아주 찰나의 순간 본 거라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레터링 타투가 있더군.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영어였다.”

이 부분.

이게 가장 걸렸다.

NPC가 영어로 된 문신을 했을까?

완전히 가능성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매우 낮은 확률이다.

제정신일 때 본 게 아니니 잘못 봤을 수도 있다.

등반을 하며 다른 이세계의 문자도 여럿 접했고 그중에는 지구에 있는 문자와 비슷한 것도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의심할 여지는 충분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사이, 테이준이 안으로 돌아왔다.

“다 돌아봤지만 살인자 칭호가 생겨난 인원은 없어. 확실해.”

우리가 파비오와 만나는 동안 테이준은 등반가들을 전부 살피고 왔다.

오케이.

“우선 여기 있는 등반가들은 용의자에서 제외.”

“NPC들은? 그쪽도 아닐 거야.”

테이준이 끼어든다.

“등반가를 죽였어. 파비오처럼 살인자 칭호도 없던 사람이야. NPC였으면 페널티가 왔을 거라고.”

“그 말도 맞아.”

난 순순히 인정했다.

시스템 제약은 NPC라면 피할 수 없는 거니까.

한 가지 경우만 제외하면.

“숭배자는 그런 제약이 없지.”

범인이 숭배자라고 생각하면 모든 게 들어맞는다.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

그 많은 등반가 중에서 노블 나이트를 노린 것.

등반가를 잡았을 때 어떠한 페널티도 받지 않는 것까지.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다들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는지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외부인이야.”

그동안 숭배자에게 수없이 시달렸다.

특히나 95층에서 만난 파히루 때문에 숭배자에 대한 경계심이 커졌다.

아직 플래티넘 등급의 숭배자는 한 명 남아 있었고 그 녀석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다.

96층 어딘가에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

그렇기에 습관적으로 권능을 사용해 숭배자가 있는지 살폈는데.

‘없었단 말이지.’

안전지대는 물론이고 내가 무법지대에 있을 때도 숭배자는 보이지 않았다.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게 합당하다.

“저기.”

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이준석이 입을 열었다.

커뮤니티와 달리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동시에 쏠린 시선.

“전에 쁘띠공듀 님이 말씀하신 게 있었습니다.”

뜬금없는 공듀 발언에 움찔했지만 티 내지는 않았다.

“등반가 중에 배신자. 그러니까 숭배자가 있다고요. 상위 헌터 안에 말입니다.”

맞다.

내가 그렇게 말했었다.

“사실 계속 그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오필리아 님도 마찬가지지만요.”

오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까지 별다른 소득은 없는 것 같았지만.

“96층에 들어온 인원 중에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의심스러운 걸 발견해서 축제 하는 동안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축제 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나.

어쩐지 안 보인다 했더니만.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하지.”

“화합의 장소를 망칠 수는 없으니까요.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으음.”

핥짝이의 타박에 이준석이 말을 이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모를까, 개인적인 의심을 담보로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건이 벌어질지 알고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본인도 즐기고 싶었을 축제를 마다하고 밤새 돌아다닌 걸 거다.

이준석이 나를 응시한다.

“이블아이 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진지한 눈빛.

살짝 긴장한 듯 그가 주먹을 쥔다.

“혹시 어젯밤에 어디 계셨습니까?”

“…나?”

이건 또 뭔.

그야 멤버들이랑 같이 있었다.

중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그런 건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연합 사람과 어울리고 있었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블아이 님은 새벽 3시에 골목에 있었습니다.”

“잠깐만.”

그러니까.

“나를, 봤다고?”

새벽 3시에?

난 멤버들을 바라봤다.

그 시간에 난 숙소에 들어와 있었다.

탈모맨은 여전히 놀고 있었고 핥짝이와 냥펀은 같이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으며 그때 핥짝이도 맞은편 소파에 있었다.

이것만으로 알리바이가 생길 수도 있긴 한데.

‘핥짝이는 바로 잠들었지.’

내가 이후에 몰래 나갔다고 주장해도 할 말이 없다.

“에이, 아니징. 난 나가는 소리도 못 들었어. 애초에 공블아이가 범인일 리가 없잖앙.”

“가능성을 열어 두는 건 좋은데 이건 좀.”

“그럼 그럼! 공공아이는 아니지!”

바로 멤버들이 나를 변호한다.

살짝 감동이기는 하다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너 혹시?”

“예. 맞습니다. 골목에서 이블아이 님을 봤습니다. 그땐 별 의심 없이 지나갔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상하군요.”

나였기에.

다름 아닌 나였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지나갔다.

파비오가 공격당했던 그 골목을 말이다.

“그 시각, 이블아이 님은 둘이었습니다.”

범인 녀석.

나를 사칭하고 다녔다.

이건 함정이다.

그리고 동시에 기회다.

“사람들 모아. 축제 때 나를 본 사람들과 장소, 시간을 확인해야겠어.”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나를 본 사람들.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놈이 움직인 루트를 살핀다.

놈을 추적할 방법이 생겼다.

아, 그 전에.

-훌렁.

“내가 범인이 아닌 걸 먼저 보여 줘야지.”

윗옷을 벗었다.

파비오가 봤다는 옆구리 레터링 타투가 없음을 보여 주는 행위.

당당히 양팔을 올려 보기 쉽게 만들어 줬고.

“입어, 짜식아!”

“악!”

핥짝이한테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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