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화 이준석
잘못 들었나?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니까.
“너희는 쓰레기다.”
친절하게도 테키드가 다시 말해 줬다.
지금이라도 턱주가리를 날려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좋은 분위기에 뭐 하는 걸까.
빠르게 눈을 마주치는 멤버들.
당장이라도 녀석의 머리통을 부술 거 같았으나.
-찡긋. 찡찡긋.
테키드가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
자신에게 다 생각이 있다는 표시.
일단 멤버들을 붙잡았다.
따로 악의는 없어 보이기도 하고.
‘권능으로 봤을 때 내게 호의적이라고 나와.’
뭔가 계획이 있다는 거다.
다시 군중을 향해 시선을 돌린 테키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더한 쓰레기지.”
자조적인 목소리가 이어진다.
“안전지대의 주인은 누구인가.”
대답하는 이들은 없었다.
저마다 생각은 있을 거다.
여기 모인 이들 모두 자기만의 주관이 있을 테니까.
“없다. 그 누구도 주인이라 말할 수 없다.”
근본적인 이야기다.
누가 주인이냐.
그걸 누가 정할까.
굳이 따지자면 탑의 설계자인 시스템이 정의할 수 있겠지만.
‘시스템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
공정함은 챙길지언정 완전한 평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느슨한 경계 속에 의도만 남아 있을 뿐.
거기서 주어진 건 이거다.
“안전지대는 등반가들이 쉴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NPC의 임무다.”
한마디로 안전지대는 주인이 없다.
서로 각자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거다.
등반가는 언젠가 안전지대를 떠날 것이고, NPC는 계속해서 새로운 등반가가 나타날 때까지 머무를 테니까.
80층, 아니 90층까지만 해도 그 균형은 어느 정도 유지가 됐다.
96층에 올라오는 등반가가 워낙 적어서 이런 식으로 변질되었던 거지.
“지금은 어떤가? 등반가는 영주권을 받지 못했고 그에 분노한 자가 있다.”
움찔.
파비오가 몸을 떨었다.
“밖은 무법지대이며 이는 우리가 방관한 결과이기도 하다. 누구의 잘못인가. 문제를 직시하고도 외면한 자는 누구인가.”
변명은 있을 거다.
이곳에서 등반가는 볼 일이 거의 없는 존재였고 영주권이 부족할 일은 거의 없었을 테니까.
관성적으로 이어진 문제는 고착화되었고 그것을 무시하는 건 가장 편한 회피였다.
“세상이 바뀌었다면 우리 또한 바뀌어야 하는 법. 변화를 인정할 때가 되었다. 내가 앞장서겠다. 나 같은 겁쟁이라도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
누구의 잘못이냐 물었지만 그 누구를 지목하지는 않았다.
잘잘못을 따지다 보면 끝도 없으니까.
쓰레기라고, 스스로는 더한 쓰레기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겠지.
떳떳하지 못한 이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하라고.
자기 자신을 낮춤으로써 비난의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리고 가장 큰 짐을 짊어지겠다는 선언.
참으로 감동스러우나.
‘그거 아니야, 이 아저씨야.’
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것도 96층 상황을 아는 사람들한테나 감동적인 거지.
여기에 모인 대부분의 등반가들은 96층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테키드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
오히려 쓰레기라는 말을 듣고 눈을 찡그리는 이들이 태반이다.
내가 데려오기 전에 설명을 더 상세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이런 식으로 연설할 줄 몰랐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테키드의 미소가 짙어진다.
“서로 동등하게 서슴없이 지내는 것. 그거야말로 함께 공생할 수 있는 길이다.”
NPC들과 소수의 등반가들은 훈훈한 분위기였지만 나머지는 아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한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가 나서기도 전에 핥짝이가 움직였으니까.
“서슴없이 지내자는 거지?”
핥짝이가 되묻는다.
“그래. 서슴없이.”
“아하. 그렇게 말한다면.”
-빠악!
그의 대답에 핥짝이가 테키드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끼요옷!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엎어지는 녀석.
그때를 놓치지 않고 멤버들이 테키드를 밟는다.
진짜 죽어라 밟는 건 아니고 적당하게.
“눕혀! 눕혀! 갑자기 쓰레기라니. 사람 놀래키고 있어!”
“야아아압! 트롤 짓 하는 줄 알았잖앙!”
“이거 재밌네! 하하하!”
“끄아아아악!”
옳지. 잘한다.
자고로 어색할 때는 적당한 응징이 필요한 법.
테키드의 발언으로 내심 불쾌해하던 이들에겐 통쾌하고, 겸사겸사 본인이 말한 것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만한 게 있을까.
“아, 아버지! 야, 이 새끼들아!”
“테키드 씨?!”
“아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급발진해서 총을 꺼내는 테이준과 말리는 나.
경악한 NPC들 사이, 얼굴을 감싸는 등반가들.
환호하는 쁘찡연합과 슬쩍 모르는 척하는 상위 헌터들까지.
과정이야 어찌 됐든 의미는 전달했다.
구체적인 건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지만 적어도 분위기는 만들었다.
이거면 족하다.
적어도 스타트를 끊는 것으로는 말이지.
“오늘을 파티다! 형씨들 모이쇼!”
자고로 화합에는 축제만 한 것이 없는 법.
이미 이곳에 올 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박재경이 헬다잉 키친을 불렀다.
본인 스스로가 쉐프니 말할 것도 없지.
곳곳에 밝혀진 횃불.
이때다 싶어서 뭔가를 잔뜩 늘어놓는 이들까지.
준비된 것은 없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포인트가 쪼들리는 이는 없다.
적어도 자기 앞가림은 할 수 있는 자들이니까.
상점창에서 산 음료와 술을 꺼내고 폭죽을 터트린다.
“다들 많이 쌓였구나.”
이때다 싶어서 저마다 즐길 거리를 꺼내는 게 처음부터 준비했던 모양이다.
등반가들이 한곳에 모이는 만큼 화합의 장이라고 생각한 걸 수도 있고.
‘그동안 사람이 고팠던 걸 수도 있고.’
이러나저러나 탑은 끊임없이 시련을 준다.
폐쇄된 공간 속 외롭게 등반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은 즐기면 되겠지.”
96층의 밤.
수많은 등반가가 모인 건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고생한 이들에게 적어도 하루의 휴식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 * *
피곤하다.
밤낮 없이 전투를 벌였을 때보다도 피곤하다.
체력적인 것도 있었지만.
“이준석 이 자식, 대체 어디 숨은 거야.”
연합 사람들에게 시달린 게 가장 컸다.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다 혼란의 소용돌이에 직접 빠진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연합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 이준석을 찾아내 처단하려 했지만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황을 봤을 때 분명 96층에 있을 텐데.
‘위기 감각이 좋은 편인가.’
녀석을 위해 사람을 안전하고 고통스럽게 괴롭히는 101가지 방법을 준비했더니만.
쯧.
너무 아쉬워하지는 말자.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은 나한테 있기도 하고.
사라지지 않는 피로에 하품하던 찰나 쌩쌩해 보이는 냥펀이 거실로 나왔다.
탈모맨은 아직 자고 있고 나와 핥짝이는 소파에 누워 있다.
일찍 일어나서 누워 있는 건 아니고 소파에서 잠든 탓.
“어째 넌 멀쩡하다?
“이 정도쯤이야 가뿐하징. 팬 미팅은 오랜만이넹.”
맞네.
그러고 보니 얘 아이돌 출신이지.
핑크 펑크면 꽤나 유명한 그룹이었으니 팬 미팅은 여러 번 해 봤을 거다.
“으으으. 너의 체력, 내가 빼앗아 주마.”
“느아아앗!”
덥썩.
소파에 누워 있던 핥짝이가 냥펀을 붙잡아 끌어당긴다.
저항 없이 끌려가 안기는 녀석.
저게 그 뭐냐. 바디 필로우인가 하는 그건가.
둘이 키가 30cm 정도 차이 나서 그런가 옴짝달싹 못 한다.
냥펀도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조금은 나른하고 여유로운 오전 시간을 보내니 정신이 좀 든다.
“연합 사람들, 생각보다 정상이지 않았냐?”
눈만 돌려 날 바라본 핥짝이가 물었다.
정상이라.
“그렇긴 하지.”
우리 한정으로 나사가 풀려서 그렇지 다들 멀쩡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닉네임으로 불리는 거 부끄러워하더라.”
“크큭. 본인들도 당해 보니 느낌 오는 거지.”
킥킥거리며 웃는 핥짝이.
커뮤니티에서 종종 보이던 이들을 닉네임으로 불렀더니만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볼만했다.
그래. 이거지.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본인들도 겪어 봤으니 더 이상 커뮤니티에서 난동 부리지는…….
[로스트팜]: 제1 회 96층 정모의 딱 하나 아쉬운 점
[로스트팜]: 공듀님이 없.다!
└ㅇㅈ 공듀님만 있었으면 완벽했는데
[근육팡팡전사]: 탈모맨 둔근 보셨나요. 이게 진짜입니다.
└둔근? 두근두근!
└보송송이랑 근육 요정도 장난 없던데
└그건 맞는데 탈모맨은 키가 있잖아. 근육으로 채우기 더 힘듦ㅇㅇ
[일루젼]: 핥짝 님과 찍은 사진!
└뒤에 깨알 냥펀 님ㅋㅋㅋㅋㅋ
조용히 커뮤니티를 껐다.
그래, 내가 쓸데없는 기대를 했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지금까지 탑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누구보다 적응이 빠른 자들이다.
앞으로도 똑같을 걸 생각하니 벌써 암울하군.
그래도 뭐.
“이번에 다른 곳과도 친해져서 다행이야.”
쁘찡연합이 탑 내부에서는 가장 큰 세력인 건 맞다.
인원수부터가 상당하니까.
이전에는 다른 상위 그룹에 비해 등반 수가 낮았었지만.
‘이제는 다 따라잡았지.’
이번에 96층에 모인 인원은 총 43명.
그중 나와 멤버들을 포함해 쁘찡연합이 22명이다.
뭐, 박재경이라든가 명확한 소속이 없는 이들도 있기는 한데.
‘쁘찡연합에 가까운 케이스니까.’
아무튼.
따로 길드 같은 엄격한 규율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더 그랬다.
우리는 따로 길드나 집단에 속해 있어도 가입할 수 있었으니.
규모와 영향력이 커지기는 했지만 고깝게 보는 이들도 있다.
근본이 팬 클럽인지라 이쪽에 관심이 없는 등반가가 보기에는 괴상했던 것.
이런저런 짓도 많이 했거니와.
[플레이어32]: 커뮤니티가 다 너희 거냐!
[맥거핀_블랙]: 서블컬쳐? 뭐야, 이 마이너한 집단은. 너드 모임인가?
커뮤니티에 심심치 않게 출몰하다 보니 불만이 있는 자들도 있던 것.
그 외에도 각자의 목적이 있거나 이전부터 오랫동안 유대를 쌓아 온 그룹과는 크게 친밀하지는 않았다.
루키 그룹이과 요정 클럽도 따지고 보면 우리 멤버들과 주로 엮였지 쁘찡연합 자체와 친한 건 아니었고.
‘빅스타랑 노블 나이트는 목적이 분명한 애들이지.’
얘네도 커뮤니티에서 노닥거리는 걸 좋아하는 애들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어울리며 사이가 가까워져서 다행이다.
“슬슬 준비해야겠네.”
급한 건 끝났으니 이제는 움직일 차례다.
이번에 다들 모여 정보를 교류하기로 했다.
96층의 문제에 대해서도 방안을 찾고.
등반가와 NPC의 대표들이 모이는 자리가 마련될 예정이다.
점심 식사 이후니까 대략 4시간 후에 모이겠지.
당연하게도 쁘찡연합 대표로는 나와 멤버들이 나선다.
실질적으로 연합을 관리하는 이준석도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못 찾았으니 어쩔 수 없고.
연합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96층에 있다고 했는데.
만나면 줘팬다는 건 반쯤 장난이고 한번 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탑에 들어오고 이준석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으니까.
상념을 이어 가며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는 타이밍.
-콰앙!
문이 열렸다.
아니지.
열린 게 아니라 박살 났다.
언제 졸고 있었냐는 듯 핥짝이와 냥펀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쥔다.
나 역시 반사적으로 혼돈검을 반쯤 뽑았고.
“습격이냐!”
쿵쿵쿵!
자고 있었을 탈모맨도 거실로 뛰쳐나왔다.
“습격이다!”
쳐들어온 녀석이 말하는 것도 가관이다.
당당하게 습격이라 하네.
작게 한숨을 내쉬며 검을 내렸다.
“아, 뭔데. 테이준.”
“뒤에는 누구냥?”
아직 전날 밤 축제 분위기가 남아 있는 건가.
우리를 찾아온 건 테이준과 처음 보는 남자.
그리고.
“…오필리아?”
노블 나이트의 수장, 오필리아였다.
자세를 바로 했다.
같이 다닐 구성이 아니다.
거기다가 다들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니.
“습격이 있었어. 지금 아버지가 수습 중이야!”
“간밤에 습격당한 인원이 있어요. 노블 나이트에서 한 명이 사망했고 똑같이 공격당한 파비오는 다행히 숨이 붙어 있어요.”
테이준과 오필리아가 입을 열었다.
습격?
심지어 사망자도 있다.
정신이 번쩍 든다.
자연스럽게 뒤에 있는 남자에게도 시선이 갔다.
“이렇게 인사드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찾아왔습니다.”
그가 눈을 질끈 감더니 앞으로 나온다.
“이준석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