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84화 (684/740)

684화 너희는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오랫동안 뭔가를 계획했고 실천에 옮기는 중이다.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환경도 받쳐 준다.

여기서 문제.

이 상황에서 그 사람을 가장 빡치게 만드는 방법은?

“뭐긴 뭐야. 난장판 만드는 거지.”

열심히 세운 도미노를 쓰러트리듯.

수십 일에 걸쳐 만든 레고 모형을 넘어트리는 것처럼.

제3 안전지대, 피스 랜드.

이탈리아의 등반가, 파비오 스펜서가 차지하려 했던 곳은 대격변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성지순례 왔습니다!”

“여긴가 봐! 모여! 모여어어!”

“오는 길에 무법자 보신 분?”

수많은 등반가가 점거해 버렸으니까.

90층대는 탑의 상위 층 중에서도 상위 층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반적인 경우 여기까지 올라오는 일은 거의 없다.

애초에 내가 들어오기 전 S급 헌터의 기준은 60층이었으니까.

지금은 밖으로 나간 오지혁과 김소담도 90층까지만 찍고 나갔다.

‘사실 90층까지만 올라도 비슷하긴 하지.’

90층이 중요한 건 스킬 등급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이니까.

스킬 레벨이야 탑 안이든 밖이든 올리면 그만이다.

달리 말해 90층에 만족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100층을 목표로 온 등반가라는 것.”

기뻐해라, 파비오 스펜서.

네가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등반가들이 여기 다 모였다.

“이, 이게 무슨! 도대체. 무슨!”

건물 옥상.

그곳에 모습을 숨긴 채 광장에 나온 녀석을 바라봤다.

파비오 스펜서.

큰 키에 발달된 턱.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사내였는데.

“그쪽도 쁘찡연합 사람인가?”

“아니야! 그런 이상한 곳 따위 나랑 관계없다고!”

지금은 멘탈이 나갔는지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상한, 곳?”

그의 말에 일순간 분위기가 싸해진다.

안전지대에 모인 사람은 대략 40여 명.

그중 절반 이상이 쁘찡연합 사람이다.

“하하하! 다들 뭘 그렇게 심각하나! 아직 공듀님 맛을 못 봐서 그래!”

“흐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한국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어허. 이제 쁘찡연합은 글로벌이라고. 한국 사람만 있지 않아.”

“맞는 말입니다. 제가 실언했어요.”

언제 분위기가 삭막해졌냐는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되레 기운 내라며 파비오의 어깨를 두드려 주기까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파비오뿐만이 아니었다.

“이거, 어쩌지?”

“나도 몰라. 일단 가만히 있어.”

“그, 인원 제한 걸려서 퀘스트가 뜨기는 했는데.”

“미쳤어? 여기서 어쩌자고.”

NPC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면서 96층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일 테니.

안전지대에는 인원 제한이 있다.

당연히 인원이 초과하면 시스템이 제한을 걸어 온다.

NPC한테 영주권이 없는 대상을 쫓아내라고 하는 것.

보통이라면 생각할 것 없이 움직였겠지만.

“뭐. 음. 그래. 이럴 수도 있는 거지.”

“시스템 퀘스트 굳이 안 깨도 되잖아?”

“오히려 재밌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시스템을 무시해 보겠어? 흐하핫!”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수만 따지면 그들이 훨씬 많다.

지금 안에 있는 NPC만 따져도 400명은 넘을 테니까.

그럼에도 등반가를 건드는 건 그들에게도 부담이었고.

“차라리 이 꼴 난 게 보기 좋잖아?”

“그러게 말이야! 껄껄껄!”

이곳에 있는 NPC들은 파비오를 좋게 보고 있지 않았다.

목숨 걸고 등반가들을 공격하면 뭐 할까.

그래 봤자 파비오는 다시 NPC들을 겁박할 텐데.

“애초에 안전지대가 등반가들 있으라고 만든 곳이기도 하고.”

본래의 취지에도 맞았다.

그저 등반가가 너무 없기에 NPC들이 있었을 뿐.

따지고 보면 그들도 안전지대를 고집할 명분이 없었다.

“고생한 보람이 있구만.”

“그에에.”

이 주일.

그래. 이들이 모이는 데 이 주일이 걸렸다.

애초에 96층에 있던 이들이야 문제가 없었는데.

‘94층이나 95층에 있는 사람들은 쉽지 않았거든.’

그보다 아래층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내가 따로 발판을 마련한 곳은 괜찮았다.

각 층의 지배자급 NPC들이 우호적으로 나오는데 올라오기 힘들 리가 있나.

문제는 90층대는 같은 층이어도 여러 층이 존재한다는 거였고.

“최근에 몇 번을 죽은 거야.”

난 직접 그곳으로 뛰어 들어가 등반을 도왔다.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도왔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미 연합 사람들은 내 인상착의와 스킬을 알고 있는 상태.

[섹시가이]: 형니이이임! 어디 계십니까!

[섹시가이]: 형님의 동생! 아우! 섹시가이와 함께 올라오지 않으셨습니까!

└이분 진짜 이블아이 동생인가요?

└마음으로 이어진 동생입죠!

[마지막잎새]: 음? 이블아이 님은 저랑 같이 올라왔어요!

[보송송이]: 94층 클리어할 때는 나랑 있었는데요?

└??? 뭐임?

[근육팡팡전사]: (속보) 이블아이의 도플갱어 곳곳에서 출현 증언!

└히익! 무, 무서, 무히려 좋아!

완전히 눈을 속이기란 불가능했다.

때아니게 나를 찾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어 본의 아니게 숨어 있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으으아아! 공블아이 어딨냥!”

“이 자식, 지가 불러 놓고 어디로 튀었어? 걸리면 진짜 뒈졌다.”

“하하하! 다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고 좋은데 뭐!”

지금 나가면 멤버들한테 죽을 것 같아서 나가기가 무섭다.

나도 이 정도로 모일 줄 알았나.

많아 봐야 20명 정도 올라올 줄 알았지.

아무래도 내가 쁘찡연합과 다른 상위 헌터들을 얕본 모양이었다.

이 중에 이준석도 있다는 거지.

“진짜 만나기만 해 봐라. 멱살부터 잡는다.”

연합을 위해 고생하는 건 알지만 이건 내 개인적인 울분이다.

이 녀석이 사람들을 사이비로 만들어 놨어.

공듀 공듀 거리는 게 꿈에 볼까 두렵다.

계획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다행인가.

한 번에 사람들을 모아 넣길 잘했다.

아무튼.

“가 보실까.”

난 옥상에서 뛰어내린 후 지하 통로로 이동했다.

이미 피스 랜드는 통제 불가 상태.

테이준과의 약속을 지킬 때다.

“이블아이.”

“어. 바깥 상황은 대충 알지?”

“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지.”

이미 해가 진 저녁.

평소라면 잠들 시간이었지만 떠들썩한 바깥 분위기와 파비오의 통제가 사라졌다는 해방감에 피스 랜드는 밝게 빛나고 있다.

“이쪽입니다.”

“지금이라면 놈들도 어쩌지 못할 겁니다, 도련님.”

테이준의 아버지.

이전, 파비오가 오기 전까지 피스 랜드에 군림했던 NPC를 구하러 간다.

구한다고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저벅. 저벅.

통로를 따라 이동.

다른 건물에 비교해도 커다란 저택으로 들어갔다.

원래라면 파비오에 붙은 NPC들이 지키고 있을 테지만.

“이야. 저기 난리 났네.”

“우리도 갈까?”

“파비오 그 자식이 지랄할 텐데?”

“뭐 어때. 그 새끼도 이제 끝인 것 같은데.”

“그동안 우리가 너무 소극적으로 있기는 했지.”

지금은 달랐다.

구태여 가까이 가지 않아도 많은 게 바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

사실상 보안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

“반갑습니다. 테이준 아버님 데리러 왔어요.”

“야, 야야! 미쳤어?”

당당히 정문으로 들어갔다.

당황한 테이준이 옆구리를 찔러 댔지만 무시했다.

정체를 숨길 생각 따윈 없어서 펠라인 세트도 착용했다.

거기에 쁘찡연합을 상징하는 핑크 띠까지 팔에 착용했으니.

“아, 예. 등반가신가 보군요? 들어가세요.”

“테이준? 테이준이지?”

“그때는 미안했네. 우리도 살고 봐야 했거든. 알잖나. 밖에도 아무나 나갈 수 없다는 걸.”

그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거기에 테이준에게 사과하기까지.

그들이 한 짓은 어찌 보면 배신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을까.

“무슨. 뭐.”

테이준도 말을 더듬더니 큰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가져가! 테키드 씨는 안쪽 연회실을 개조한 곳에 모셨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병사가 열쇠 꾸러미를 던져 준다.

테키드라는 사람이 테이준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안에 갇혀 있다는 건 사실인 모양.

‘갇혔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안에 있는 거겠지만.’

나도 귀가 있다.

테키드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들어 알고 있었으니.

무력도 무력이지만 NPC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얌전히 잡혀 있는 이유 또한 NPC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고.

“뭔가 허무해.”

“허무할 게 있나.”

“나는 왜 몇 년 동안이나 밖을 돌아다닌 거지?”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고작 이 주일 만에 해결됐다.

허탈감이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 잠깐 바뀐 거야. 지금 제대로 방향 못 잡으면 예전처럼 돌아가는 거라고.”

난 녀석의 정신을 깨웠다.

맞다. 지금은 얼추 해결된 문제기는 하다.

아니. 시간이 더 흘렀다면 알아서 해결됐겠지.

NPC들이 들고일어나든 아니면 파비오가 위로 향하든.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났을 거다.

‘둘 다 좋은 선택지는 아니지.’

어느 쪽이든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들 모두 등반가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게 될 테니까.

그러니 바꿀 생각이었다.

도움이 될 사람은 테이준의 아버지 테키드.

-철컥.

테이준이 열쇠를 돌린다.

기름칠해서 매끄럽게 열리는 문.

“아버지.”

“테이준?”

그곳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좀 더 중후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젊네.’

NPC한테 젊다고 말하는 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기껏해야 20대 후반.

많아야 30대로 보이는 외관이다.

“파비오가 막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다 끝났어요. 그 자식 이제 자기 마음대로 못 움직여요.”

저 싸가지 없던 녀석이 존댓말 쓰니 새삼 이상한 느낌이다.

마음 같아서는 몇 년 만에 만난 부자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블아입니다. 등반가죠.”

“파비오랑은 다른 느낌이군.”

그는 약간의 경계심도 없었다.

그동안 당한 게 있었을 텐데.

마음이 넓은 사람인가.

다행이다. 성격이 꼬여 있거나 했으면 골치 아팠을 텐데.

대략적인 상황을 이야기했다.

내가 그에게 원하는 건 하나.

“합의점을 찾으시죠. 안전지대가 필요한 건 등반가나 NPC나 똑같으니까요.”

“그러지. 분란은 이 정도면 족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이미 광장은 인산인해.

등반가들은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새로운 사람을 소개해 줬다.

상위 헌터들 간의 교류.

커뮤니티가 아닌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은 그 자체로 신선했다.

보아라. 저기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친근하게 다가가지 않나.

“이게 진짜 좋은데. 한번 맛보면 정신을 못 차려요.”

“아, 아니. 난 굿즈 같은 거 관심이 없어서.”

“자, 자. 이거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닌데. 어디 보자. 이블아이 팬픽이…….”

그만둬, 미친놈아!

쁘찡연합이 신나서 다른 상위 헌터들에게 영업을 하고 있었다.

“잘한다! 그래! 이블아이 것만 잔뜩 뿌리자!”

“히히! 꼴 좋탕!”

핥짝이와 냥펀이 깔깔거리며 부추기기까지.

탈모맨, 넌 왜 호기심 있게 보고 있냐.

뭔가 싶어서 봐 보니 내가 아니라 본인을 주인공으로 그린 만화책이다.

아니군. 만화책이라기보다는 헬스 잡지에 가깝다.

“하하하! 내가 고증이 잘되어 있군, 근육팡팡전사!”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네요.”

“열심히 하면 우리처럼 될 수 있을 거야!”

머리를 긁적이는 연합 사람 앞에 선 탈모맨, 보송송이, 근육 요정.

근육 트리오가 포징을 취하자 사람들이 모여든다.

“우오오오!”

“형아! 나 죽어!”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아. 벌써 머리 아프네.

“그. 뭐랄까. 활기차군.”

테키드가 애써 칭찬했지만 부끄러움은 내 몫이었다.

슬쩍 테이준을 살피자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저기 이블아이다!”

“오오! 진짜다!”

이미 내가 진입하면서 이목이 쏠린 상태.

“반갑습니다! 연합 여러분! 상위 헌터 여러, 으아아악!”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멤버들이 달려들었다.

“너 이 자식!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

“얍! 얍! 죽어랏!”

“어디 갔나 했더니만 여기 있었잖아? 너도 포징해! 포징!”

내 머리를 잡아당기고 때리고 양팔을 들고 난리가 났다.

“잠깐! 잠까아안! 일단 이야기부터!”

“응징이나 받으라구!”

“자꾸 그러면 치명적인 포즈를 취하는 수가 있어!”

“아. 그건 좀.”

멤버들을 진정시킨 후에야 말할 상황이 되었다.

지금도 간간이 ‘공듀님은 어디 있나요!’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상태.

“일단 공듀는 위에 있습니다.”

“오오오오오!”

블러핑 한번 쳐 주고.

“여기 모인 이유는 하나! 100층으로 올라가기 전, 등반가들과 NPC들의 화합을 위함입니다!”

본론을 꺼냈다.

명분은 있었다.

위로 올라가기 전, 쉴 수 있는 건 지금이 마지막일 것이며.

혹여나 죽어서 96층에서 부활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이가 모일 일은 없을 거다.

타이밍이 맞지 않든 코인을 모두 써서 밖으로 나가든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지금 얼굴을 익혀 두면 위로 올라가서도 서로 도울 거고.’

연합 사람들이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다른 상위 헌터 그룹은 별개니까.

비교적 사이가 좋은 빅스타 길드와 노블 나이트도 그들만의 목적이 있다.

완전히 동화할 수는 없다는 것.

“위에는 지금보다 더 강한 적이 있을 것이고 NPC들도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특히나 상위 층을 오른 이들이라면 동감할 수밖에 없다.

상위 층은 하나의 세계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었으니.

“적대시하기도 하고 함께 힘을 모으기도 하겠죠.”

나만 해도 그렇다.

91층의 파하르.

92층에서 만난 미야와 괴물 사냥꾼, 뱀파이어의 수장 파무라다.

93층 마왕성 간부들과 가르티.

94층에 있던 미르바와 아델라를 비롯한 성주들, 에이션트 드래곤인 메리뮬레.

95층 도심에 모인 폴과 드렉프리.

이들이라고 다를까.

저마다 등반하며 인연이 생긴 NPC들이 있을 거다.

“함께 가는 겁니다.”

결국에는 헤어질 사이지만 그 순간의 인연은 진짜니까.

이들 중에는 계승자도 있을 거다.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짊어진 이들.

연합 사람들은 쁘띠, 평화, 사랑을 외치고.

“좋은 이야기네요.”

“이거 때문에 불렀던 거구만.”

“옳은 소리 아니겠소.”

오필리아를 비롯한 상위 그룹들 또한 동조해 줬다.

난 테키드에게 눈짓했다.

등반가로서의 연설은 여기까지다.

다음은 NPC인 그가 마무리할 차례.

앞으로 나온 테키드가 사람들을 바라본다.

NPC들의 반응이 올라온다.

이런 일에 익숙한 걸까.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분위기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너희는 쓰레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