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3화 모여라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핥짝이에게 쏠린다.
테이준도 마찬가지.
나도 여기서 핥짝이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언제 올라왔어?”
“나? 대충 4일 정도 됐나.”
생각보다 오래되지는 않았다.
“으읏차. 딴 애들이랑 언제 만나나 했는데 이렇게 만나네.”
자리에서 일어난 핥짝이가 나를 잡아끈다.
“잠깐 얘기 좀 하고 올게.”
“아, 예. 갔다 오십쇼.”
“저희도 도련님과 이야기하고 있겠습니다.”
명백히 상급자를 대하는 태도.
며칠 만에 이곳을 접수하기라도 했나.
아니. 그 전에 왜 숨어 있는 거지?
물어볼 말은 많았지만 일단 따라갔다.
핥짝이 또한 별다른 내색 없이 나아가더니 우뚝 멈춘다.
주변에 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는다.
“이 녀석, 나를 도우러 여기까지 오다니!”
“악! 그냥 온 거거든?”
-쭈우우욱!
“야이 씨! 안 놔!?”
바로 녀석의 볼을 잡아당겨 응징했다.
난데없는 힘 싸움.
애석하게도 녀석이 고개를 뒤로 쑥 빼는 것으로 빠져나갔다.
키만 커 가지고. 아오.
내가 20cm만 더 컸어도!
아무튼.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도움이라니.”
이 부분이 걸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핥짝이도 이곳에 있고 싶어서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굳이 안전지대를 놔두고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
물론 이곳에 있는 파비오라는 등반가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기는 하다만.
‘그런 놈한테 핥짝이가 밀리지는 않을 거란 말이지.’
안전지대에서 놈이 폭군처럼 굴지는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NPC 한정이다.
같은 등반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말.
등반가끼리는 싸워도 되니까.
진짜 죽이면 살인자 칭호가 붙기는 하는데.
“여기 주인이랍시고 있는 녀석 때문에 그래? 그 녀석 살인자 칭호도 있을 거잖아.”
테이준이 해 준 말에 따르면 놈은 이미 살인자 칭호를 가지고 있다.
NPC를 죽여도 살인자 칭호는 받으니까.
놈을 죽여도 핥짝이가 살인자 칭호를 받을 일은 없다는 것.
“그렇기는 한데. 흠. 뭐라고 해야 하나.”
팔짱을 끼며 말을 끌던 핥짝이가 한숨을 내쉰다.
“일단 녀석이 나를 공격한 건 아니야.”
어떤 일이 있는지 대략적으로 설명해 준다.
간단히 말하자면.
“등반가한테는 잘해 준다는 거네?”
“맞아. 애초에 이곳을 먹으려고 했던 것도 그거야. 완전히 등반가를 위한 안전지대를 만들려고.”
안에 있던 NPC들을 쫓아내고 등반가를 위한 안전지대를 만든다.
듣기만 하면 괜찮아 보인다.
당장 나도 인원 제한에 걸려서 안전지대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나.
안전지대에 확정적으로 떨어지는 것만 해도 확실히 이득이다.
“96층에 등반가들만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거야.”
안전지대의 인원 제한은 대략 500명.
등반가의 생존율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여기까지 올라오는 등반가가 수백 명일 거라는 생각은 없다.
대다수가 그 전에 떨어지겠지.
그럼에도 가능성을 열어 두고 등반가가 안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건 좋은 일이다.
지금도 많은 이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으며.
‘90층대를 진입한 이들도 예상보다 빠르게 등반하고 있어.’
90층대에 머물기로 한 상위 헌터들도 있다.
그들은 등반 의지를 잃었으니까.
나도 그들을 강요할 생각이 없었고 그럴 권한도 없었다.
하지만 뭐든 일에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었고.
‘이준석이 말하길 90층에 머물고 있던 이들도 하나둘 위로 향했다 했지.’
쁘찡연합을 위주로 위로 올라가는 이들이 늘어나자 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탑에 잔류하고 있는 최고 전력 중 하나.
탑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이들의 능력을 얕볼 수는 없다.
90층까지 올랐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애초에 단절된 공간에서 몇십 년 동안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쉬울 리가 없다.
멘탈이 굉장히 강하다는 뜻이었으며, 탑에서 멘탈 유지는 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듣기만 했을 때는 괜찮아 보이는데.”
“그러기 위해 이곳에 있는 NPC들을 전부 쫓아내려 해.”
“아하.”
문제는 그 과정이다.
안전지대?
좋다. 있으면 좋은데.
“NPC들이 머릿수를 채우고 있으니까?”
“지금 밖에 난리 난 건 알지? 내쫓고 있는 거야.”
대충 이해가 됐다.
어쩐지 왜 피스 랜드에 있어야 할 NPC들이 제4 안전지대까지 왔나 했더니만.
이런 이유라면 납득이 됐다.
동시에 무법자들의 움직임도.
안 그래도 먹을 것 없는 땅에 외부인들이 들어오니 날이 설 수밖에.
내쫓는 방법은 간단했다.
“몇 명 본보기로 죽이고 나한테도 협조를 요청했거든.”
“과격한 놈일세.”
“미친놈이지. 대가리 몇 번 때려 주면 정신이 들려나.”
“…네가 때리면 깨져.”
“오.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머리가 아파 미간을 문질렀다.
정상적인 방법이라고는 못하겠지만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다.
적어도 안전지대에서는 등반가가 훨씬 유리하니까.
나 또한 필요하다면 상대방을 처리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만.
‘좀 그런데.’
거부감이 들었다.
다른 등반가는 어떨지 모르겠다.
난 유독 NPC들과 가까이 지낸 편이다.
핥짝이를 포함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
그걸 떠나서 이건 그냥 침략 아닌가.
“굳이 제한 인원을 다 차지할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이고.”
“그것도 그런데, 우리가 그걸 조정할 입장인가 싶더라.”
우리가 뭔데 인원수를 제한하냐는 거다.
의도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방법이 문제다.
그렇다고 해결책도 마땅히 없다.
그게 현재 핥짝이가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놈을 잡을 거야?”
“모르겠네. 일단 돌아다니다가 이 녀석들이랑 합류하기는 했거든?”
팔짱을 낀 채 인상을 찌푸린 핥짝이가 작게 속삭인다.
“얘네는 내가 놈을 잡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같은 등반가니까.
NPC는 시스템 제약을 받아서 놈을 잡는 게 힘들지만 핥짝이는 아니다.
아예 페널티 없이 싸울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지.
“골치 아프네.”
애초에 등반가를 위해 만들어진 안전지대.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왔던 NPC.
그들을 무력으로 죽이고 쫓아내는 등반가.
나는.
아니,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
쉽지 않은 문제였다.
동시에, 잠깐 생각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짧지만 깊게 여러 의견을 나누었고.
“일단 돌아가자.”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조합한 후 돌아갔다.
방 안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떠들썩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저마다 할 이야기가 많은 모양.
대부분 안전지대를 차지한 파비오에 대한 불만이었다.
일단 가만히 앉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파비오를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살아갈 권리가 있소.”
“그의 행적은 과하다 못해 폭정이라 불릴 만한 것이지.”
저마다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낸다.
등반가 입장에서 마음 편히 들을 수는 없는 노릇.
“그대들도 도의적인 책임감이 있다면…….”
“헛소리할 거면 입 다물어.”
수염쟁이의 말에 손을 들어 제지했다.
누구 마음대로 도의적인 책임이래.
같은 등반가니까 알아서 도우라 이건가?
“따지고 보면 우리도 그놈이랑 같이 가는 게 이득이야.”
“그런!”
냉정하지만 이득만 좇는다면 이게 맞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에도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너희 때문이 아니야. 선례를 만들기 싫어서지.”
난 NPC와 가깝게 지낸다.
그렇다고 모든 NPC와 가깝다는 뜻은 아니다.
굉장히 지엽적인, 개인적인 인연이 있을 뿐.
이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들이었고 당연히 친밀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NPC에게는 호감도라는 게 있어.’
호감도가 높으면 퀘스트를 받을 수도 있고 도움도 받을 수 있다.
어쩌면 계승자가 될 수도 있고.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릴카의 퀘스트를 받았을 때 보상으로 NPC들의 호감도를 받았지.’
이상한 놈들도 있었지만 내게 호의를 보낸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NPC는.
‘그들 나름대로의 커뮤니티가 있어.’
그렇기에 우리에 대한 소식도 NPC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진다.
쁘찡연합 사람들이 등반을 거듭하며 우리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NPC가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니까.
“그 녀석 때문에 등반가를 적대시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는 없지.”
NPC는 강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
당장 상위 층만 올라가도 등반가는 NPC와 싸울 능력이 생긴다.
96층과 같은 상황이 다른 안전지대에서 발생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만약 다른 안전지대에서도 등반가들이 NPC를 학살하고 차지한다면?
‘개판 되는 거지.’
퀘스트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기본적인 물품을 구하는 것도 상점창으로 한정될 거다.
어쩌면 참다 못해 NPC들이 등반가를 공격할 수도 있고.
심해지면.
‘필드에서도 등반가를 공격할 수 있어.’
거기는 아예 제한이 없으니까.
백 보 양보해서 여기까지도 그렇다 치자.
그다음은 어떨까?
‘등반가를 적대시하는 세력과 힘을 합치겠지.’
숭배자들의 편에 붙는 NPC들이 늘어날 거라는 뜻이다.
과장된 생각일까?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폐쇄적인 세계에서는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는 하니까.
특히나 이렇게 폭력과 죽음이 만연한 세상이라면 더욱더.
그렇기에 결정했다.
“상황을 반전시켜야 해.”
96층을 정상화할 거다.
피스 랜드를 등반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든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탑에 있는 인프라는 모두 NPC들이 관리하니까.
그렇다고 안전지대를 그들에게 줄 수는 없다.
당장 나도 안전지대에 못 들어가고 튕겨 나가지 않았던가.
어느 쪽도 해답이 아니라면.
‘선택지 외의 것을 고른다.’
그동안 그래 왔듯.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다.
두 세력 중 어느 쪽에도 붙기 싫다?
그렇다면.
‘제3의 세력이 등장하면 되지.’
그리고 내게는 그렇게 만들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일단 쉬자고.”
“크흠.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우리가 흥분하기는 했지만 너무 나쁘게 보지만은 마시게.”
달래듯 뭐라 떠드는 이들을 뒤로했다.
“이블아이.”
테이준이 잠시 나를 불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야. 나중에.”
“그래.”
사람이 여럿 있을 때 할 말은 아닌 모양.
기회가 될 때 다시 말하겠지.
자리에서 벗어났다.
핥짝이와 함께 배정된 방으로 들어간 후.
“시작하자.”
“오랜만에 어그로 좀 끌어 보실까.”
우리는 커뮤니티를 켰다.
핥짝이도 이곳에 있으면서 가만히 있던 건 아니다.
96층에 들어온, 혹은 들어왔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들을 확인하고 있었지.
거기에 더불어 96층으로 들어올 만한 이들을 합친다면?
‘충분히 많은 사람이 몰릴 수 있어.’
시간은 좀 걸릴지 몰라도 말이다.
난 쁘찡연합의 화력을 믿는다.
[쁘띠공듀]: 다들 등☆반은 잘하고 있나용!
[쁘띠공듀]: 오늘의 상식 OX 퀴.즈!
[쁘띠공듀]: 96층에도 안전지대가 있다↗없다↘ 정답은?!
96층에 대한 언급.
[정수리 핥짝]: 냥냥! 펀펀! 96층 어디야?
[냥냥펀치]: 나 아마 제2 안전지대인 듯?
[정수리 핥짝]: 그럼 3번으로 와
[냥냥펀치]: 으에?
[정수리 핥짝]: 탈모쉨 너도! 너 언제 96층 들어왔다며!
[니머리 탈모]: 어, 어떻게 알았지?!
[정수리 핥짝]: 마그마 요정이 말해 줬어
[니머리 탈모]: 깜짝 등장 할라 했는데!
탈모맨 이 녀석도 여기 있었어?
마그마 요정도 여기 있다는 것 같고.
당연히 나와 함께 95층을 클리어한 초코쪼코와 찌리리 요정도 여기 있을 거다.
멤버들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알려 준 후는 일사천리였다.
96층에 있는 이들이 모이자고 외쳤고 위로 향하는 이들을 격려했다.
반응이 오는 건 금방이었다.
[이준석]: 오오오! 96층에서 정모입니까!
[근육팡팡전사]: 때마침 올라가기 좋은 94층. 후후후…….
[마지막잎새]: 공듀님! 공듀님도 있나요?!
[라임라이]: 아… 아직 80층대인데 ㅠ
[섹시가이]: 형님! 이블아이 형님도 계십니까!
└그러타!
└오오오오! 형니이이임! 섹시가이 김정현! 형님을 보러 가겠습니다!
이준석과 섹시가이, 김정현을 비롯해 수많은 연합 사람이 관심을 보였으며.
[보송송이]: 다들 잘 지내는 거 같아 보기 좋군요.
[요리킹]: 파티 하는 거요? 파티에는 음식이 빠질 수 없지!
[김선혜]: 나도 갈게
냥펀, 정확히는 핑크 펑크의 골수 팬 보송송이.
헬다잉 키친의 쉐프, 박재경.
79층에서 만난 상위 헌터, 김선혜도 참여 의사를 밝힌다.
그뿐일까.
[이지키일]: 오우. 레인보우! 벌써 거기까지?
[브레드]: 오우. 코리안!
빅스타 길드의 이지키일과 브레드.
[초코쪼코]: 뭐야? 뭐 하는 거야?
[찌리리 요정]: 나도 96층이기는 한데.
[근육 요정]: 94층이라 시간이 좀 걸릴 거 같군.
[화무선]: 허허. 인연이란 실타래와 같이 얽히고 흩어지는 법
[김조균_산군]: 음? 나도 곧 96층 갈 듯?
[송곳 요정]: 우리 막내 보러 가야지!
루키 그룹과 요정 클럽.
마지막으로.
[갓블레스]: 노블 나이트도 함께 하죠.
노블 나이트를 대표하는 구원자, 오필리아까지.
탑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