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2화 또 다른 제약
갑작스럽게 찾아온 녀석들과의 전투.
감상을 말하자면.
“이놈들, 집단으로 행동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그에에.”
오합지졸이었다.
개개인으로 보면 확실히 수준이 높다.
인원도 우세했으니 제대로 진형을 짜고 압박했으면 나도 꽤나 고생했을 거다.
“크으으으.”
“고작 한 명한테!”
“빌어먹을 놈들. 그대로 내빼다니.”
안타깝게도 놈들은 그러지 못했지만.
어째 몇몇 집단을 이루어 나를 상대한다 했다.
편대를 구성하는 건 좋았지만 합이 안 맞는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들 복장도 자기 멋대로였지.
‘용병?’
그렇게 보면 될까?
그런 것치고는 다 같은 심벌을 달고 있었는데.
규모를 무리하게 확장하느라 내실을 다지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그거야 저쪽 사정이니 그렇다 치고.
“살짝 아쉽군.”
난 저 멀리 달아나는 놈들을 바라봤다.
상황 보고를 위해 파발을 보내는 건 당연하다만 저건 그냥 후퇴다.
불리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내뺀 이들이 있었으니.
굳이 이런 곳에서 죽을 생각이 없다는 거다.
한마디로.
“너 그냥 누가 앉혀 둔 거지?”
“닥쳐라.”
부하들은 장교에 대한 신뢰가 없다.
응집력이 약하다는 뜻.
마치 누가 장교 자리에 앉혀 두니 억지로 따르는 느낌에 가까웠다.
“네놈은 크게 실수한 거다.”
어깨에 깊은 부상을 입은 장교가 눈을 부라렸다.
기세는 살벌하다만 이미 상황은 끝난 상태.
이곳에 남아 있는 건 죽거나 치명상을 입은 자들뿐이다.
상황은 대충 정리된 것 같고.
-파사사삭.
“푸후! 야! 죽는 줄 알았잖아!”
“어. 왔냐?”
“왔냐? 왔냐아아? 사람을 묻어 버리고 할 말이냐!”
타이밍 좋게 테이준도 땅속에서 기어 나왔다.
다수를 상대할 때 폭발을 주로 이용하다 보니 이 녀석을 땅에 박아 놨었다.
괜히 이 녀석 신경 쓰다가 당할 수는 없었으니까.
‘딱 봐도 얘를 원하는 눈치였고.’
인질로라도 잡히면 곤란하다.
음.
생각해 보니 아니군.
나랑 그리 깊은 사이도 아니니.
“얘랑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이 부분부터 확인해 보자.
제3 안전지대, 피스 랜드.
그곳의 장교가 아버지를 들먹이며 테이준을 찾았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피스 랜드에서 거물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인데.
“배신자야. 아버지를 배신한 쓰레기.”
테이준의 목소리에는 적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권총을 만지작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쏴 버리고 싶은 모양.
가볍게 테이준의 손을 눌렀다.
지금 놈을 쏴 봤자 얻는 것도 없다.
차라리 정보를 얻는 용도로 쓰는 게 맞다.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하나.
‘96층의 안전지대는 내가 아는 안전지대와 다를 가능성이 크다.’
당장 냥펀도 위화감을 느끼고 살피고 있지 않던가.
우리만 그럴까?
이곳에 올라온 다른 등반가들도 비슷한 상황일 거다.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된 정비를 할 수 있을 리 없지.
현재 상황과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스륵.
테이준이 총 대신 단검을 뽑는다.
“내가 없는 동안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제대로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흐흐흐. 무법자들이랑 어울리더니 없던 오기라도 생기셨나 봅니다?”
-푸욱.
놈이 이죽거리기가 무섭게 단검이 허벅지를 꿰뚫는다.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하게.
표정 변화는 없었다.
장교 또한 이를 악물 뿐 비명은 없었고.
“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신 것 같고. 아니, 살아 계셔야겠지.”
고개를 까딱이며 생각에 잠긴 테이준이 다른 단검을 꺼냈다.
“네가 이렇게 돌아다닌다는 건 그 녀석도 아직 있다는 걸 테고.”
-푸욱.
“끄읍.”
두 번째 단검이 허벅지에 박힌다.
이건 참을 수 없었는지 작은 신음을 내뱉는다.
“이곳까지 진출했다는 건 다른 세력 또한 그 녀석에게 먹혔다는 거야.”
세 번째 단검을 뽑은 녀석이 쪼그려 앉은 채 장교를 노려봤다.
“그 망할 등반가는 아직도 피스 랜드에 있나?”
녀석의 물음에 장교가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등반가?’
나 역시 예상 밖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니까 대충 맥락으로 봤을 때.
‘테이준의 아버지를 치고 안전지대를 차지한 사람이.’
등반가라는 거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람.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테이준이 어째서 내게 유독 까칠했는지.
성격 문제도 있겠지만.
‘등반가한테 당한 게 있는 거야.’
조용히 입을 다문 채 팔짱을 끼었다.
지금 내가 나서는 건 모양이 좋지 않다.
녀석이 심문하는 것을 유심히 들으며 다음을 생각하자.
* * *
처음 목적지였던 제4 안전지대를 거치고 제3 안전지대, 피스 랜드로 진입했다.
아쉽게도 제4 안전지대에는 냥펀이나 다른 상위 헌터가 없었다.
“경비 삼엄하네.”
과거 96층은 지금과는 분위기가 달랐다고 한다.
좀 더 평화로운 느낌이 강했지.
무법자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대다수의 NPC가 방랑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럼 왜 이렇게 바뀐 걸까.
이유는 크게 2개.
혼돈을 품은 몬스터의 등장.
그리고.
“등반가가 이곳을 날름 먹으려고 하고 있어.”
“굉장히 저렴하면서 확실한 설명이군.”
대략 5년 전에 등장한 등반가의 행보 때문.
거의 요새나 다를 바 없이 증축된 안전지대에는 은은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수상한 자가 다가오면 가차 없이 창을 찔러 넣을 것 같은 문지기들.
“가자.”
난 테이준을 등에 업고 줄로 고정했다.
놈들은 테이준을 원하고 있다.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
그렇기에 월담을 할 예정이다.
[달라붙기(S) Lv.MAX]
손가락 한 마디도 들어갈 틈이 없는 성벽이었지만 상관없다.
그저 몸을 밀착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른 시간.
기척을 죽이고 성벽을 올랐다.
증축했다고는 하나 그래 봤자 10m 정도의 높이다.
‘일단 주변에 사람은 없고.’
이미 영주권이 없는 자들은 모두 빠져나가 도시가 텅 비어 있다.
그나마 몇 명의 병사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보초를 서고 있을 뿐.
-타앗.
성공적으로 성벽을 통과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영주권이 없다.
달리 말하면 불법 체류자와 같은 상태라는 것.
들키면 즉결 처분 대상이다.
그냥 좋게 좋게 뇌물 주고받으며 숨어 살면 되는 거 아니야 할 수도 있는데.
‘걸리면 시스템 퀘스트가 발생한다고 했지.’
불법 침입자를 잡는 자에게 포상이 돌아간다.
그것도 시스템 단위의 포상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를 잡으러 NPC들이 몰려올 거라는 뜻.
처음에는 밤이 아니라 아침에 진입하려 했다.
사람이 몰리니 시선도 분산되고 사람 틈에 섞이면 눈에도 덜 띄니까.
물론 그 계획은 바로 엎었지만.
“이쪽이야.”
로브를 뒤집어쓴 테이준이 앞장선다.
이곳에 오래 있던 만큼 숨겨진 길도 잘 알고 있다.
아버지가 성주나 마찬가지였으니 더 그렇겠지.
골목과 골목이 이어진 지점.
-끼이이이.
녀석이 폐가의 문을 열었고.
“다행히 아직 안 막혔군.”
카펫 아래에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를 열었다.
어두컴컴하고 먼지가 자욱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일단 고맙다.”
“고마울 것까지야.”
난데없이 입을 연 녀석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객관적으로 보면 맞다.
굳이 내가 녀석을 도울 필요는 없다.
그저 이곳이 체크 포인트가 된 만큼 혹시 모를 위협은 없앨 생각이다.
나야 죽으면 무한히 부활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지 않은가.
이미 테이준은 어느 정도 등반가에 대한 반감이 있다.
그 원인은 이곳을 차지한 등반가.
‘파비오 스펜서.’
이 녀석이 안전지대에 있는 NPC들을 몰아내고 있다.
정확히는 완전히 장악하려 하고 있다.
그에 따라 죽은 이들도 있었고 밖으로 빠져나가 무법자가 된 이도 한가득이다.
96층에 무법자가 늘어나게 만든 원흉 중 하나라 보면 된다.
이런 식으로 등반가에 대한 분노를 가진 이들이 늘어난다?
‘그때는 여기서 발 뻗고 자기 힘들지.’
내가 그동안 뭐 때문에 층마다 안전장치를 만들었는데.
후발대로 올라올 연합 사람들과 등반가들을 배려한 거다.
트롤 짓 하는 한 놈 때문에 일을 망칠 생각은 없다.
“예전에 놈에게 대항하던 이들의 모임이 있어. 아직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윽.
녀석이 벽 한쪽을 훑는다.
날카로운 뭔가로 긁은 흔적이 보인다.
“다행히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아.”
“일종의 레지스탕스인가.”
“원래 주인을 되찾는 거지.”
그것도 그렇군.
애초에 NPC들이 먼저 차지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 녀석 말이야. NPC들이 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았을 텐데.”
가는 길도 심심해 대화거리를 꺼냈다.
이 부분이 의문이었다.
NPC는 강하다.
물론 모두가 엄청나게 강한 건 아니겠지만 무시할 수 없는 대상임엔 분명했다.
몇몇 강력한 이들은 나도 힘겹게 싸워야 할 거고.
그런 이들이 여럿 있는 만큼 등반가가 마음대로 활개 치고 다니긴 힘들지 않은가.
“…살인자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건 등반가뿐이야.”
약간의 침묵 끝, 테이준이 입을 열었다.
아.
한 문장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살인자 칭호는 등반자의 것이다.
과거 언젠가 이런 팁 메시지도 있었다.
[Tip. NPC는 살인자 칭호를 얻을 수 없습니다!]
안전지대라는 곳이 등반가들이 쉬기 위해 만들어 놓은 건데 NPC가 등반가를 죽인다?
말이 안 되지.
10층에서도 그랬다.
킬더레스와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이 날 때렸다가 시스템 제약에 걸릴까 봐 편의를 봐줬었다.
그걸 인연으로 지금은 좋은 관계를 가지게 되었지만.
‘등반가도 마찬가지야.’
등반가는 안전지대에서 살인은 가능하나 페널티가 부여된다.
탑 등반 초기, 안전지대를 차지하고 있던 대형 길드의 처리관들.
당장 오지혁 또한 6층의 처리관 출신 아니었던가.
그들에게는 페널티가 주어졌으니.
‘살인자 대상으로 PK 페널티 제로. 거기에 잡으면 놈이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빼앗을 수 있지.’
그렇기에 본인의 무력과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살인자가 될 수 없었다.
칭호를 얻는 순간 공동의 적이 되니까.
여기에도 함정이 있었다.
‘놈을 잡을 등반가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 없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
“90층대에 들어온 등반가는 NPC도 얕볼 수 없어.”
“90층까지 오른 NPC도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
등반 초기에는 상관없다.
NPC는 등반가보다 월등한 강자니까.
감히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다툼이 있더라도 같은 등반자 사이에서 벌어졌고.
‘살인도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지금은?
상위 층을 지나 권능과 스킬을 강화하고 업적을 세우며 혼돈을 얻었다.
이미 내놓을 만한 강자가 되었다.
더 이상 NPC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안전지대에서는 NPC가 등반가를 적대할 수도 없다.
그 말은 곧.
“일방적인 권력의 형성.”
적어도 안전지대에서만큼은 등반가는 NPC들 위에서 군림할 수 있다.
시스템에 의해.
“놈도 어느 정도 선은 지켰어.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잡아 둔 것도 그 때문이지.”
아무리 유리한 상황이더라도 사람 일은 모르는 법.
시스템 제약이고 나발이고 일단 쑤셔 버리면 놈 입장에서도 곤란하다.
그렇기에 몇 가지 장치를 마련해 놨다.
그동안 NPC의 구심점이었던 인물을 잡아 둔 거다.
반발심을 억누르기 위해.
겉으로는 대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볼모.
그 상황이 오기 직전, 테이준은 밖으로 빠져나왔다.
자신까지 잡히면 피스 랜드의 정신적 지주인 아버지가 휘둘릴 게 뻔했다.
‘안전지대.’
그건 NPC에게는 또 다른 제약과 마찬가지였다.
-드르르륵.
테이준이 레버를 돌린다.
길게 이어진 통로.
그 끝을 차지한 벽이 옆으로 밀려난다.
“…누구냐!”
“파비오의 끄나풀인가!”
시퍼런 안광을 내뿜으며 무기를 겨누고 있는 이들.
그들이 우리를 바라봤고.
“도련님?”
“도, 도련님이 돌아왔다!”
이내 테이준을 확인하고는 표정을 밝혔다.
나는 반대였지만.
눈썹을 모으며 목을 기울였다.
“너 왜 여기 있냐?”
“하이.”
방 한구석.
핥짝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