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8화 96층
파히루와 일전을 벌이고 도시로 돌아왔다.
지배권을 획득한 만큼 내게 많은 권한이 들어온 게 사실이었고.
-우우우우웅.
“그동안 고생 많았어!”
“다음에 또 만나요.”
피의 제단에 대한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기 때문인지 포탈이 열렸다.
초코쪼코와 찌리리 요정은 바로 위로 올라갔다.
95층에 몇 년이나 있었으니 더 머물고 싶지 않았겠지.
마찬가지로 냥펀도 포탈이 열렸으나.
“왜 안 가냐?”
“에? 좀 더 뒹굴거리려구. 너도 누웡. 여기 편해!”
냥펀은 올라가지 않았다.
소파에 늘어져서는 쿠션을 팡팡 친다.
어차피 96층은 안전지대와 비슷한 구조.
올라가서 쉬어도 되겠지만 이왕 만난 거 같이 올라가자는 거였다.
빼꼼.
고개를 든 녀석이 말을 잇는다.
“너 할 거 끝나면 가면 됑. 흑흑. 나 없으면 애가 밥도 못 먹고 외로워하구 사고 치고 다닐 게 뻔하자낭.”
“아니. 내가 애도 아니고.”
그동안 밥 잘 먹고 잘살았구먼.
뭐, 나야 옆에 있어 준다니 고맙다만.
시스템 퀘스트가 끝날 때까지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 같이 봐 주겠다는 거니까.
“마무리는 거의 다 됐으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이미 현자, 존 트레일러와 헤이다, 오델토, 제네타는 95층에 들어왔다.
피의 제단을 기반으로 부활 사업을 이어 나갈 생각.
현재는 작업실을 꾸미고 있었다.
도시의 노동자들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고.
나 역시 틈날 때마다 가서 도와주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작업이 끝났으니 문제없을 터.
가장 중요한 숭배자의 영혼석은.
[마지막잎새]: 영혼석 하나 추가요~
[해파리컷]: 겅듀님! 적장의 목을 따왔습니다!
[헬창12]: 공듀님께 제물을 받쳐라!
└받X 바쳐라O
└빧춰랏!
[해소리]: 오오오오! 공듀님이시여 공양을 받아 주소서!
[라임라이]: 큭… 크크큭. 그 정도로 되겠나? 난 공듀님을 위해 영혼 3개를 모아 왔다!
[갈갈믹서]: 히히! 이히히! 공듀님께 영혼을!
[근육팡팡전사]: 공듀님께 영광을!
[바위처럼]: 쁘띠!
[도도]: 사랑!
[이준석]: 평화!
[LoveEvE]: 여기 뭐야… 무서워…….
[TNT]: 악마 숭배라도 하는 건가요? 부활 의식이라든가?
└아뇨. 공듀님을 숭배하는 곳입니다!
└??!
차질 없이 모이고 있었다.
“…그만해, 미친놈들아.”
쉴 새 없이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희가 그러니까 진짜 사이비 교단 샤머니즘 같잖아.
“꺄르르륵! 공듀! 공듀를 위해 영혼을 바쳐랏!”
[냥냥펀치]: 공듀님이 영혼이 부족하다 하신다!
[이준석]: 더 많은 영혼을!
[정수리 핥짝]: 공듀마마의 은총을 받을 자 그 누구인가!
[니머리 탈모]: 오오오오오오! 공듀님의 은혜로다!
저 이씨.
불난 곳에 기름 붓고 있어.
-꾸우우욱!
“느아아아앙! 공블아이 놈앙!”
괘씸한 마음에 냥펀의 머리통을 눌러 줬다.
자지러지며 좋아하는 녀석.
주기적으로 두피 마사지를 해 주든가 해야지.
아무튼.
쁘찡 연합의 전폭적인 지원 덕에 숭배자들의 영혼도 많이 모았다.
사실상 준비는 다 끝났다는 뜻.
이제 호문쿨루스로 만든 숭배자들을 피의 제단에 바치면 끝이다.
늦어도 이틀 안에 끝나겠지.
그때까지는 나도 여유가 좀 생긴다.
마음 같아서는 편히 쉬고 싶기는 한데.
‘이게 걸린단 말이지.’
뭐라 뭐라 욕하는 냥펀을 다시 눕히고 맞은편 소파에 누웠다.
파히루를 잡으며 갱신된 퀘스트.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뭔가 새로운 게 생기면 기쁜 것이 사실이지만.
‘하필 이 타이밍에?’
파히루가 죽기 전 뱉은 말 때문인가 굉장히 찝찝했다.
이미 혼돈의 파편과 다를 바 없는 혼돈을 가지고 있는 상태.
그 와중에 파히루를 잡으며 획득한 혼돈 수치 때문에 변화가 생겼다.
단순히 퀘스트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고.
-꾸르르륵.
내게 깃든 혼돈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혼돈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힘이 없다.
신성력이나 마력같이 자체적인 위력을 발휘하지는 않으니까.
다른 뭔가가 섞여야 한다.
아무것도 없는 혼돈은 없으니까.
서로 뒤엉키고 부딪쳐야 생기는 게 혼돈이니까.
혼돈의 파편이라는 놈들이 저마다의 규칙을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지금은 뭐랄까.
‘나도 뭔가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 감각이 느껴졌다.
어디까지나 그런 느낌이 든다는 거였다.
난 혼돈의 파편이 아니었고 되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냥 놔둬도 부수적인 효과가 있기도 하고.
대미지가 덜 들어온다든가.
규칙을 일부 무너트린다든가.
시스템도 날 완전히 억제하진 못하고.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다 메시지 창을 켰다.
잠시 찝찝해서 놔두기는 했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히든 퀘스트]
-탑을 오르세요.
-(New!)
새로 갱신된 내용을 클릭했다.
혹시 아는가, 좋은 내용일지.
나쁜 내용이어도 상관없다.
정보를 알고 있으면 조심할 수라도 있으니까.
[???-히든 퀘스트]
-탑을 오르세요.
-초월자!
-당신은 한계를 초월한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려놓아야 하는 것도 존재하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요!
-【초월 조건】
-1) 100층 진입 (미완료)
-2) 혼돈 수치 1,000점 이상 (완료)
-3) 격의 상승 (완료)
-4) 두 개 이상의 개념 (1/2)
-5) 탑의 선택 (완료)
-6) 혼돈의 파편의 인정 (완료)
-7) 선택 (미완료)
새롭게 등록된 내용이 주르륵 나열된다.
초월자.
말만 들으면 좋아 보였지만.
“…이거 그거잖아.”
100층 도전?
두 개 이상의 개념?
혼돈 수치?
혼돈의 파편이 되는 데 필요한 요구 사항 아니던가.
조건이라는 게 이렇게 많았나.
끽해야 서너 개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침을 삼키며 다시 내용을 살폈다.
총합 7개의 조건.
그중에서 이미 4개나 완료됐다.
100층 진입이야 아직 못 하는 게 당연하다만.
“내가 인정을 언제 받았는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혼돈 수치가 무려 1,000점을 넘긴 것까진 이해한다.
등반하면서 온갖 일이 다 있었으니.
혼돈의 파편을 잡기도 했고 내가 가지고 있는 혼돈 수치도 제멋대로 커지고 있었으니까.
그게 1,000점을 넘었는지는 몰랐었지만.
의아한 건 두 개.
‘이미 혼돈의 파편의 인정을 받았다?’
도대체 누구한테.
델버튼?
녀석한테 인정받았던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잡은 놈들한테?
‘혹시 그 녀석인가.’
기억을 되짚다 보니 떠오르는 놈이 한 명 있다.
70층 안전지대.
그곳에서 14종의 혼돈의 파편을 상대한 적이 있다.
실제 혼돈의 파편이 아니라 다운그레이드된 더미에 불과했지만.
그중 유독 내게 관심을 보이던 녀석이 있었는데.
‘위선과 부끄러움의 하이덴.’
기억났다.
그 망할 자식이 날 인정했었다.
시스템 메시지로도 떴었다.
-[하이덴에게 승리했습니다!]
-[혼돈의 파편, 하이덴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전 서버 최초! 혼돈의 파편에게 동정, 인정, 응원을 받았습니다!]
-[혼돈 +10점]
-[하이덴이 당신의 등반을 응원합니다!]
메시지 로그까지 뒤져 보니 더 확실하다.
이때 인정받았었구나.
순간 울컥했으나 얼굴을 쓸어내리며 진정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4) 두 개 이상의 개념 (1/2)
이건 진짜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혼돈의 파편은 2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파히루는 하나밖에 없어서 반쪽짜리가 됐고.
그런데 지금 보니.
‘2개가 넘는 개념을 가진 놈도 있을 수 있다는 거네.’
누군지는 알 거 같다.
파히루 그 녀석이 했던 말도 있으니.
숭배자의 왕은 최소 3개 이상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지.
그거야 별 상관이 없다.
2개든 3개든 뭐든.
언제 내게 개념이 생겼냐가 문제지.
나를 이루는 키워드.
그게 생겨났다는 거다.
‘콘셉트의 이블아이, 수치스러운 이블아이. 이런 건 아니겠지? 설마 쁘띠공듀 이블아…….’
오소소.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얼른 메시지 창을 지웠다.
당장 뭘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넘어가자.
설명에도 쓰여 있지 않은가.
결국에는 내가 선택하는 거라고.
미쳤다고 이런 걸 선택할까.
“야야. 왜 몸을 떨고 그르냥?”
“으읏차. 날이 춥네. 감기인가.”
“너 감기 안 걸리잖앙. 질병 내성 맥스치로 찍었을 거면성.”
맥스치는 아니다.
SSS급으로 올라가 버려서 Lv.2거든.
크흠.
적당히 헛기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뮤니티에 영혼석을 보냈다는 글이 이어지고 있다.
이 정도면 준비는 다 끝났다고 봐야지.
“피의 제단으로 가자.”
우리도 슬슬 올라갈 타이밍이다.
* * *
피의 제단.
처음에는 어두컴컴한 석실이었지만 지금은 밝은 조명이 여럿 달렸다.
호문쿨루스로 다시 태어난 숭배자들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만 빼면 훌륭한 시설을 가진 연구소 같다고 해야 하나.
그곳에 있는 건.
“내 친구!”
“오, 왔나?”
“안 그래도 작업 끝났는데, 볼래요?”
“뭘 꼬나봄?”
헤이다와 현자, 오델토, 제네타였다.
제네타 이 녀석.
못 본 사이에 좀 더 싸가지가 없어졌다.
정수리를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주면 착해지려나.
빤히 바라보자 녀석이 머리를 감싸 쥐고 도망친다.
몇 번 두드려 줬더니만 눈치 빨라졌네.
“저 녀석이죠?”
“그렇다네.”
“읍! 읍읍!”
막 만들어져 따끈따끈한 호문쿨루스 하나가 꽁꽁 묶여 있다.
적당히 구색만 갖춘 상태라 마감도 상태도 별로지만 뭐 어떤가.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
[휠 카이션]
-95층 임시 NPC.
-실버 등급 숭배자!
-새 사람, 아니 새 호문쿨루스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오케이. 제대로 만들어졌네.
NPC 취급을 받고 있으니 이걸로 됐다.
“앞으로는 착하게 살고. 사람 괴롭히지 말고.”
“읍읍! 으으읍!”
놈이 뭐라 말했지만 입이 막혀 있어 알아들을 수가 없다.
분명 그동안 자신이 한 짓을 반성하고 후회하는 것이겠지.
참회의 의미로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니 분명하다.
그런 의미로.
-휘익.
녀석을 천칭을 향해 집어 던졌다.
놈을 받아들이자마자 기우는 저울.
그 위로 숫자판이 돌아가며 가격이 측정되었고.
[제물의 가치는 1,234,600리안입니다.]
그대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실버급치고는 나쁘지 않네.
“신기한 구조로군.”
“저도 처음 봤을 때 신기했어요.”
“연구할 가치가 있겠어.”
재밌는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현자가 눈을 빛낸다.
가만 보면 이 양반도 호기심이 많단 말이지.
그러니까 현자라 불리는 거겠지만.
이것으로 제단이 제대로 기능한다는 건 확인했으니.
[증명-시스템 퀘스트 클리어!]
[처벌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시스템 또한 결과를 인정했는지 퀘스트가 클리어 됐다.
이걸로 한시름 놨다.
[95층 클리어!]
[포탈이 생성됩니다!]
-우우우우웅.
포탈까지 생성된 걸 확인했으니 만족.
“오오옹! 드디어 끝이냥!”
“올라가면 되겠다. 바로 올라갈 거지?”
“그래야징. 그럼 이따 보자구!”
냥펀 역시 위로 올라가고 싶었던 모양.
하기야 조금이라도 빨리 올라가면 이득이 많으니까.
똑같은 층에 있더라도 먼저 들어가 선점한 이가 더 유리한 게 사실이니까.
그저 내가 걱정돼서 기다려 줬을 뿐.
녀석이 피의 제단으로 빠져나가고.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들어줘서 고마워요.”
“아닐세.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95층까지 와 보겠나.”
그러고 보니 현자는 92층까지 올랐었었지.
“그보다 자네, 혼돈이 크게 올랐군.”
“예. 뭐. 어쩌다 보니까.”
잠시 나를 바라보던 현자가 입을 연다.
“스스로 어떤 존재로 남고 싶은지 잘 생각해 보게나.”
“네?”
“거추장스러운 대의 말고 본인이 원하는 게 뭔지 생각하란 뜻이네.”
무슨 의민가 싶어 되물었지만 현자는 그저 웃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저 가볍게 내 등을 밀 뿐.
내가 원하는 거라.
“잘 생각해 보죠. 가 보겠습니다!”
한 번은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였다.
그걸 끝으로 포탈에 입장.
-우우우우웅!
[96층에 진입합니다!]
[96층-중립지대]
[체크 포인트가 새롭게 생성됩니다!]
96층에 들어섰다.
서서히 돌아오는 시야.
“오호.”
난 작게 감탄했다.
안전지대와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곳인가 했더니만.
“…안전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내 상상력이 조금 부족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