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6화 내어줄 수 있는 것
내가 설치한 스킬과 냥펀의 아티팩트.
원격에서 천벌을 내리는 찌리리 요정.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쏟아부었다.
누구를 상대하든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공격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다.
달리 말하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최대한의 대미지를 욱여넣어야 한다는 거다.
한번 맞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똑같은 방식에 당하지 않을 테니까.
‘이 녀석이라면 또 당해 줄 것도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무시했다.
파히루라는 녀석이 나사가 몇 개 빠진 건 사실이었지만 엄청난 녀석인 건 분명했으니까.
-콰르르르릉!
-콰과과광!
수없이 내리치는 벼락과 폭발.
냥펀이 특별히 준비한 아티팩트가 가열되어 작동 불능 될 때까지 가동한다.
나라 하더라도 저기서 살아남을 수 있냐고 물어본다면.
“한 번은 죽겠지.”
목숨 하나 정도는 내어줘야 할지도 몰랐다.
확실히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
다른 건 몰라도 몸뚱이 하나는 튼튼해서.
등급을 초월한 패시브 스킬만 몇 개인데.
툭툭.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한테 처음 당했을 때는 패시브가 통하지 않았던 것 같단 말이야.”
“그에엑.”
시스템 퀘스트를 받고 피의 제단으로 왔을 때.
어둠 속에 숨어서 투구 아래로 검을 찔러 넣은 녀석을 기억한다.
그때 다른 패시브 스킬이 하나도 발동하지 않았다.
물론 스킬이라고 만능은 아니다.
발동하더라도 일정치가 넘으면 대미지가 들어오니까.
그만큼 놈이 강한 일격을 날렸다고 봐도 좋았지만.
‘저 녀석, 스킬을 거의 안 써.’
놈과 싸우면서 스킬을 활용하는 모습을 거의 못 봤다.
심지어 나를 죽일 때도 마찬가지.
기껏해야 처음 나를 죽였을 때 사용했던 부정 효과 정도?
95층에 있는 만큼 스킬은 여러 개 가지고 있을 텐데도 사용하질 않는다.
가늘게 눈을 떴다.
예상 가는 게 하나 있긴 하다.
-타박.
나팔을 인벤토리에 넣고 잔해에서 내려갔다.
폭발의 여파로 솟아올랐던 잔해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뿌옇게 날리는 먼지와 연기가 안개처럼 깔린 공간.
“그으으. 으으.”
놈의 실루엣이 보였다.
너덜너덜했던 옷은 남아 있지 않고 머리카락도 다 타 버렸다.
안 그래도 조금씩 벗어지고 있던 거 같았는데.
이참에 시원하게 밀어 버렸다 치면 놈도 만족하지 않을까.
“역시 안 죽었군.”
상당한 타격을 받은 건 분명하다.
애초에 저건 제대로 맞는다면 반드시 죽을 만한 공격이었으니까.
다만.
-치지짓. 치짓.
놈의 주변으로 튀어 오르는 검은 기운.
익숙한 것이다.
‘혼돈.’
반쯤 녹아내린 몸으로 놈이 나를 바라본다.
시스템이 말할 때부터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 녀석.
‘혼돈의 파편과 비슷하다.’
반쪽짜리라고는 해도 그에 준하는 괴물인 건 분명했다.
혼돈의 파편이 되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100층에 오르는 거니까.
이놈은 최소한 100층까지 올랐던 괴물이라는 거다.
놈이 스킬을 애용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
혼돈의 파편은 자기만의 규칙을 사용하니까.
그런 종류의 힘은 애초에 등급이랄 것도 없다.
마치 이계의 스킬처럼.
[검강]
-우우우우웅.
마력이 검에 깃든다.
뭐든 좋다.
놈을 상대하는 건 어차피 내가 할 일이었으니.
-파앙.
바닥을 박찼다.
앞으로 쏘아지며 회전.
그대로 크게 검을 휘둘렀으니.
-카아아앙!
놈 또한 검을 내지르며 일격을 막아 낸다.
온몸이 불타올랐음에도 놀랍도록 빠르게 대응한다.
놀라운 건 놀라운 거고.
“이제 끝을 봐야지.”
“흐흐. 그래. 한 명은 죽어야겠어. 더 이상 내 것을 앗아 갈 수는 없다!”
괴성과 함께 검을 내리친다.
저걸 검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무튀튀하게 변색한 쇳덩이 비슷한 건데.
그 안에 깃든 힘은 결코 얕볼 수 없었다.
-크드드득.
악을 쓰며 내지른 일격을 흘렸음에도 뒤로 미끄러졌다.
몸은 말랐으면서 힘 한번 좋네.
놈과 검을 섞으면서도 상황을 살폈다.
혼돈의 파편이 왜 상대하기 까다로운가.
혼돈 수치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대미지가 박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렇다.
난 혼돈 수치가 높기에 스킬 대미지가 거의 다 들어간다.
냥펀 또한 혼돈 수치가 100점은 넘은 것 같지만.
‘아티팩트는 그렇지 못해.’
유일한 단점이라고 해야 할까.
혼돈이 깃든 아티팩트는 많지 않다.
아이템에 혼돈을 넣는 특수한 능력이나 기술이 없다면 말이지.
방법이야 이렇겠지만 단순히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덕분에 놈이 아직까지 버티는 걸 테고.
[천벌(SSS) Lv.8]
-콰르르르릉!
그나마 찌리리 요정이 원격으로 쏴 주는 벼락은 좀 통하는 느낌이다.
놈에게 적중될 때마다 잠깐이지만 움찔거리니.
그놈의 혼돈 때문에 충격량 일부를 흘리는 것 같다만.
[절삭(SSS) Lv.5]
[영혼 찢기(SSS) Lv.3]
나머지는 내가 채우면 되니까.
놈에게서 나온 검은 기운이 검을 붙잡으려 달라붙는다.
물 깊은 곳으로 들어간 듯한 묵직한 압박감.
철근이 온몸에 달라붙는 기분이었으나.
[혼돈이 저항합니다.]
“나도 혼돈 수치로는 안 꿀리거든.”
-콰아아아악!
동등한 수준의 혼돈을 품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놈이 강제하는 힘을 부정하고 나아가는 검.
파히루가 다급하게 검을 비틀었지만 가슴을 베고 지나간다.
피를 뿌리며 뒤로 빠르게 빠져나가던 녀석이 품에서 뭔가를 작동시킨다.
-스아아아아.
[파르곤의 눈꺼풀(SSS)을 발동합니다.]
그동안 끈질기게 나를 괴롭혀 왔던 아티팩트가 어둠을 부른다.
마치 눈을 감듯이 위아래로 감겨 오는 어둠.
전이라면 당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
[지하세계의 등불(SSS)이 불을 밝힙니다.]
[꺼지지 않는 촛불(SS)이 빛을 더합니다.]
[심해의 아귀등(SSS)이 어둠을 물리칩니다.]
-파아아아앗!
냥펀이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티팩트를 준비해 놨으니까.
강력한 어둠을 밀어내는 빛.
냥펀만이 아니다.
내가 화조국과 다른 루트를 통해 구한 물건이 있다.
[신성의 태양(SSS)]
-베리아 교단의 성물!
-교황, 성자, 성녀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신성은 타오를 것입니다!
-고통받는 이의 괴로움과 눈이 멀 때까지!
다름 아닌 성물.
비록 교단은 다르지만 나 또한 조건은 어느 정도 만족한다.
[칭호, 부활한 교단의 성자가 빛납니다.]
나름 성자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남의 교단의 성물도.
“내 손에 들어오면 내 거거든.”
[칭호, 성물 약탈자가 번뜩입니다!]
-사아아아악!
강력한 신성의 태양이 떠오른다.
단순히 조명 기능만 가지고 있지 않다.
새하얀 빛에 노출된 모든 것들에 대미지를 입히는 장판 공격이다.
망설임 없이 대싱 마스터의 왕관을 빼고 마그나로크의 왕관을 착용했다.
거기에 날개 없는 천사의 오른쪽 날개를 착용.
-우우우우웅!
폭등한 신성력이 내 몸을 감싸 보호했다.
파괴적인 성물이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성물.
같은 신성력을 가진 대상에게는 관대한 편이다.
도트 대미지가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 정도면 버틸 만한 수준이었고.
“크으으읍!”
그런 게 없는 놈은 얼굴을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혼돈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시야를 확보한 것만으로 만족한다.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놈에게 꾸준하게 피해를 입히고 있기도 하고.
한 가지 걸리는 건.
‘놈의 규칙은 뭐지?’
이 부분.
놈이 스킬을 적게 사용하는 이유는 대충 눈치챘다.
혼돈의 파편은 고유의 규칙을 사용하지, 스킬을 사용하지 않는다.
저 녀석은 반쪽짜리라 스킬을 쓸 수 있는 거고.
반쯤은 NPC라는 거지.
혼돈의 파편은 시스템도 NPC가 아닌 다른 존재로 인식하니까.
나야 애초에 혼돈의 파편이 아니라서 나만의 규칙은 사용할 수 없다.
스킬과 칭호, 기타 등등을 사용해서 싸우지.
여기서 문제.
‘놈은 혼돈의 경계선에 걸쳐 있다.’
좋게 말하면 하이브리드.
나쁘게 말하면 반푼이.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스킬도 사용한다.
그렇다면 놈은 혼돈의 파편처럼 규칙을 쓸 수 있을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쓸 수 있어.’
가능하다고 봤다.
스킬도 사용했는데 규칙이라고 못 쓸까.
다만 스킬과 마찬가지로 제약이 있겠지.
-카아아아앙!
-푸화아아악!
검격과 폭발을 반복하며 놈을 압박했다.
비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벼락에 냥펀이 곳곳에 숨겨 둔 아티팩트의 발동.
끊임없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발악하는 녀석을 보며 계속 움직였다.
파이어 밤으로 놈을 강타하자 밀려나는 녀석.
자세가 흐트러져 검을 휘두를 수조차 없을 테지만.
“크하압!”
놈은 달랐다.
너덜거리는 팔을 뒤로 뺀 채 입을 벌렸다.
그대로 내 목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내가 한 박자 빨랐다.
허리를 비틀며 팔꿈치로 놈의 머리를 후려쳤다.
놈의 몸이 기우뚱했지만 추가타는 날릴 수 없었다.
“하나씩 주고받자 이거지?”
어느새 녀석의 검이 내 허벅지에 쑤셔 박혔으니까.
다행히 뼈는 끊지 못한 것 같다만 통증에 절로 욕이 나왔다.
혀라도 빼물었는지 피로 흥건한 입으로 웃는 녀석.
“나만, 뺏길 수는 없잖아?”
찢어져라 올라가는 입꼬리에 섬뜩함을 느끼며 주먹을 날렸다.
그대로 안면을 맞고 뒤로 굴러가는 놈을 향해 파이어 밤.
-콰가가가강!
폭발을 일으키며 놈을 압박했다.
그에 호응하듯 떨어지는 벼락.
녀석이 굴러간 곳에는 냥펀이 숨겨 둔 아티팩트가 발동.
그 모든 것을 막고 피할 여력은 녀석에게는 없었다.
몸을 맞으며 정직하게, 때로는 예상하기 힘든 몸짓으로 부딪쳐 온다.
필요하다면 물어뜯고 뭐든 잡으며 흙을 뿌리고 침을 뱉고.
“그아아아악!”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지르며 덤빈다.
끊임없이 두들겨 맞으면서도 발악하는 녀석을 보며 계속 움직였다.
콰앙!
정면으로 파이어 밤을 맞은 녀석이 크게 휘청인다.
-뿌드드득.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찔러 넣었다.
뼈가 갈라지는 느낌을 받는 것과 동시에 크게 휘둘렀으니.
-촤아아악!
놈의 오른팔이 잘려 날아간다.
신체가 절단되는 고통일 텐데도 놈은 멈추지 않았다.
짐승 같은 몸놀림으로 왼팔을 뻗는다.
허공에 떠오른 오른손에 쥐인 검을 잡고 내게로 돌진.
-콰가가가각!
옆구리가 뜨끈해진다.
미친놈.
나 역시 개싸움은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은 도대체.
놈의 후속타를 막기 위해 강철의 의지를 사용했다.
정확히는 사용하려 했다.
[일시적으로 강철의 의지(SS)를 상실합니다.]
[해당 스킬을 활성화할 수 없습니다.]
“이게 뭔!”
뻐억!
급한 대로 놈을 걷어차며 뒤로 빠졌다.
검이 거칠게 뽑히며 옆구리에서 출혈이 이어진다.
순간적으로 찾아온 빈혈.
머리가 어지러워 바닥을 살피니 피가 흥건하다.
놈의 것도 있었고 내 것도 있었다.
‘어째서?’
지금도 덕춘이가 상처를 핥는 느낌이 났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언제부터지?
아니, 그보다.
‘스킬 일부가 잠겼다?’
주력으로 사용하는 파이어 밤과 절삭이 막히지 않아서 체감하지 못했다.
침을 삼키며 다른 스킬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저주 내성(SSS)을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냉기 내성(SSS)을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수면 전투 복기(S)를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도축(S)을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사진 등록(S)을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요리(S)를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샤워(S)를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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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 뒤로 소름이 돋는다.
언제 이렇게 많은 스킬이 사라진 걸까.
[특성, 회복(SSS)을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특성, 외갑(SSS)을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고유 능력, 폭식(SSS)을 일시적으로 상실했습니다.]
덕춘이 또한 마찬가지.
너무 많은 스킬을 가지고 있었기에 놓치고 있던 것.
운이 좋았다.
그저 운이 좋아서 공격 스킬이 봉인되지 않았던 거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을 상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눈을 부릅뜹니다!]
[혼돈이 상대방의 혼돈에 저항합니다!]
[권능 일부를 상실합니다.]
권능 또한 그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눈이 따갑다.
억지로 정보를 읽어 내기 위함인가.
권능이 발휘되며 눈이 불타는 듯한 격통이 찾아왔고.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놈만의 고유 규칙.
[상실의 시대]
-외로워진다는 건 내가 가진 무언가를 상실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나요?
놈이 절뚝이며 내게 다가온다.
하나 남은 팔로 검을 질질 끌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흘러내린 피가 웅덩이를 만든다.
처음에는 통증을 참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통각을 잃었군.”
놈에게 더 이상 통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꺾인 발목으로 땅을 밟는데 약간의 망설임도 없는 자는 없을 테니.
-파스스.
놈의 왼쪽 눈이 회색빛으로 물든다.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
하나 남은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모든 것이 무너진 피의 제단.
그 잔해를 건너온 녀석이 검으로 나를 겨눈다.
검을 쥔 손끝이 회색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너는 어디까지 내어줄 수 있지?”
무엇도 가질 수 없고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는 자.
잠깐의 소유마저도 빼앗기기 위한 과정일 뿐인 자.
외로움의 파히루.
그가 내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