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5화 번쩍
전쟁에 있어 탐색이 왜 중요한가.
상대방의 위치와 움직임을 알고 있다면 훨씬 유리한 전장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공격을 원한다면 선제 타격.
방어를 위한다면 엄폐 및 부비트랩 설치.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그런 의미에서 파히루의 움직임을 완전히 파악한 나는.
“다들 먼 곳까지 일하러 와 줘서 고맙다!”
“이것도 수당 쳐주지요?”
“물론이지. 여기, 냥펀이 시급의 2배를 쳐주겠다고 했다!”
“와아아아아아!”
“내, 내가 언젱?!”
놈이 일하러 간 사이를 틈타 피의 제단에 입성했다.
전장을 내 입맛대로 바꾸기 위해.
그동안 일방적으로 놈이 유리한 곳에서 싸우는 게 억울하더라고.
‘본인도 당해 봐야지.’
자고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니겠는가.
“게헤헤.”
고생한 건 덕춘이도 마찬가지.
되갚아 줄 생각을 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행히 일하는데 위험한 것도 없고.’
몇 번 혼자 안으로 들어와 살펴봤지만 위험한 건 없었다.
내가 갈 때마다 깔려 있던 어둠은 사라졌고.
뭐든 귀중품은 품에 가지고 다녀야 하는 법 아니겠는가.
어둠을 만드는 아티팩트를 챙겨간 모양이었다.
혹시나 있으면 찾아서 부수려고 했는데.
살짝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건 그거고.
“그새 더 지었네. 부지런하기도 하지.”
이 녀석, 잠깐 안 본 사이에 투기장이 좀 더 커졌다.
새삼 감탄했다.
거지 주제에 왜 이렇게 근면성실한 거야.
“평소에 이렇게 살았으면 거지가 아니라 부자로 살았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털어 냈다.
본인이 거지로 살고 싶다는데 내가 뭐라고 해.
어깨를 으쓱이며 피의 제단을 살폈다.
이 정도 속도면 한 달 안에 조악하게나마 투기장이 완성될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짝짝!
손뼉을 쳐서 이목을 끌었다.
“자자! 빨리 움직인다, 실시!”
이제 일할 시간이다.
내 지시에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건축가들.
“내구도는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펑펑 터져 나갈 거니까. 겉모습만 똑같이 해 놔!”
“알겠습니다!”
“얼른 철거 먼저 해!”
“공식적으로 부실 공사 허용됐다! 벽돌 그냥 하나만 써! 두꺼워서 뭐 할 거야!”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재밌네!”
“내가 살 집도 아닌데 무너지라지. 깔깔깔!”
“철근도 하나 빼 보자!”
그동안 쌓인 게 많은 건가.
살짝 맛탱이 간 녀석들도 좀 보이는데.
유독 날뛰는 놈들은 얼굴을 기억해 뒀다.
나중에라도 사고 칠 놈들이라.
아무튼.
하는 짓이 괴상하기는 하지만 그걸 시킨 게 나다.
어차피 오래 쓰려고 만드는 것도 아니니 괜찮겠지.
“저거 괜찮냥?”
“아마도?”
냥펀은 아닌 것 같았지만.
살짝 과한 감이 있기는 한데 별수 없다.
‘대부분은 함정이랑 폭탄으로 채울 거라.’
무너지는 건 기정사실.
오히려 더 과감할 필요가 있다.
“거기! 벽돌 빼는 애!”
“히이익! 이, 이건 다시 넣으려 했습니다요.”
“아니. 그거 빼고 안에다 칼날 좀 넣어 봐.”
-빠가각.
망가진 검을 밟아 조각내 건넸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대장간에서 보수도 못 할 무기들을 잔뜩 가져왔다.
녹슬고 깨져서 녹여 쓰지 않는 이상 쓸모없는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이왕 터지는 거 칼날 같은 게 날아가면 더 좋지 않나?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좀. 아니, 뭐 시키니 하긴 합니다만.”
“저 양반도 제정신은 아니야.”
“쉿. 들리겠소, 형님.”
너희가 그러면 안 되지, 이 자식들아.
어째 놈들이 수군덕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뭐가 됐든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 아닌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간단히 말하면 그거다.
“바꿔치기.”
외형은 기존과 동일하게 가되 내부는 비우거나 함정을 설치했다.
놈의 스윗홈을 스웩 있게 만들어 주는 과정.
잠시 작업 현장을 보며 흡족해하는 타이밍.
쿡.
냥펀이 등을 손가락을 찔렀다.
“공블공블. 너 여기서 끝까지 싸우려고 하는 거징?”
“그렇지?”
“나도 할랭.”
이건 생각 못 한 말인데.
일단 냥펀은 우리 멤버 중에서도 가장 안정성을 따진다.
애초에 권능이 안전 제일이니 말 다 했지.
“공적치 때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거.
혹여나 공적치가 부족해 포탈이 열리지 않으면 억울하니까.
충분히 걱정할 만하긴 한데.
“내가 그 녀석만 잡으면 클리어될걸?”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해 온 것만 해도 충분히 클리어 조건을 채웠다고 본다.
그저 나와 파히루의 시스템 퀘스트 때문에 잠시 미뤄졌을 뿐.
찌리리 요정이나 초코쪼코가 별말 없는 것도 이 때문이고.
진짜, 만에 하나 냥펀의 포탈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땐 다시 죽어서 도와주면 되지.’
그냥 두고 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흠흠! 뭐 하러 혼자 고생하냥! 도와줄 사람이 있는뎅.”
다만 답은 좀 다른 종류였다.
“우리가, 어! 남도 아니구. 초코쪼코나 찌리리 요정이야 다른 무리지만 우린 아니잖앙.”
허리에 손을 얹고 콧대를 세운 녀석이 우쭐거린다.
“나 아님 여기서 공공이블 봐줄 사람도 없궁. 어떠냥! 감동이지?”
“냐, 냥펀!”
“그래! 날 찬양해랏!”
“아니, 공블아이든, 공블공블이든 하나만. 공공이블은 또 뭔. 공공재 이불도 아니고.”
“공공재 아니었냥? 돌려 쓰는 건 줄 알았는뎅. 싫으면 그냥 쁘띱-읍읍-!”
“악! 악악! 좋아! 공공이블 최고다!”
냉큼 녀석의 입을 막았다.
이 자식, 누굴 암살하려고.
아무튼 마음은 알겠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냥펀 혼자 무리한다면 옆에서 도왔을 거다.
냥펀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거지.
쁘찡연합의 모토가 무엇인가.
사랑 평화 쁘, 아니 이건 됐고.
서로 으쌰으쌰 파이팅 아닌가.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고맙다.”
“고맙긴. 사실 이쪽이 좀 더 안전한 거 같기도 해성.”
“음?”
“여긴 이곳만 잘 지키면 되잖앙? 그럼 여기에 방어 몰빵하면 밖에보다 안전한 거 아냥?”
“아하!”
전투 현장이 바뀌었다.
이제는 우리가 피의 제단을 차지했으니까.
반대로 말하면 지금부터는 놈이 밖에 돌아다닌다는 거다.
언제 기습당할지 모르는 것보다는 확실히 대비해서 이곳에 있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
냥펀이 옷깃을 잡아당기며 윙크한다.
엄지를 세우는 건 덤.
“그러니 열심히 싸우라구. 난 안전한 곳에서 보조해 줄겡!”
묘하게 얄미웠지만 객관적으로 상황은 좋았다.
찌리리 요정의 벼락.
냥펀의 서포트가 있다면.
“좋지. 제대로 해보자고.”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다.
* * *
“으흐흐음~으으음. 아늑한 내 투기장!”
콧노래 섞인 음색.
자그마치 48시간을 내리 일하고 온 녀석이라기엔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였지만 그러려니 했다.
평생 거지로 살다 일하면 신날 수도 있지.
“와, 왔당.”
“쉿.”
나와 냥펀은 둔덕에 만든 벙커에 숨은 채 녀석을 지켜봤다.
녀석이 올 시간대는 알고 있었다.
파히루, 놈에게 일을 준 게 우리니까.
예상보다 살짝 늦게 오기는 했는데 그거야 뭐, 오차 범위 내니까.
보아하니 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사 오느라 늦은 모양이다.
녀석의 양어깨에는 깔끔하게 가공된 석자재가 들려 있다.
-쿠웅.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은 녀석이 눈을 빛내며 손을 비빈다.
뭐랄까.
재밌는 장난감을 얻은 아이의 눈빛이라고 해야 하나.
일하면서 쌓인 피로감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흐흐. 으흐흐흐! 오늘은 저쪽을 좀 더 키워 볼까! 귀빈석으로 쓰는 거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거리던 녀석이 몸을 풀더니 품에서 망치를 꺼낸다.
그동안 투기장을 만들면서 건축에 취미라도 들린 걸까.
“히히히! 언제 봐도 멋져!”
흥겹게 움직이던 녀석이 히죽거리며 한쪽을 바라본다.
유독 크게 지어진 공간.
그 위에는 엄청난 사이즈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다랗지만 쓸데없는 장식이 많아 웅장하기보다는 괴상한 모양새.
뭐, 본인은 만족하는 거 같다만.
“웅장하고 품격 있는 나만의 왕좌! 귀빈석에 앉은 이들도 나를 우러러보겠지!”
말 상대가 없어 혼잣말이 자연스러운 녀석이 엉덩이를 씰룩이며 자재를 옮긴다.
초인 정도 되면 작업하는 속도도 차원이 다른 법.
철근과 돌덩이를 휙휙 집어 던지더니 스킬로 땅을 파서 기초를 다진다.
자고로 바닥이 단단해야 위에 올리는 건물이 바로 서는 법.
“얼마나 좋은가. 내가 노력한 만큼 만들어지는 것이 있다니. 소중한 내 투기장! 이것이야 말로 보람찬 하루의 나날……!”
-폭삭.
“음?”
불행하게도 여기서는 기초공사가 불가능했다.
왜냐.
-쿠르르르르릉!
이미 내 손에 의해 속이 텅텅 빈 모델하우스가 돼 버렸거든.
녀석이 조심스러운 손짓에 우르르 주저앉은 벽과 계단.
다지고 있던 땅이 뭉개지며 토사가 쏟아진다.
“아, 안 돼!”
녀석이 기겁하며 그곳으로 달려간다.
몸으로라도 막겠다는 의지.
그 굳건한 마음에 속으로 박수를 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시한폭탄(SSS) Lv.4]
-콰아아아아앙!
그동안 하도 써서 레벨이 4까지 올랐다.
“그 망할 놈이 또!”
달리 말하면 녀석이 그만큼 많이 당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놈은 내가 원격으로 시한폭탄을 터트릴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런 식으로 괴롭힌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 때문일까.
내가 이곳에 숨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어딘가 있을 나를 욕하며 분노할 뿐.
‘나야 좋지.’
슥슥.
냥펀에게 수신호를 하자 내게 나팔을 건넨다.
멜빵으로 양어깨에 고정한 채 벙커 밖으로 나갔다.
이미 길은 땅굴 이동으로 만들어 둔 상태.
냥펀은 이곳에 남아 서포트해 줄 거다.
포인트 지점까지 이동 후 통신 아티팩트로 무전했다.
“작전 시작.”
-라져!
냥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계음이 들린다.
-지이이이잉!
-콰가가가가각!
냥펀이 준비한 토템.
360도로 머리를 돌리며 광선을 쏘는 물건이다.
광범위한 공격 사거리만큼 멀리서도 잘 보이는 것이 특징.
놈을 유인하기 위한 물건이었고.
-타깃, 목적지에 도착!
예상대로 놈은 우리가 원하는 위치로 움직였다.
이걸로 준비는 끝.
내가 등장할 차례다.
심호흡 한번 해 주고.
[어스 월(S) Lv.MAX]
-쿠구구구구궁!
내 발밑에 흙벽을 일으켜 세웠다.
가공할 만한 기세로 솟구치는 몸.
“읍!”
천장과 부딪히며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으나 악으로 버텼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왜냐. 내 위에는.
-쿠구구구궁!
-콰르르릉!
놈이 애정하는 투기장의 왕좌가 있었으니까!
[파이어 밤(SSS) Lv.9]
[프로즌 브레이크(SS) Lv.4]
-콰아아아앙!
대포처럼 솟아오른 흙벽과 내가 터트린 폭발.
온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해방되며 빛이 보였다.
파편이 되어 비처럼 쏟아지는 거대한 왕좌.
붉게 달아오른 불길과 빛을 받아 번쩍이는 얼음 알갱이.
볼품없이 땅에 처박히는 돌덩이가 대지를 북처럼 두들겼고.
난 하늘을 향해 오로라 빔을 쏘아 이 몸의 등장을 알렸다.
-삐유우우우웅!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는 십여 줄기의 빛기둥.
화려한 조명 아래 양팔을 펼쳤다.
[치명적인 포즈(C) Lv.6]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몸짓.
머리 위로 댄싱 마스터의 왕관이 빛난다.
-빰!
-빠밤!
냥펀에게 빌린 나팔이 저절로 소리를 낸다.
힘차고 경쾌한 울림!
단순하지만 중독성 있는 박자!
-빰빰 빠라라 빰빰빰!
-빰빰빰빠밤!
무너진 왕좌의 잔해 위.
나팔 소리에 맞춰 관절을 튕겼다.
뜨거운 열정에 이마에 맺힌 땀 한 방울.
그것을 바라본 파히루는.
“끄, 끄그그극! 끄아아악!”
게거품을 물며 눈을 뒤집었다.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쇼크.
하얗게 바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억장이 무너진 녀석에게 화답하는 걸까.
-솨아아아아.
천장으로 막힌 석실에 비가 내렸다.
기적이 벌어진 건 아니다.
미리 천장에다 워터 스킬을 인챈트로 걸어 뒀을 뿐.
빗소리와 나팔 소리.
리듬에 맞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시한폭탄(SSS) Lv.4]
[시한폭탄(SSS) Lv.4]
[시한폭탄(SSS) L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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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볼케이노 트랩(SS)]
[중력장석(S)]
[무한궤도 분쇄장치(SSS)]
왼손을 튕길 땐 스킬과 함정이.
-따악.
오른손을 튕겼을 때는.
[SSS급 권능, 징벌자의 눈이 대상을 바라봅니다!]
[천벌(SSS) Lv.8]
번쩍.
한 줄기 벼락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