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3화 더럽게 싸우다
전송 마법진을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런데 이건 봉인한다지 않았나?”
“쓸데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복구가 제법 되어 있던데?”
“크흠! 큼!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손을 썼던 거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대두상 이 녀석이 마법진을 어느 정도 손질해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흐름이 바뀌며 더 이상 상품을 보내지 않는다.
보내려고 하는 이들은 확실한 처벌을 가한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놈을 살폈으나 거짓은 아닌지 눈길만 돌릴 뿐 별말은 없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피의 제단을 사용할 방법이 바뀌면 상품을 보낼 일도 없으니까.’
그때는 95층의 NPC가 아니라 탑 곳곳에 숨겨져 있는 숭배자들이 재료가 될 거다.
NPC를 재료로 굴러가는 공장.
그게 피의 제단이니까.
“잠시 갔다 오지.”
그리고 난 그곳에서 놈과 결전을 벌여야 한다.
쉽지 않을 거다.
나와 달리 녀석은 자체적으로 피의 제단으로 갈 방법이 있을 테니까.
달리 말하면.
‘녀석이 먼저 선점했다는 거야.’
나는 후발로 들어가는 거고.
놈 또한 내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으니 대비를 해 놨을 거다.
그렇기에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플래티넘 등급의 숭배자인 것도 있지만.
“반쪽짜리 혼돈의 파편이라. 재미있네.”
혼돈의 파편과 가까운 존재라는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놈들이 강한 건 나도 알고 있으니까.
객체마다 전투력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강력하다는 건 변함없었다.
-우우우우웅.
[피의 제단으로 전송됩니다.]
빛을 내뿜는 전송 마법진.
그와 함께 느껴지는 부유감.
바깥과는 다른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빠각!
시야가 바뀌는 것과 동시에 뭔가가 내 어깨를 강타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자마자 머리를 틀지 않았다면 미간으로 들어왔을 공격.
검을 앞으로 내민 채 자세를 낮췄다.
빠르게 주변을 살폈으나 보이는 건 어둠뿐.
[야간 시야(S) Lv.MAX]
[어둠이 너무 짙습니다.]
“허. 준비 많이 했네?”
심지어 스킬도 통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녀석이 가지고 있는 권능의 힘이든가.
‘내 스킬보다 높은 등급의 스킬이나 아티팩트.’
야간 시야나 수중 호흡과 같은 스킬들은 S급에서 멈춰 놨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S급 MAX 레벨이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으니까.
차라리 이것들을 올릴 재원으로 다른 공격 스킬을 올리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말.
‘스킬 등급이 차이 나더라도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고.’
효율이 떨어질 뿐 효과가 아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정도 어둠은.
“최소 SS급 이상의 스킬이나 아티팩트.”
권능을 써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근처까지 가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권능이라 한들 만능은 아니다.
등급이 오르며 능력이 강화되기는 했다만 이 정도로 시야가 제한되면 또 다르다.
내가 가진 건 정보를 읽는 능력이지 투시력이 아니니까.
천천히 시간을 거쳐 어둠에 적응한다면 조금은 보이겠다만.
-쐐애애애액!
-카아아앙!
“그래.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처음 날아왔던 곳과 다른 방향에서 들어온 일격.
한 박자 늦게 검을 휘둘렀지만 걸리는 건 없었다.
뭐로 쏜 거지?
활?
아니면 단검류?
묵직하지는 않았으니 손도끼 같은 건 아닐 것이다.
묘하게 찌르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송곳 같은 걸 던진 걸 수도 있고.
-파앗!
우선 발을 박찼다.
내게 공격이 들어왔다는 건 놈에게는 날 볼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뜻.
가만히 앉아서 공격을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피잉!
-싸아아악!
오감에 집중했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어림잡아 검을 휘둘렀고 애매한 건 그냥 몸으로 때웠다.
다른 건 몰라도 몸을 보호하는 스킬은 어지간한 NPC랑 비교해도 내가 높다.
공격이 거슬리기는 해도 치명상을 가할 정도는 아니고.
-촤아악.
“흠!”
갑작스럽게 미끄러진 발.
바로 달라붙기를 사용하며 옆으로 굴렀다.
-파바바밧!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있는 곳으로 무언가가 연달아 박히는 소리가 들린다.
묵직한 소리에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을 보니 투창을 던진 모양인데.
‘시야 제한은 물론이고 공간 전체에 장난질을 쳐 놨어.’
자갈이나 기름, 구덩이는 물론이고 흙을 퍼 왔는지 크고 작은 둔덕이 이어진다.
방향감각은 물론이고 중간에 발이 꼬이기까지.
한마디로 지랄맞은 상황의 연속이다.
그 와중에도 원거리 공격과 함정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
-쐐애애액!
-피유우우웅!
감각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감각이 더 예민해진다고 했던가.
시야를 거의 잃은 대신 청력과 촉각이 살아난다.
처음에 날아온 공격 몇 개는 몸으로 받아야 했다.
지금은 좀 달랐지만.
-채캉!
소리와 공기가 찢어지는 파동을 느끼며 검을 휘둘러 쳐 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카드드드득!
“크음!”
발리스타라도 쏜 건가.
예상치 못하게 육중한 투사체가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손목이 비틀리며 통증이 찾아왔지만 버틸 만했다.
이런 식으로는 내가 불리하다.
놈은 어둠 속에 있고 난 일방적으로 공격받고 있으니까.
심지어 언제 어디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경계하는 건 상당한 체력과 집중력을 요구했다.
초인이라 한들 한계는 존재하는 법.
놈이 노리는 것 또한 그것이겠지.
-쿠구구구궁.
어스월을 사용해 주변을 감쌌다.
이것으로 놈의 시야를 가리고 투사체에 대비한다.
이어 마력을 모으며 하늘로 손을 뻗었다.
-쿠르르릉.
흙벽을 무너트리는 동시에 불길을 내뿜었다.
[파이어 밤(SSS) Lv.8]
-콰아아아아앙!
전방을 향해 파이어 밤을 쏘았다.
천장을 향해 퍼져 나가는 시뻘건 불길.
특별히 마력을 쏟아부었음에도 가시거리는 고작해야 5m.
예상보다도 훨씬 짙은 어둠보다 놀라운 건.
-스으으.
불길 아래, 그늘진 공간에서 눈빛을 빛내고 있는 파히루였다.
코앞에 쪼그려 앉아 주름진 얼굴로 날 올려다보는 모습에 소름이 돋는 것도 잠시.
-서걱.
내가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반 박자 빨리 놈의 손이 움직였다.
정확히 흉갑과 투구가 이어진 틈을 노린 일격.
목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깔끔한 사망 판정.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놈을 응시했다.
한 번은 괜찮다.
그동안 숨어 있던 녀석이 직접 나선 것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니까.
어차피 나를 한 번에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구사일생(S) Lv.MAX가 발동…….]
내게는 하나의 목숨이 더 있으니.
몸이 기우는 찰나, 권능이 발휘됐다.
[부정 효과(SSS) Lv.MAX]
-모든 긍정적인 효과가 반대로 작용합니다.
[구사일생(S) Lv.MAX가 당신의 몸을 빠르게 붕괴시킵니다.]
하. 진짜.
카운터까지 준비해 놨네.
놈을 보며 웃었다.
“좀 이따, 다시, 보자.”
목에 구멍이 뚫려 바람 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의미는 전달됐으리라.
* * *
95층, 피의 제단에 다시 도착할 때까지는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90층으로 돌아간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릴 줄 알았으나.
[지배자의 자격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지정한 대표자가 존재합니다.]
[일부 계층에 당신에게 우호적인 지배자가 존재합니다.]
[우호적인 지배자가 층을 개방합니다.]
[이동 가능 좌표]
-91층: 밤과 낮의 생존 게임
-92층: 반트성
-93: 판타데미아
-94층: 드래곤 산맥
운이 좋다고 할지, 다시 한번 등반을 이어 나갈 필요는 없었다.
곧장 드래곤 산맥으로 진입한 후 에이션트 드래곤인 메리뮬레의 도움으로 위로 진입.
동시에 동맹을 맺은 가르티의 힘을 사용해 파히루가 있는 95층에 도달했으니.
[피의 제단에 입장합니다!]
-콰아앙!
진입과 동시에 폭발을 일으키며 외쳤다.
“내가 돌아왔다, 이 자식아!”
“어, 어떻게 벌써!”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경악에 찬 목소리.
그곳을 향해 오로라 빔도 쏘았지만 맞지는 않았다.
주변이라도 밝혀지면 좋았으련만 광선이 지나가는 순간에만 잠깐 빛날 뿐 시야가 확보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뭐.
“이럴 줄 알았어.”
나도 아무 계획 없이 돌아온 건 아니다.
놈에게 당한 이유가 무엇인가.
시야가 없기 때문이다.
이 어둠을 거두는 방법은 없다.
아티팩트를 없애면 되긴 하겠다만 놈이 아무 데나 놔두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적어도.
“내 주변만이라도 밝히면 되잖아?”
[파이어(S) Lv.MAX]
[러브 앤 피스(SSS) Lv.3]
-화르르륵!
온몸에 신성한 불을 붙였다.
파이어 자체야 S급이지만 SSS급 스킬을 두르면 말이 달라지지.
거기에 난 신성력이 높다.
특히나 아이템을 장착하면 더더욱.
[마그나로크의 왕관(SSS)을 장착합니다!]
[날개 없는 천사의 오른쪽 날개를 장착합니다!]
-파아아아앗!
신성력은 그 자체로 광휘를 내뿜는다.
왕관에 날개까지 착용한 지금의 나는.
“이블아이 홀리 모드다!”
그야말로 인간 등불.
피의 제단 전체를 보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그러니 적어도 내 주변의 시야는 확보하겠다.
다시는 놈이 내 턱 끝에 칼을 겨누지 못하도록.
그런 내 발악에 위기를 느낀 걸까.
한동안 침묵하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이블아이는 무슨. 쁘띠공듀면서.”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
작은 목소리였지만 너무나 고요했기에 그 말은 명확히 귀에 꽂혔고.
“오.”
[정신 보호(SSS) Lv.MAX]
아주 오랜만에 깊은 빡침을 느낄 수 있었다.
넌 진짜 뒈졌다.
* * *
놈은 지독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씹새끼?”
최근에 욕하는 일이 많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해야겠다.
이건 뭐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미친놈. 똥까지 퍼 왔네.”
진짜 더럽다.
어둠 속을 헤매다 악취가 나길래 뭔가 했더니만.
자고로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라고 했으나.
-푸슝!
“아이 씨! 더럽게 진짜!”
이 녀석은 더러움에 더해 무시무시해지려 하고 있었다.
똥 무더기에 함정을 파는 건 기본이요.
“거기 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겨우 위치를 잡았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오물투성이에 몸을 던진다.
더럽고 비겁하다.
심지어 약아빠졌다.
정정당당한 대결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시궁창 싸움이라면 할 만큼 해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천외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이 경우로 치자면.
“바닥 뚫고 지하로 처박힌 녀석 같으니.”
과거, 세상이 개판 되기 전 코인 샀다가 수익률 –74% 찍은 사촌 형의 그래프가 생각나는 녀석이었다.
“하하! 억울하면 또 들어와 보시지!”
이게 인간의 존엄성을 놓지 않으려는 자와 놓은 자의 차이인가.
잠깐 인격 일부를 포기할까도 싶었으나.
‘아니지. 내가 그동안 인격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지금 와서 그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클린(S) Lv.MAX]
-사아아아아.
그나마 클린 스킬이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답도 없었다.
냄새나는 것들을 치우며 앞으로 나아갔다.
“더럽게 넓네.”
원래도 넓었던 피의 제단이지만 그사이에 증축이라도 한 건지 더 커졌다.
그러니 놈도 몰래 숨어서 싸우는 걸 선택한 거겠지.
애초에 나를 완전히 잡겠다고 움직이지 않고 있다.
“어차피 세금 납부의 날까지 오면 나의 승리다!”
신나서 낄낄거리는 녀석.
나도 모르게 이마를 쳤다.
“너 진짜 생각 얇구나?”
“그렇게 도발해 봐야 소용없지. 낄낄낄!”
맞네.
이 녀석 사고방식이 남달랐지.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서 큰 건 못 보는 녀석.
지능 문제인지 사람 자체가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멍청이다.’
정말 멍청이다.
새삼 허를 찔린 기분이다.
그동안 나름 머리 쓰는 놈들을 상대해 와서 이런 케이스를 만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말로 상대할 필요 없다.
[시한폭탄(SSS) Lv.2]
[시한폭탄(SSS) Lv.2]
[시한폭탄(SSS) Lv.2]
.
.
.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되니까.
놈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녀석과 내가 싸우는 근본적인 이유는.
‘시스템 퀘스트를 완수하기 위함인데.’
작전 변경이다.
굳이 불리한 환경에서 놈을 잡을 생각 따윈 버렸다.
지금부터는.
“투기장 잘 꾸며 봐라. 뭘 해도 부실 공사일 테니까.”
나도 악랄하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