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화 반쪽짜리
내가 가진 이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
태생부터 S급인 권능이었으며 성장하기 전 만났던 현자를 제외하면 간파당한 적이 없다.
[SSS급 권능, 징벌자의 눈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깜빡거립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다만 뭐랄까.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권능으로 느껴진다.
등급으로 봤을 때는 어디 한쪽이 우위인 것도 아닌 것 같고 종류가 좀 다른가.
“흐음.”
찌리리 요정도 뭔가 잘 안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반쯤 감고 있어서 몰랐는데 눈 크네. 외국인이라 그런가.
생각해 보면 요정 클럽은 프랑스 게이머들이 만든 길드가 시작이었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찰나, 작게 한숨을 쉰 찌리리 요정이 입을 열었다.
“그쪽은 잘 모르겠네요.”
“뭐를?”
“내 적이 될지, 어떻게 될지.”
“아아. 권능이 통하지 않았으니까?”
아쉽게도 나도 비슷하다.
[오드릭 다셀]
-요정 클럽의 일원입니다!
-상대 권능의 견제로 일부 정보가 제한됩니다.
동격의 등급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상대방을 파악하는 종류의 권능끼리 부딪쳐서인지 정보가 중간에 막혔다.
기껏해야 이름과 소속 정도만 나온다고 해야 하나.
하다못해 찌리리 요정인 것도 나오지 않았다.
크게 아쉽지는 않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 95층은 상대방의 정보를 읽는 데 제한이 있는 층이었으니까.
“너무 의심하지는 말자고. 내가 수작을 부릴 거였다면 진작 부렸을 거고. 여기.”
“느양?”
냥펀의 어깨를 붙잡아 앞으로 데려왔다.
“나는 아니더라도 이 녀석은 어느 정도 신뢰하잖아.”
“틀린 말은 아니군요.”
내 말에 찌리리 요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잘은 모르겠지만 녀석의 언행으로 볼 때 상대방이 잠재적인 적이 될지 어떨지를 파악하는 능력으로 보인다.
냥펀을 받아들였다는 건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뜻이고.
난 냥펀과 한편이다.
고로 내가 녀석을 적대할 가능성은 낮다.
대충 이런 결론이 나온다.
“초면부터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도 비슷하니 할 말은 없지.”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나도 권능을 사용하긴 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녀석이 먼저 사용해서 반응한 것에 가까웠지만.
앞으로 힘을 합칠 수도 있으니 괜히 예민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제게 만남을 요청한 건.”
“별거 아니야. 서로 돕자고.”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너도 목표는 같잖아.”
등반.
위로 향하는 것.
현재 적극적으로 등반을 이어 나가는 그룹은 많지 않다.
나를 비롯한 쁘찡연합.
미국의 노블나이트와 빅스타 길드.
프랑스의 요정 클럽.
한국의 루키 그룹.
쁘찡연합도 일단은 기반이 한국이라 한국인이 많긴 하다.
이 외에도 개인적으로 올라가는 상위 헌터가 있다고는 하지만 가장 큰 세력으로는 이렇게 있다.
쁘찡연합이야 애초에 경쟁이랑은 거리가 먼 집단이다.
소속감만 있지 강제적인 부분은 없으니까.
반면에 나머지 집단은 하나의 길드라고 봐도 무방했다.
요정 클럽이 루키 그룹을 견제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 때문일 거고.
“쁘찡연합이라면 확실히. 어감도 좋고.”
“음? 그치. 고마워?”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칭찬에 잠깐 버벅댔다.
놀리는 건 아니고 진심일 거다.
쁘찡이란 것도 쁘띠에서 따 온 거니까.
프랑스어가 섞였다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생긴 것.
그 외에도.
“사실 쁘찡연합만큼 모두의 성장을 바라는 곳도 없고요. 이블아이 씨는 이쪽에선 유명하죠.”
그동안 연합이 쌓아 온 이미지가 있다.
대형 길드와 정부의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고 서로를 돕는 것.
직접적으로 돕는 건 조금 덜할지 몰라도 정보만큼은 연합이 아닌 사람들한테도 아낌 없이 푼다.
처음 만들어진 계기도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적어도 탑 안에서는 괴상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눈을 반개한 찌리리 요정이 나를 응시한다.
“그쪽은 이미 루키 그룹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초코쪼코? 맞아. 잘 알고 있네.”
“저와는 적대적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겠죠?”
“알지. 그래서 문제가 되나?”
이런 반응까지는 염두에 뒀다.
초코쪼코를 피의 제단으로 보낸 인물이 그녀였으니까.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대충 들어 알고 있고.
나쁘게 말하면 맞수.
좋게 말하면 라이벌 느낌이었다.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말이지.’
그래서 확인하러 온 거다.
만약 찌리리 요정이 초코쪼코를 적대한다면 방향을 새롭게 잡아야 하니까.
살짝 긴장한 타이밍.
“…그년, 아니. 초코쪼코는 피의 제단에서 많이 다치지는 않았나요?”
이건, 그니까.
걱정하는 거지?
말은 좀 퉁명스럽지만 걱정하는 기색이다.
“물론, 괜찮고말고! 나랑 같이 싸웠거든.”
“당신이랑?”
“이건 몰랐나 보네. 잠깐 일이 있어서 갔다 왔어. 거기서 95층의 지배자도 만났고. 방금도 만나고 왔지.”
“그게 사실인가요!”
상당히 놀랐는지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본인 또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헛기침한다.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말한 게 아니다.
대화하면서 정보를 푸는 거지.
난 이곳을 클리어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핵심이 될지 모르는 키워드인 지배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러니 협력해라.
‘위로 올라가고 싶다면.’
가끔은 힘을 합칠 필요도 있는 법이다.
그녀 또한 잠시 입을 다물더니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시작은 잡담.
적당히 간을 보며 떠든 지 얼마나 됐을까.
찌리리 요정이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조금 더 생산적인 이야기를 해도 좋겠네요.”
살롱의 주인이라 이건가.
슬슬 지루해질 타이밍에 주제를 바꿨다.
“생산적인 이야기라. 좋지.”
안 그래도 몇 가지 상의할 게 있으니까.
먼저.
“이곳에 머문 지 몇 년은 됐다고 들었는데. 맞나?”
“맞아요.”
“이유야 물어볼 것도 없겠군.”
90층대는 등반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간다.
마주하는 위협이 커지는 것도 있지만.
“정답이라고 할 만한 공략이 없어요.”
“영향력을 키워 뭔가 변화를 주는 것 말고는 없지.”
공략 방법이 애매하다는 부분이 가장 크다.
차라리 주어진 규칙이 있고 달성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여긴 그런 것도 딱히 없단 말이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이거.
95층에서 입지를 단단히 굳히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는 것.
초코쪼코가 그러했고 찌리리 요정 또한 비슷한 생각으로 살롱을 만들었다.
나 또한 초반에는 그런 생각으로 조직에 들어갔었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살롱도 그렇지만 나 또한 3대 조직을 하나로 합쳤지. 그럼에도 클리어 조건은 달성하지 못했어.”
“단순히 이곳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겠죠.”
맞다.
단순히 영향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따지고 보면 해당 층에 순응해서 적응한 거에 불과하니까.
근본적인 걸 생각해야 한다.
90층대의 테마는 혼돈.
그리고 혼돈은.
‘변화를 기반으로 한다.’
기존의 규칙과 흐름을 깨고 영향력을 끼치는 것.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되겠지.
변화는 어떤 식으로든 혼란을 일으키니까.
처음부터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해결이 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이곳의 지배자가 거지 중의 거지. 왕초 아니던가.
그 사실을 전달하고 나니 찌리리 요정 또한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이 부질없게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까.
내가 보기에는 아니지만.
“살롱을 만든 것 자체는 문제가 없어. 중요한 건 그 이후에 어떻게 할 거냐지.”
“무슨 의미죠?”
“클리어할 방법이 있다. 정답이라고 장담하진 못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흥미롭군요.”
그럼. 흥미로워야지.
몇 년씩이나 박혀 있으면 위로 올라가고 싶어지기 마련이니까.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손을 까딱이며 찌리리 요정과 냥펀을 불러 모았다.
계획 실행을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지금부터 준비해도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왜냐.
“사회 전체를 바꿔야 돼. 잘하면 시스템도 엿 먹일 수 있고.”
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
* * *
부촌은 거지들의 성지와 같다.
동냥도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거지들 대부분은 빈민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부촌이 아닌 산업 지대에는 자리 잡지 않았는데.
“아이고, 감사합니다!”
“이게 다 얼마야.”
“요즘 이쪽 동네가 살 만하다더니 틀린 말이 없구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하상가가 하나의 산업 단지로 합쳐지며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랐다.
자본이 도는 만큼 기타 상업도 수요가 늘었으니.
“믿기지 않는군.”
사치를 부릴 정도는 아닐지언정 생존만을 위한 선택만 할 필요는 없어졌다.
사라졌던 각자만의 기호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전체적으로 여유가 생겨난 분위기였고 대부분은 그 변화를 달갑게 여겼다.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파히루는 예외였다.
부촌에만 있던 거지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동안은 선택지가 없었으나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더불어.
“왕초! 저 취업했습니다!”
“보니까 공장 일도 할 만합디다.”
“저기 달동네 가면 주거비도 안 들고, 노숙할 때보단 나아요.”
거지 중 일부는 취업까지 했다.
바람직한 변화였으나.
“이 녀석들아, 그러다 또 밖으로 기어 나올 거 아니냐.”
“에이. 그때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않수.”
“그, 보니까 이참에 좋은 사람 만나서 살림 차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소. 크흠.”
파히루는 탐탁지 않았다.
하나둘 자기 손을 떠나는 것 같아서.
자신의 도움을 받을 필요 없이 자립하는 이들을 보자니 응원하는 한편 괘씸한 마음이 들었고.
-쿵!
“악! 왜 때리고 그래요!”
“내 맘이다, 이 녀석아.”
괜히 옆에서 실실거리는 녀석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낯설었다.
이런 변화가.
‘이것도 놈이 한 짓이렷다.’
그동안 이런 일은 없었다.
비슷한 시도는 있기는 했지만.
이곳에 찾아온 등반가들.
그중에는 혁명을 외치며 재산을 재분배하려는 이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반발만 커지고 이전보다 더 극단적인 양극화가 시작되었지만.
부촌도 그렇게 생겨났다.
“어리석은 녀석.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건만.”
기존의 규칙이 일그러지는 것에 불편함을 느꼈지만 이내 마음을 다스렸다.
결국에는 포기할 것이다.
급작스러운 변화다.
덩치 큰 세력이 욕심을 부리는 순간, 아귀다툼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한 달은.
-속보! 부촌 개방!
-지하상가 상업 단지와 협약 체결!
-규모 확대로 노동자 수혈. 부촌과의 경계가 사라진다!
찌라시를 뿌리기 바빴던 신문이 돌았다.
지하상가를 위협으로 느끼고 견제할 거라 생각했던 부촌이 문을 열었다.
콧대 높은 이들이 교류를 요청했다?
믿을 수 없었으나 그 배경에는 살롱이 있었다.
원래라면 이곳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 목표였을 텐데.
“왕초, 아니 형님. 저도 떠납니다.”
“거, 고집 그만 부리고 같이 일이나 합시다! 요즘 거지라 하면 욕먹어요.”
“여기 공장장이 괜찮은데 이쪽으로 오십셔. 제가 미리 말해 뒀다니까요?”
“거지로 사는 것도 좋긴 한데, 조금만 노력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더라고요.”
두 달이 지났다.
하나둘 떠나는 이들.
고집이 고립으로 변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모든 거지들의 왕, 파히루.
도시 유일의 거지.
일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자.
“아직도 저러고 있군.”
“넌 저리 살지 말거라.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고 살아야지.”
거지들을 지키던 이가 잉여 인간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찾아가는 이도, 말 한마디 거는 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말을 거는 존재가 있다면.
[시스템이 피의 제단을 활성화할 것을 요구합니다.]
[시스템이 지배자의 업무를 지속할 것을 요구합니다.]
계속해서 재촉해 오는 시스템뿐.
갈수록 강해지는 압박.
시스템이 직접적으로 닦달을 해 왔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해가 진 저녁.
“왜! 왜애애애! 나한테서 뺏어 가지 못해 안달인데!”
95층의 지배자.
플래티넘 등급의 숭배자.
동시에.
[혼돈의 파편에 걸친 존재가 분노합니다.]
[외로움의 파히루가 큰 원한을 가집니다.]
혼돈의 파편이 될 수 없었던 존재가 울부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