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화 기반
열기가 식으며 더 싸늘해진 공간.
처참하게 박살 난 석실 안에 서 있는 이들은 침묵을 고수했다.
여전히 무기를 들고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덤비는 이는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새롭게 동맹이 된 트랄로우는 포션을 마시며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보름 만에 움직이려니 뻐근하군.”
“그 상태로 오래 방치됐나 보군. 궁금해서 그런데 그 꼴이면 볼일을 어떻… 음. 아니다.”
괜한 호기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녀석도 얼굴을 구긴 채 날 노려보고.
샤워와 클린 스킬이 있으니 위생은 괜찮았겠지.
아님 말고.
슬쩍 코를 막으며 한 발 떨어졌다.
그건 그거고.
[1차 징수가 종료됩니다.]
[사상자를 수거합니다.]
-사르르르르.
아까까지만 해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가 빛이 되어 사라진다.
빛의 가루가 되어 저울로 날아가 쌓였으니.
-구구구구궁.
저울이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상품이 죽으며 쌓인 쪽이 여전히 위에 있었으나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무거워졌다.
그것을 증명하듯 위로 떠오른 메시지에도 변화가 생겼다.
[미납 총액: 578,760,040리안]
[정산 금액: 213,251,100리안]
1차 징수 때 죽은 이들의 유산.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물건뿐만 아니라 몸과 영혼까지 정산된 금액.
많은 금액인 것도 같았지만 한 사람의 가치라고 생각하면 적은 것도 같다.
“많이 죽었네.”
“그 난리를 피웠는데 당연하지.”
차라리 서로가 서로를 노리는 난전이었으면 나았을지 모른다.
그때는 오히려 모두가 적이기에 방어에 치중했을 테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을 거고.
자업자득이다.
그러게 적당히 덤볐어야지.
“한시름 놓았군.”
“이제 굳이 우리, 정확히는 너를 노릴 이유가 없잖아.”
초코쪼코의 말대로다.
시스템이 매긴 나의 감정가는 4억대.
갚아야 하는 미납금은 이제 3억대다.
나를 죽여 봤자 금액 오버라는 말.
물론 오버되는 금액만큼 모두에게 분배되긴 하지만.
‘굳이 그거 먹겠다고 욕심 부리지는 않겠지.’
죽인 사람이 남은 모든 금액을 받는 거라면 모를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은 물론이요, 자신을 상품으로 팔아 버린 놈에게까지 분배가 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해 봤자 받는 건 다 똑같다는 이야기.
‘목숨 걸어 나 잡을 바에야 만만한 놈들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앞으로 전투가 벌어지면 나보다 다른 놈을 노릴 거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상황 파악을 완료한 이들이 저마다 팀을 꾸렸다.
혼자 있는 것보다는 무리를 짓는 게 더 안전하니까.
그중 가장 강한 팀은 우리고.
“으흠. 혹시 괜찮으면 함께할 수 있겠소?”
“미쳤나?”
“아, 아니오. 실례했소.”
당연히 우리 쪽으로 붙는 것이 가장 안전했지만 다가오는 놈은 거의 없었다.
상식적으로 나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놈들 아니던가.
저건 뻔뻔한 게 아니라 겁대가리를 상실한 거다.
“별의별 놈들이 다 있네.”
초코쪼코도 같은 생각인지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의미에서 트랄로우는 운이 좋았지.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1차 징수-기본 전투력 측정이 종료됩니다.]
[2차 징수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1차 징수가 끝나며 주어진 휴식 시간.
다음을 위해 준비할 시간이다.
“2차 징수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지? 징수를 몇 번 하는지도 궁금하군.”
내 물음에 초코쪼코가 팔짱을 낀다.
“나도 3차 징수까지밖에 못 가 봤어. 듣기로는 5차까지 있다고는 하던데.”
“5차까지?”
“응. 가능한 거기까진 안 가는 게 좋아. 그때는 강제 청산이거든.”
간단히 요약하자면 시스템의 선별하에 상품을 강제 처분한다는 뜻이다.
시스템은 날 원하고 있다.
망설임 없이 나를 지목하겠지.
절대 5차까지 가면 안 된다.
그런데.
“5차 징수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았지?”
“스마일캡이 겪어 봤거든.”
95층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게 확실한 녀석이다.
설마설마하긴 했지만 녀석도 이걸 겪은 건가.
5차 징수에서 살아남았고?
어떻게 보면 운이 굉장히 좋은 녀석이었다.
‘어쩌면 초코쪼코가 여기에 있는 것도 스마일캡이 정보를 줘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군.’
피의 제단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꼼수로 쓸 수 있으니까.
실패할 경우 죽는 게 문제지.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으니.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사망 판정으로 안전지대에서 깨어나나?
아니면 95층은 NPC 취급을 받는다고 했으니 시스템에 먹혀 진짜 NPC가 될지도 모른다.
등반가를 NPC로 만들어 버린다니 끔찍한 일이긴 했으나.
‘못 할 것도 없지.’
여긴 탑이니까.
시스템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탑.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최악을 가정하는 게 맞다.
그런 내 생각을 지지해 주는 걸까.
[Tip. 95층 피의 제단에 바쳐지면 등반가도 NPC가 되니 주의하세요!]
오랜만에 팁 메시지가 떠올랐다.
팁 메시지는 시스템이 관장하는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중 하나다.
덕분에 확실해졌다.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
무한 코인이 있으면 뭐 하나. NPC가 되면 끝인데.
이건 이 정도만 생각하고.
초코쪼코의 말에 귀 기울였다.
“아무튼 1차가 단체 전투. 쭉정이 걸러 내는 거고. 2차는 생산 능력 검증, 3차가 공적도 검증이었어.”
2차 징수는 생산 능력을 검증하는 것.
시스템이 제공하는 재료로 무엇이든 만들어 내면 된다.
제한된 시간 내에 자신의 생산력을 증명하는 것.
그때 만들어진 물건들의 감정가만큼 미납금이 채워진다.
조용히 초코쪼코의 말을 듣던 난 얼굴을 찌푸렸다.
2차 징수가 어떤 건지는 알았다.
정작 내 관심을 끈 건 징수의 구조였지만.
‘상품의 전투력과 생산 능력, 그동안 쌓아 온 업적을 살핀다? 이거 완전.’
“NPC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들이잖아.”
이제야 확실히 실감 난다.
이 망할 피의 제단이 뭐 하는 곳인지.
NPC에게는 각자 역할이 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곳에 놔둔다.
강력한 힘을 가진 킬더레스가 투기장의 주인이었고, 별다른 능력이 없던 치히린과 모빌리딕이 호수에 처박혀 있던 것처럼.
헬다잉 키친과 히든 가든, 프램버그와 같이 고유한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집단으로 뭉쳐 놔야 더 생산성이 좋으니까.
이곳은 NPC를 만들고 가치에 따라 분류하는 곳.
NPC 생산 공장.
그게 피의 제단의 본체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와닿으니 기분이 더러운 게 사실.
“후우.”
작게 숨을 내뱉으며 감정을 털어 냈다.
탑은 원래 이런 곳이다.
이제 와서 놀라는 것도 우습지.
[2차 징수가 진행됩니다.]
[시스템 창고를 통해 재료 수급이 가능합니다.]
[무엇이든 만들어 내십시오.]
[협동 플레이를 인정합니다.]
[생산한 것의 가치만큼 미납금을 충당합니다.]
[제한 시간: 48시간]
2차 징수가 시작됐다.
주어진 시간은 이틀.
메시지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사람들의 표정이 변한다.
“거, 거기! 혹시 조수 필요하지 않소?”
“내가 짐을 들리다! 건축이라면 사람이 많이 필요할 것 아니오?”
“이런 것도 인증해 주려나?”
“크흠! 생존 비법이라도 적어 봐야겠군!”
조금이라도 재주가 있는 자는 곧장 작업을 시작했고 생산 능력이 없는 놈들은 어떻게든 그들에게 붙으려 했다.
협동이 가능하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 공로를 인정해 주겠다는 거다.
“저리 꺼져! 사람은 이 정도면 충분해!”
“개인 작업으로 충분하다. 너흰 필요 없다.”
반대로 뭔가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는 자들을 방치한다면 2차 징수가 끝날 때 사망한다.
아무런 가치도 창출해 내지 못했으니까.
죽은 이들만큼 미납금이 채워지는 건 덤.
90층대에 있다고 모두가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건 아니다.
당장 탈모맨만 봐도 능력치 대부분이 전투에 몰빵되어 있다.
이런 이들이 곱게 죽어 줄 리가 있나.
“이이익! 날 쓰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 주마!”
“나 혼자 죽을 거라 생각해? 죽어도 같이 죽는 거야!”
“이런 미친놈들이!”
내가 죽는 거면 너희도 죽는 거라며 난동을 피우지.
놔두면 놔둘수록 개판이 된다는 것.
애초에 시스템은 분쟁을 좋아한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대충 각이 보인다.
“까짓것 해 보지, 뭐.”
다행히 이쪽으로는 자신이 있다.
어쩌면 2차 징수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초코쪼코, 트랄로우. 내게 생각이 있다.”
둘을 불러 모았다.
2차 징수의 조건은 간단했다.
무언가를 생산하라.
초코쪼코의 설명대로라면 생산품에 제한은 없다.
그냥 간단한 레시피로 국수 하나 만들어도 인정.
딱히 쓸모는 없지만 조각칼로 나무 인형을 만들어도 인정.
자신이 가진 지식을 토대로 책을 쓰는 것도 당연히 가능하다.
뭐든 하면 된다는 뜻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우우우우우웅.
살펴본바 시스템 창고에는 없는 게 없었다.
적어도 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다 꺼내 올 수 있다.
“잘하면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 미납금만큼의 가치를 가진 물건들을 뽑아내면 되는 거잖아.”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그렇다면 그렇게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것 아닌가?”
“너 설마?”
“어, 맞아. 48시간 이내에 미납금을 모두 채울 생각이야.”
여전히 난장판인 석실을 바라보며 가리켰다.
“할 것 없어 보이는 놈들 다 데리고 와. 그사이에 난 준비 좀 하고 있을 테니까.”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움직인다.
손이 부족할 수도 있어 망구도 소환했다.
뭐부터 할까.
“일단 구역을 나눠야겠군.”
왼쪽 공간에서는 요리를, 중앙은 장비 제작, 오른쪽에서는 포션 및 영약을 제작할 생각.
레시피를 알려 줄 생각은 없다.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닐 만한 것도 아니거니와 알아 봤자 관련 스킬이 없으면 불가능하니까.
그래도 단순 재료 손질이나 단순노동은 시킬 수 있겠지.
대량 생산.
내가 봤을 때 2차 징수를 뚫을 키워드는 이거다.
때마침 이곳은 노동자가 넘쳐 나는 곳.
다들 겪어 봤을 것 아닌가.
“다들 공장이라고 생각하고 굴러라!”
밖에서도 못 해 본 공장장이 될 시간이었다.
* * *
2차 징수 종료.
꽤나 많은 일을 벌였다.
시간이 48시간밖에 없으니 짧은 시간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 위주로 움직였다.
공정이 간단하지만 고급, 희귀 재료가 필요한 것들.
평소라면 못 했겠지만 뭐 어떤가.
내 재료도 아니고 시스템이 공급하는 재료인데.
이번 기회에 막 써 보는 거지.
그동안 해 보고 싶었던 것도 시도해 보고.
48시간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움직였다.
나뿐만일까, 다른 놈들도 내 지시에 따라 부지런히 움직였으니.
[2차 징수 종료.]
[생산한 상품을 수거합니다.]
“오오오오오오!”
“살았다! 살았다아아아!”
“이블아이! 이블아이!”
“피의 제단의 구원자!”
결과적으로 모든 인원이 생산 활동에 참가.
채워 넣은 미납금도 상당했다.
[미납 총액: 578,760,040리안]
[정산 금액: 493,872,551리안]
남은 금액은 고작해야 1억 리안도 안 된다.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별수 있나.
이 정도만 해도 선방한 거다.
“무슨 생산 스킬을 이렇게까지 찍은 거야.”
질린 표정을 짓는 초코쪼코.
나도 의도하고 이런 건 아니다.
릴카나 프램버그, 헬다잉 키친 등등 나와 인연이 닿은 NPC들이 이쪽 관련으로 특화되어 있어서 그렇지.
“뭐든 할 줄 알아서 손해 볼 일은 없지.”
“그렇긴 하다만.”
어찌 됐든 이걸로 고비는 넘겼다.
이 추세면 3차 징수에서 모든 걸 끝낼 수 있다.
그뿐인가.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도록 하지.”
“밖에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게나. 지금은 이곳에 있지만 밖에서는 좀 날렸거든.”
“정보가 필요하면 따로 찾아와라. 갚은 치르지.”
여기에 온 놈들 대부분이 내게 은혜를 입었다.
일반 노동자는 1차 징수 때 대부분 죽은 상태.
남아 있는 놈들은 적대 세력에게 잡힌 조직의 간부나 범죄자, 혁명하려다 잡힌 놈들이었다.
나름 세력과 힘을 가진 놈들이라는 것.
‘예상외의 인연이 생겼군.’
안 그래도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쓰레기 마을에서도 그랬고 검은 갈고리 조직에서도 그랬고 대두상의 공장에서도 그랬다.
내 세력이 아닌 남의 세력에 있어 봤자 팔리고 이용당할 뿐이다.
“나중에 따로 찾아가지.”
이걸로 기반은 다졌다.
다만 그 전에.
“일단은 이곳에 집중하자. 밖에 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망할 미납금부터 처리해야 한다.
[3차 징수가 시작됩니다.]
새로운 징수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