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9화 피의 무게
운송은 차질 없이 진행됐다.
애초에 문제가 생길 일이 없었다.
상품으로 팔려 가는 이들이 몸부림을 쳤지만 구속된 만큼 별다른 의미는 없었고.
“흐아암. 드디어 도착인가.”
나 역시 저항할 생각이 없었으니.
뭘 그리 조심하는 건지 빨리 안 가서 낮잠까지 잤다.
기껏해야 30분 정도 잔 것 같지만 피곤함을 없애는 데는 충분했다.
“이런. 이블아이.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마음이 아프군.”
“세상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법이지.”
“힘내게나. 혹시 아나. 천운이 따를지. 가끔 있네. 생존자가.”
지랄하네.
피의 제단이 어떤 곳인지 모르면 모를까 지금은 다 아는데.
상품으로 넘겨진 이들 중 몇 명이나 살아남겠나.
살기는 개뿔. 다 죽겠지.
-툭툭.
거래 대상인 대두상이 나를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두드린다.
불쌍하게 보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고.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는 충분히 알 법하다.
일이 끝나면 녀석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리라는 것.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리석은 짓을 했군.”
“한번 뒤통수 꽂힌 곳은 안 들어가는 성격이라서.”
“마지막으로 제안하지. 너를 대신할 상품이 있다. 지금이라도 이쪽으로 와라.”
드렉프리가 턱을 까딱이자 조직원들이 마차에서 보지 못한 녀석을 끌고 온다.
얼굴에 봉투를 씌워 얼굴은 안 보였지만 상품으로 쓸 놈이라는 건 알겠다.
여기서 목숨을 구해 주고 나를 챙겨 가겠다는 건가.
대두상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미리 이야기가 오간 모양.
“재밌는 이야기네.”
의외의 제안에 살짝 감탄했다.
만약 따로 목적이 없었다면 혹할 만큼.
“거절하지.”
다만, 난 목적을 이루어야 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온다면 여지는 둘 생각.
어차피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세상.
머리가 굴러가는 녀석이라면 파트너가 되기에 충분하니까.
“만약 내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때는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 밑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 동등한 입장으로.”
“…그러지.”
녀석도 더 이상 말을 늘리지 않았다.
후우. 작게 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나와 상품들이 내린 장소는 대두상의 물류 창고.
주변 시선도 있으니 건물 안에서 상품 전달이 이루어지는 거다.
인원수를 체크하고 계산도 마쳤다.
“움직여라, 쓸모없는 놈들아!”
대두상의 부하가 거칠게 등을 민다.
쇠사슬에 묶여 일렬로 선 이들이 끌려가듯 비밀 통로로 향한다.
어차피 다 죽을 거라 생각하는 건지 눈을 가리지도 않는다.
진행은 간단했다.
전에 몰래 왔던 길을 따라 움직였고, 이내 전송 마법진이 있는 곳에 도착했으니.
“3명씩 짝을 이루어 들어간다!”
36명의 인원을 나누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뒤의 순서를 받으려 몸을 비트는 이들.
난 오히려 앞으로 나서며 마법진 중앙에 섰다.
“할 거면 빨리 해라. 귀찮으니.”
“그나마 덜 쓰레기 같은 놈이 있었군.”
탁. 손바닥에 몽둥이를 두드린 놈이 냅다 옆에 있는 상품의 머리통을 쳤다.
짧은 비명과 함께 쓰러지는 녀석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내 옆에 던져 놓는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지 타박상만 있지 이마가 찢어지지는 않았다.
곧이어 다른 놈도 머리를 얻어맞고 마법진 위에 굴렀으니.
“전송시켜라!”
-우우우우웅!
마법진이 가동됐다.
[피의 제단으로 이동합니다.]
짧은 문구가 떠오른다.
약간의 부유감과 균형이 뒤엉키는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이내 시야가 돌아왔을 때는.
“여기군.”
붉은 조명이 가득한 시커먼 공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디서 들어오는 건지 곳곳에서 상품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소환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사람, 손발이 묶인 사람.
아예 관짝에 처박힌 놈도 있었고.
“저건 또 뭐야.”
밖에서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몸에 쇠를 부어 고정해 버린 놈도 있었다.
저런 꼴을 당하고도 눈은 시퍼렇게 뜨고 있는 것이, 보통 놈은 아니었다.
온갖 괴상한 놈들 사이에 있자니 나와 함께 넘어온 놈들은 매우 착해 보였다.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는 놈들이 태반이었으니.
-콰창.
우선 손목에 달린 수갑부터 부쉈다.
자꾸 걸리적거려서 불편했거든.
그럼 가장 먼저.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시한폭탄(SSS) Lv.1]
[시한폭탄(SSS) Lv.1]
[시한폭탄(SSS) Lv.1]
.
.
.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스킬이 발동된 것을 봤을 때 제대로 터진 것 같지만.
이걸로 대두상이 사용하고 있는 전송 마법진은 사용 불가.
달리 말하면.
“세금 제대로 내고 살라 이거야.”
“그에에.”
더 이상 놈은 상품을 보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걸 위해 권능을 사용해 시한폭탄 등급도 올렸다.
S급일 때도 쓸 만했지만 거리 제약이 있어서.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 만큼 확실히 시한폭탄을 터트리려면 등급 상승은 필수였다.
그동안 자주 사용한 스킬이라 올릴 계획이기도 했고.
[모든 상품이 전송되었습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있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애들이 상품 상품 하길래 뭔가 했더니만 진짜 시스템상으로는 상품 취급을 받고 있는 모양.
기분이 참 뭐 같다.
[당신은 상품입니다.]
[세금 납부자 명단에서 제외됩니다.]
뭐, 보아하니 사람 취급도 못 받아서 세금을 낼 필요는 없어 보인다.
혹여나 냅다 세금으로 쓴답시고 소환된 사람을 갈아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쯧. 작게 혀를 찼다.
“피의 제단이라. 이름 한번 거창하네.”
컨셉을 제대로 잡은 건지 저 멀리, 거대한 저울이 달려 있다.
그 위로 보이는 건 룰렛 머신처럼 만들어진 석판.
지금은 모두 0으로 되어 있다.
나중에는 숫자가 오르려나.
“빌어먹을, 이곳에 오다니!”
“나, 나 좀 풀어 주게.”
“후우. 빌어먹을. 또 오기는 싫었는데.”
저마다 떠들고 있는 놈들.
그중에서 유독 이질적인 말이 있었으니.
‘또 오기 싫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전에도 왔다는 뜻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다른 이들도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불안에 떠는 다른 이들과 달리 늘어져라 한숨만 쉬는 게 꽤나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등반가다.’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키는 대충 160cm 정도.
귀염상인 여자였는데 이곳에서는 보기 힘든 동양인이다.
그것도 씨발거리는 발음이 찰진 걸 봤을 때 한국인.
다른 녀석들과 달리 무장도 제대로 하고 있다.
‘머리카락이 길다.’
눈을 가늘게 떴다.
대부분의 등반가는 머리를 짧게 한다.
관리를 떠나서 전투할 때 방해가 되니까.
당장 핥짝이도 단발이다.
달리 말하면 저렇게 길러도 문제 되지 않을 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것보다.
‘입에는 뭘 묻히고 다니는 거야. 초콜릿?’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즛.
망설임 없이 사용한 권능.
그녀의 정보가 떠올랐으니.
[백세린]
-최대 등반 층 95층.
-루키 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닉네임: 초코쪼코
초코쪼코!
나도 아는 닉네임이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해 본 적은 없었으나 커뮤니티에서 종종 보였으니까.
루키 그룹 일원인 건 알고 있었다.
이전에 잠깐 같이 움직였던 김조균도 루키 그룹 소속이었으니.
위에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곳에 있을 줄이야.
‘95층에 루키 그룹과 요정 클럽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볼 줄은 몰랐군.’
녀석에게 접근했다.
나보다 먼저 95층에 도달한 녀석이다.
커뮤니티에서 한 걸 보면 쁘찡연합에도 우호적인 편.
[펠라인 세트를 착용합니다!]
그렇다면 나 또한 녀석이 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좋겠지.
“오옷! 눈부셔!”
“이건 또 뭐야!”
“무지개? 어. 나 벌써 죽은 건가? 별 괴상한 게 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경악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들.
이제는 익숙해서 상관없다.
별로 관심 없기도 하고.
애초에 저 녀석의 관심을 끄는 게 목적이었다.
당연히 목적은 성공.
다른 건 몰라도 어그로 끄는 건 내 전문이다.
“무지개 갑옷? 음? 으으음? 너 설마 이블아이냐!”
“그쪽은 루키 그룹이겠군. 초코쪼코.”
“뭐야? 난 어떻게 알아?”
“95층에 있다고 들었으니까. 요정 클럽은 부촌에 있다 했으니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 스마일캡 포함 다른 사람들은 만난 적이 있거든.”
간단한 소거법.
사실은 권능을 사용해서 안 거지만 아무렴 어떤가.
“아하, 맞네. 스마일캡. 예전에 헬다잉 키친에서 너 만났다고 했었는데.”
고개를 주억거린 녀석이 다가온다.
적의는 없다.
오히려 호감에 가깝다.
그럼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송곳 요정은 루키 그룹을 경계한다.’
특히 95층에 대해 걱정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눈앞에 있는 초코쪼코를 말했던 거겠지.
겉으로 봤을 땐 활달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진짜 모습은 다를지도 모른다.
탑이라는 게 워낙 지랄맞아서 사람 성격을 다 버려 두니까.
“이곳에는 처음 온 게 아닌 것 같던데.”
“그치. 되도록 올 생각은 없었는데 낼 세금이 없어서.”
상품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달리 말하면, 굳이 일하지 않아도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거다.
쉬운 방법은 아닐 거다.
아무나 할 수 있다면 모두가 그렇게 할 테니까.
“그 전에, 우리 동맹 맺을래? 여기에서만이라도.”
녀석이 동맹을 제안했다는 건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
분명 혼자서 모든 걸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일이 펼쳐진다는 거다.
나도 손해 볼 일이 없다.
“동맹이라. 그러지.”
“빨라서 좋네. 안 그래도 곧 시작할 거거든.”
“시작한다니?”
“상품 가치 측정.”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시지가 떠오른다.
동시에 0으로 맞춰져 있던 룰렛이 움직였으니.
-드드드드득.
거대한 돌덩이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숫자가 돌아간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저울이 기울기 시작했으니.
[미납 세금이 계산됩니다.]
[총 금액: 578,760,040리안]
룰렛이 표기한 숫자.
세금을 내지 않고 우리를 바친 놈들이 내야 했을 세금이다.
무려 억 단위.
“이, 이런, 미친!”
“저게 말이 되냐고!”
“얼마나 해 먹은 거냐, 개자식들아!”
사방에서 욕설이 들린다.
초코쪼코도 미간을 좁힌다.
“이건 좀 많은데.”
“평소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닌 모양이지?”
“많아야 4억 리안 근처인 게 보통이지. 놈들도 무작정 탈세를 할 수는 없거든. 감당이 안 되니까.”
탈세도 제한이 있는 모양.
“심지어 이번에는 인원이 좀 적어. 다행히 쓸 만해 보이는 놈들이 있기는 한데.”
상품으로 팔려 온 사람의 숫자도 변수가 되는 건가.
궁금증이 생겼지만 말을 아꼈다.
왜냐.
[상품 가치를 판정합니다.]
[개인 무력 측정]
[착용 장비 측정]
[보유 권능 측정]
[보유 칭호 측정]
.
.
.
-파아아아앗!
상품을 향해 빛이 쏘아졌으니까.
뭔가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
순간적으로 혼돈이 꿈틀거렸지만 빛은 금방 사라졌다.
몸에 무슨 짓을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바뀐 게 있다.
머리 위로 떠오른 반투명한 창.
[상품 가치: 238,800,488리안]
이게 시스템이 판단한 내 가치인가.
2억이 넘는 금액.
많은 건가.
많은 것 같기는 한데.
내 앞에 있는 초코쪼코를 바라봤다.
[상품 가치: 194,501,330리안]
이 녀석도 2억에 근접한다.
결과가 놀라운 건 마찬가지인지 눈이 동그래진다.
“아니, 너. 무슨 수치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슬쩍 다른 놈들을 바라보니 이해가 된다.
[상품 가치: 832,995리안]
[상품 가치: 3,195,300리안]
[상품 가치: 1,595,210리안]
.
.
.
억 단위를 찍은 존재는 우리를 제외하면 없었으니까.
어떤 놈은 고작 십만 리안을 겨우 넘겼다.
천만 단위에 있는 놈들을 다 합쳐도 10명도 안 되고.
그나마 높은 녀석이 있다면 저놈.
[상품 가치: 83,704,333리안]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눈에 들어온 녀석.
온몸에 쇳물을 부어 고정한 놈이었다.
여기서 끝나면 좋을 텐데.
[혼돈 수치가 극도로 높은 대상이 있습니다.]
[시스템이 상품을 획득하고자 합니다!]
[상품 감정가가 상승합니다!]
빛줄기 하나가 내 머리에 꽂혔다.
다시금 바뀌는 숫자.
맹렬히 숫자가 올라간다.
[상품 가치: 454,501,370리안]
기어코 4억을 뚫어 버린 숫자.
그런 나를 축하하기라도 하는 건가 팡파레가 터졌다.
[최상급 상품의 등장!]
[미납 세금을 초과하는 금액은 상품 제공자를 포함, 생존한 상품에게 분배됩니다.]
[1차 상품 회수가 진행됩니다.]
[사망자는 세금으로 정산됩니다.]
[미납금액 납부 시 이벤트가 종료됩니다.]
석실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후우. 작게 숨을 내뱉었다.
[1차 상품 회수 시간: 12시간]
[피의 무게를 측정합니다.]
선고와 같은 메시지.
그와 동시에 저울 위에 장식으로 있던 해골이 붉은 안광을 뿜는다.
다들 어디서 그리 챙겨왔는지 저마다 무기를 꺼내는 이들.
놈들이 노려보는 건 나였다.
“저놈만 죽이면 미납금 대부분을 없앨 수 있어.”
“무조건 죽인다. 어차피 사람은 목이 잘리면 죽어!”
“살 방법이 있다! 저놈을 죽이면 돼!”
살기가 감도는 수백 쌍의 눈깔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것 참.
“이럴 때만 인기가 넘치더라.”
안 그래도 되는데.
괴성과 함께 달려오는 놈들을 향해 검을 뽑았다.
입꼬리를 올리면서.
“함께 힘내 보자고, 동맹끼리.”
“…하아. 인생.”
초코쪼코가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