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54화 (654/740)

654화 너희는 왜 여기 있냐?

자기 가치를 올리는 일은 매우 간단하다.

잘 보여야 할 사람한테 좋은 인상을 남기면 되니까.

그 과정인 인상적이면 더 좋고.

거기에 하나 더.

주변에서 추켜세워 주면 금상첨화다.

‘알맹이는 어떤지 몰라도 평판이 좋으면 가치가 올라가거든.’

그렇기에 단순히 일만 하지 않았다.

양조장에 사는 이들의 생활을 조금이나마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썩어 빠진 모포와 옷들을 정리하고 커다란 천을 사서 옷을 만들어 입혔다.

공짜로 한 건 아니다.

대신 돌아다니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퍼트리라고 했다.

대놓고 하는 주가 조작이랑 다를 바 없었지만 상냥한 미소와 주먹이 있다면 통하기 마련이었다.

그 결과가 이거.

“그냥 무식하게 힘만 센 것도 아니고 아랫것들 관리도 제법 했더군.”

“굴리기만 하면 뭐가 나오나. 적당히 구슬릴 줄도 알아야지.”

“맞는 말이야. 당근과 채찍이 필요한 법이거든, 특히나 이 바닥에서는. 우리는 이걸 의리라고 부르지.”

앞에 앉아 있는 녀석이 금니가 보이게 웃는다.

의리 다 죽었네.

현재 폴을 찾아왔던 거물, 드렉프리와 함께 도시로 이동하고 있었다.

나름 대우를 해 주겠다는 건지 마차에 자리까지 내주었다.

도시에 도착하기 전까지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려는 의도가 더 큰 거 같기는 하지만.

“드렉프리.”

“그래, 파트너.”

“미리 말하는데 나한테 장난질하다 걸리면 발 뻗고 자기는 힘들 거야.”

“하하하하! 내가 스카웃한 인재에게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

어. 그것도 많이.

다짜고짜 보디가드를 부려 시험을 한 녀석이다.

내가 의도한 거지만 그대로 흘러가게 놔두었다는 건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내기 위해 시험에 던지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천성은 어디 안 간다고 한 번 이런 녀석은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끼이이이

“다 왔습니다, 본부장님.”

“내리지. 도시는 처음인가?”

녀석을 따라 마차에서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직책은 본부장.

깡패 주제에 거창한 직책이 아닐 수 없었지만 놈이 몸담은 조직의 규모를 생각해 보면 우습게 볼 건 아니었다.

‘도시의 뒷골목 시장을 점령하고 있는 3개의 조직 중 하나.’

어째 탑을 오를 때마다 양지보다는 음지에 속하게 되는 거 같지만 별수 있나.

그냥 내 팔자가 사납구나 하고 넘어가야지.

나도 양지에서 활동하는 것보다는 여차하면 무력을 쓸 수 있는 환경이 편하고.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탑에 있는 놈들이 워낙 개판이라 생긴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그에에?”

“맞잖아. 이래 보여도 마음이 여린 사람이라고.”

뭔 지랄이지? 하는 표정을 짓는 덕춘이를 쓰다듬고 발걸음을 옮겼다.

95층 최대 도시, 파우저 시티.

중세처럼 성벽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산처럼 쌓인 공장과 건물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계획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빈자리가 있다면 뭐든 만든 느낌.

웅장하다기보다는 거대하다는 말이 어울렸다.

공기는 탁하고 바람은 뜨겁다.

배기관을 타고 흐르던 증기 일부가 삐져나오는 꼴이 가스 배관이었으면 진작에 터지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하는 사업은 그리 나쁜 게 아니야. 하기 싫은 거 대신 해 주고, 관리해 주고, 찾기 힘든 걸 찾아오고 팔기도 하지. 일종의 종합 서비스 센터인 거야.”

어지간한 건 다 건든다는 이야기였다.

“불법적인 일은 거의 없어. 경계선에 있는 건 많지만. 이쪽도 경비대가 깐깐하거든.”

“저들이 경비대인가 보군?”

“맞아. 하드웨이! 잘 지내나!”

“뭐, 평소와 같지.”

“시간 나면 술집에 들르라고! 내가 미리 서비스 잘해 달라고 말해 놨으니까 말이야.”

어깨를 으쓱이며 경비대원이 지나간다.

부패 경찰 그런 건가 싶었지만 이곳에서는 보통인 모양.

“서로 돕고 사는 거지. 인생 팍팍한 건 매한가지니까.”

머리를 쓸어 넘긴 녀석과 도달한 곳은 중심지에 만들어진 3층짜리 건물.

큼지막한 벽돌로 만들어져 튼튼해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자 부하로 보이는 이들이 인사를 건네 왔고.

“다들 인사해. 내가 쓰레기 속에서 보물을 주워 왔지.”

“반갑습니다!”

“편히 불러 주십쇼, 이블아이 님!”

열댓 명의 종업원과 가드들이 깍듯하게 인사했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 언질을 해 둔 모양.

오자마자 텃세질 하면 어떻게 밟아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처음 일하는 거니 도와줄 사람을 붙여 주는 게 좋겠지. 길더, 잘 보필해.”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감시역은 옆에 뒀다.

머리를 밀고 두피에 문신한 사내가 90도로 인사한다.

볼이 홀쭉 들어간 것이 신경이 예민해 보이는데 괜찮나 모르겠다.

일만 잘하면 되지.

“슬슬 세금 내는 날이야. 다들 부지런히 움직이자고!”

-짝짝!

드렉프리가 손뼉을 치자 모였던 이들이 빠르게 해산한다.

일이 있다는 드렉프리가 먼저 자리를 뜨고 보좌이자 감시자인 길더가 나를 안내했다.

이 건물의 최상단에 위치한 업무실이었다.

올라오면서 대략적인 구조를 기억했다.

1층은 라운지와 바.

2층은 룸.

3층은 VIP를 위한 공간이자 내 업무실.

업무실 중 일하는 공간은 안쪽에 따로 있고 나머지는 접대실로 쓰이고 있다.

“하실 일은 간단합니다. 이곳을 포함한 술집 2개와 다른 사업장 물품 관리를 하시면 됩니다.”

“진짜 할 일은 물품 쪽이겠군?”

“그렇습니다. 술장사는 현금 뽑으라고 배정했을 뿐이죠. 품위 유지도 해야 하니까요.”

애초에 술을 납품하던 일을 했다.

아예 다른 일을 시키지는 않을 거라 예상했다.

‘나쁘지 않아.’

여기저기 물건을 넘기다 보면 지하상가에도 연이 트이겠지.

인수인계를 위해 남겨진 서류를 살폈다.

확실히 쓰레기 동네와는 달리 장부가 꼼꼼하다.

어디서 뭐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손님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다.

누가 얼마나 쓰고 어떤 빈도로 오는지는 꽤 중요한 법.

이름과 그들의 직업 등등을 빠르게 외웠다.

초인이 되면서 뇌도 좋아졌는지 이전보다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전임자는 어디 가고 서류만 달랑 있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으실 텐데요?”

싸가지 없게 눈을 치켜뜬 녀석이 되묻는다.

대충 알고는 있지.

미쳤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이 자리에 앉히나.

내가 오기 전에 있던 녀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다.

사고를 쳤든지 장난질을 했든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당했겠지.

그리고.

‘나도 굴러온 돌이야. 그냥 놔둘 리가 없어.’

그 모든 것은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내가 녀석의 보디가드를 때려눕히고 능력을 증명했다고는 하지만 결국에는 외지인이다.

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쓰지는 못하는 반쪽.

단순히 회계 업무를 시킬 거면 다른 사람을 앉혔겠지.

아무래도 물품 쪽이 수상한데.

‘분명 도시에 얼굴이 팔리지 않는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어.’

외부인이 필요한 거다.

모종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툭툭. 책상에 손가락을 두드렸다.

망할 탑에서 하도 괴상한 짓을 많이 당했더니 이제는 느낌이 팍 온다.

‘버림패네.’

다르게 말하면 총알받이.

내게 사업장 2개를 준 거?

뽕 맛 좀 보라고.

여기서 나오는 막대한 수입이면 돈이 궁하던 이들은 눈이 돌아가겠지.

한번 쥔 거 놓기 싫어서 악착같이 잡을 거고.

그런데 말이지.

“나한테는 그런 게 필요 없는데.”

“예?”

“그냥 혼잣말. 부담스러운 얼굴 좀 덜 보게 절로 좀 가 있어.”

내 말에 얼굴을 구긴 길더가 뒷짐 진 채 벽 구석에 선다.

서류 뒷장, 납품할 곳과 물품이 적힌 장부를 챙겼다.

95층 클리어. 내게 필요한 건 이거다.

“순찰 한번 돌지.”

“탁월한 선택입니다. 이곳이 메인이기는 하지만 다른 술집도 상당히 화려한…….”

술집을 보여 주며 홀릴 생각인지 녀석이 반색한다.

그쪽도 둘러보기는 할 건데 그건 나중에.

“아니, 물류 창고 먼저 가려고.”

“거기는 나중에 가셔도 됩니, 다?”

-파각

주륵.

녀석의 뺨을 긁고 날아간 볼펜이 벽에 박힌다.

그대로 굳은 녀석을 보며 미소 지었다.

“간다고. 내가.”

이 녀석.

말이 너무 많다.

* * *

이곳에 도착하고 2주라는 시간이 지났다.

술집 운영을 하고 물류업을 했다.

확실히 주급은 상당했다.

이전에 10만 원가량 받았다면 지금은 거의 100만 원 정도.

대부분 술집에서 들어오는 현금이었다.

한 달에 400만 원가량.

현실에서도 많은 돈인데 이곳에서라면 말할 것도 없지.

덕춘이 식비를 빼면 나머지는 모아 뒀다.

‘그동안 물류 창고 위주로 살폈는데 이상할 건 없어.’

정확히는 다루는 물건이 너무 많았다.

식자재, 술, 의류, 생활용품 등등.

거기에 장물아비 노릇도 하는지 출처를 알 수 없는 귀금속이나 잡동사니도 많다.

수상한 물건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기우였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찝찝함이 사라지질 않는다.

“야.”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길더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여기 있는 물건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겠어. 그런데 이건 뭐야?”

손끝으로 서류 아래를 튕겼다.

다른 건 날짜와 장소가 명확한데 빈칸으로 있는 곳이 있다.

“급하게 물량이 부족할 때 배달할 것들입니다. 선 결제한 후 물건을 받아 가는 거죠.”

이곳에서는 보통 물건을 건네주며 계산한다.

그러다 보니 수중에 돈이 없을 때 물건을 못 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미리 금액을 넣어 두고 급할 때 넣어 둔 값만큼 물건을 받는다라. 머리 잘 썼군.’

일종의 보험.

다르게 말하면.

‘선입금할 만큼의 재력이 있다는 뜻.’

거래 순위가 높은 인물들이라는 뜻.

목록을 살피니 정기적으로 거래하는 인물도 섞여 있다.

일단 눈여겨봐 뒀다.

“지하상가에도 납품을 하나 보군.”

“예. 중요한 거래,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기는.

“여기서 미리 선입금할 만큼 돈 많은 곳이 몇 군데 있다고.”

2주 동안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지하상가에 대한 것도 알아봤지.

암상인들이 모이는 곳이랑 비슷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범죄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이용한 곳이라는 것 정도.

경비대도 따로 터치하지 않으니 반쯤은 양지에 나온 곳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정작 거기랑 직접적인 거래는 안 하고 있더라고.’

돈이 되는 곳인데 왜 그곳은 거래를 안 할까?

이유는 간단했다.

거래를 하고 있다.

내가 담당하고 있지 않을 뿐.

정황이 그러했고 내가 따로 알아본 바가 그랬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나도 나름의 카드는 준비해야지.

“조직에서 내 신뢰도가 이 정도뿐인가.”

“크흠, 그렇다기보다는 아무래도 들어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위에서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됐다. 서럽다, 서러워. 뼈 빠지게 일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네. 기껏 꼬여 있던 재고랑 밀린 원금 다 받아왔더니만.”

할 말이 없는지 녀석도 입을 다문다.

내가 일을 잘한 건 사실이라서.

겉으로 보기에는 번지르르했지만 하는 건 주먹구구식이다.

혼잣말인 척 한탄을 하고 있는 찰나, 조직원 한 명이 길더에게 다가와 뭐라 속닥인다.

[귓속말(S) Lv.MAX]

뭔 이야기길래 스킬까지?

잠시 이야기를 듣던 녀석이 내게 고개를 끄덕인다.

“지하상가와의 거래, 하시면 되겠습니다. 긴급 요청이 들어와서요.”

“아까 말한 그건가.”

“예. 물건 준비하겠습니다. 내일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그러지.”

지하상가.

나도 개인적으로 몇 번 가 보기는 했다.

목적은 하나.

대두상을 찾기 위함이었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정말 머리가 컸으니까.

원근법이 잘못됐나 의심할 정도로 말이지.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다시 만날지도 모르겠다.

그것보다.

“내일이라.”

그날은 세금을 내는 날이다.

NPC가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대가를 치르는 날.

슬쩍 옆에 다가온 길더가 작게 속삭인다.

“조금 위험할 수 있습니다만, 그동안 조직에서 해 준 것을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보상도 상당합니다.”

“그럼 네가 할래?”

“제게는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냉큼 한 발 빠지는 녀석.

구린 일을 한다는 걸 대놓고 말하네.

“물건 먼저 보지. 품질 검사는 해야 하니까.”

“이미 확인이 다 된…….”

녀석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들고 있는 볼펜을 흔들었다.

이미 한 번 당한 적이 있어서일까 입을 다물고 앞장선다.

물류 창고를 지나 허름한 건물의 지하로 향했다.

지키는 사람이 많은 것이 평범한 물건은 아닌 거 같고.

-끼이이익

거슬리는 소음과 함께 지하실 문이 열린다.

얼마나 개조했는지 지하가 2층까지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람?”

“상품입니다.”

넝마나 다를 바 없는 옷을 입은 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술집에서 봤던 손님도 몇 섞여 있다.

거기에 더불어.

“이, 이블아이! 이블아이 아닌가!”

“형님! 형니이이임! 저 빅튼입니다!”

쓰레기 마을에서 만난 녀석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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