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1화 95층
가장 큰 적이었던 에이션트 몬스터를 잡는 것으로 94층의 정리는 끝났다고 볼 수 있었다.
변수가 될지 몰랐던 동부의 성주는 메리뮬레와 미쳐 버린 드래곤 무리가 처리했으니, 남은 건 남아 있은 동부 숭배자들의 숙청뿐.
이번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으며 원한이 쌓인 북부와 남부의 전사들이 숭배자들을 완전히 밀어 버리며 끝을 맺었다.
무려 동부와 서부가 멸망해 버린 전쟁.
그 과정에서 생긴 피해도 적지 않았으나 분위기는 축제였다.
승리한 전쟁에서 모두가 축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거기! 고기 좀 더 굽자!”
“술! 술을 더 꺼내 와라!”
“어허이. 이건 내가 할 테니까 가서 한잔하고 있으라고!”
북부, 남부 할 것 없이 뒤섞여 즐기는 파티.
귀족들이 하는 연회도 뭣도 아닌, 천막을 깔아 놓고 음식을 내놓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 누구도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다.
이미 이들은 전쟁을 함께한 전우였고, 에이션트 몬스터와 동부의 숭배자라는 적에 대항해 하나로 뭉쳤던 이들이니까.
이전에는 서로 견제하고 싸우는 사이기는 했지만…….
‘북부랑 남부는 비교적 친한 편이라고 했었지.’
거리상의 문제도 있었을 거다.
아무래도 중앙의 드래곤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서 옆에 있는 동부와 서부와 마찰이 더 많았을 테니.
남부로 갔을 때 아델라와 갈리아스의 사이가 나름 친밀해 보였던 이유기도 하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것도 같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하나가 된 성주를 위하여!”
“역경을 이겨 낸 진정한 영웅들을 축하하라!”
둘이 결혼했다.
땀 냄새 물씬 풍기는 곳에 맞지 않게 꽃잎이 사방에 뿌려져 있던 것도 그 때문.
94층 통일.
아델라가 내걸었던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방식은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달랐지만 결과만 좋으면 됐지.
“정말 징하군.”
저 멀리 단상 위에서 함께 축제를 즐기고 있는 아델라와 외팔이 갈리아스가 보인다.
엘릭서가 효과가 있었는지 저번에 봤을 때보다 잘린 팔이 조금 더 길어졌다.
혼인식도 간단하게 올리더니 지금도 신혼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옷차림이다.
조금 편하게 입기는 했지만 흉갑에 클레이모어를 차고 있었으니.
그나마 갈리아스는 양반인가.
워낙 아델라가 뭐래 해서인지 장하게도 윗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 사람이 옷을 멀쩡히 입고 다녀야지.
“그에에.”
“또 왜 그래.”
괜히 심술을 부리는 덕춘이의 코를 톡 쳤다.
갈리아스가 부상을 입으면서 전체적인 균형이 북부 쪽으로 기울었다.
아델라가 초대 통일 성채 주인이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갈리아스가 귀찮아서 피한 느낌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냥 좀 더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 같다.
이전에도 머리를 못 굴리는 건 아니었지만 대충대충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던 놈이라.
이러나저러나 서로 만족해하니 다행이었지만.
“이블아이, 나와의 약속을 모두 지켰군.”
“즐기고 있어? 봐 봐라. 반 뼘 정도 더 자랐다, 악!”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아델라와 갈리아스.
뭉뚝한 팔을 휘젓던 녀석이 등짝을 맞고 몸을 비튼다.
뭐지, 이 탑에서 많이 봐 왔던 광경은.
측은한 눈으로 갈리아스를 슬쩍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쪽이 약속을 지킬 때야.”
“물론이다.”
아델라가 등을 돌린다.
따라오라는 뜻이었고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 유독 크고 튼튼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성채 통일- 돌발 퀘스트(클리어)]
퀘스트 보상을 받을 때가 됐다.
그녀가 꺼낸 상자.
투박하지만 튼튼했고, 떨어져 있음에도 느껴지는 열기가 있었다.
옆에 있는 건 유리로 만든 병.
양각으로 용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으니.
“드래곤 하트와 용의 피다. 내가 잡은 것들이지.”
“고맙군.”
보상을 받은 후 확인했다.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기대하고 있던 것들이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즛
눈앞으로 아이템의 정보가 떠오른다.
[드래곤 하트(SSS)]
-말할 게 있나요?
-그 유명한 드래곤 하트입니다!
-막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아이템!
-그냥 먹어도 최고의 영약이자 최고의 재료.
-활용법에 따라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등급부터가 SSS급에 달하는 아이템.
말마따나 먹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세부 내용을 살펴보니 단순 스텟뿐만이 아니라 신체 자체가 강화되고, 내장되어 있는 내성 스킬들을 얻을 수도 있다.
마력이 대폭 올라가는 건 말할 것도 없으니 밖에 있는 헌터들한테 판다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팔 수도 있겠지.
‘그럴 생각은 없지만.’
팔기에는 아깝다.
그렇다고 내가 먹기에도 좀 그렇다.
내성 스킬 대부분이 등급을 초월한 상태고 마력도 충분히 많다.
안개 질주와 같이, 일정 수치가 아닌 퍼센트로 마력을 갉아먹는 게 아니라면 파이어 밤처럼 마력을 많이 잡아먹는 스킬도 펑펑 쓸 정도니까.
‘원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 거래 수단으로 쓰는 게 좋을까.’
확실히 이 정도 물건이면 사람이든 NPC든 관심이 많을 거다.
포인트야 나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포인트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 물물교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것도 아니면 가공해서 장비나 특수한 뭔가를 만드는 방법도 있고.
‘미친 척하고 망구 아이템으로 만들어 버려?’
템빨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 자신한테 쓸 수 없다면 믿고 부릴 수 있는 노예, 가 아니라 파트너를 강화하는 것도 방법일 터.
망령인 망구의 특성을 이용하면 온갖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돌발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꽤 괜찮은 거 같아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아직 드래곤 하트 가공법도 모른다.
이건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고.
다음 물건.
[드래곤의 피(S)]
-드래곤도 피를 흘립니다!
-용의 기운이 담겨 있는 건 당연하죠!
-가끔 피를 마시고 용혈을 잇는 자도 있다고 하네요.
-영약과 포션의 재료로도 쓰입니다!
용혈이라 함은 드래고니안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용종 관련된 스킬이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도움이 될 거 같다.
그것도 아니면 포션을 만들 수도 있고.
이거면 엘릭서도 한 박스는 만들 수 있다.
“흐음.”
턱을 긁었다.
좋은 재료인 건 알겠는데.
“굳이 영약이나 포션 만들 때만 쓸 필요는 없겠지?”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생각이 났다.
그건 그거고.
“마지막 물건이 남았군.”
“그렇지. 스킬을 빼앗을 대상은 직접 정했으니 불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난 최초의 드래고니안을 잡기를 원했다.
아델라는 충실히 내 요구를 들어줬고.
상황이 긴박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메리뮬레와 인연을 만든 시점에서 다른 드래곤을 공격하는 건 말이 안 됐고, 일반적인 용종 몬스터를 상대로 쓰기에는 아쉬웠으니까.
네임드 몬스터면 그나마 나았지만.
“드래고니안이면 충분하고도 남지.”
역시 이쪽이 가장 좋았다.
내 미소에 피식 웃은 아델라가 스킬북을 건넸다.
“에이션트 몬스터라 그런지 제대로 된 설명이 없더군. 후반에 진화하면서 혼돈이 많이 끼어든 거 같다. 직접 확인해 보는 편이 좋겠어. 난 열 수 없거든.”
“네가?”
“보면 알 거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여는 것 추천한다. 혼돈이 깃든 물건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그녀의 말마따나 스킬북에는 아무런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다.
대신…….
[혼돈의 스킬북(???)]
-계기를 맞아 각성한 에이션트 몬스터의 스킬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혼돈에 잠식되었습니다!
-개봉 조건: 혼돈 수치 500점 이상.
-스킬 등급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개봉 조건만 하더라도 혼돈 수치 500점 이상.
내가 가지고 있던 카오스 박스도 이런 조건은 없었다.
물론, 카오스 박스야 혼돈의 파편을 잡으면 나오는 물건이니 소유자가 혼돈 수치를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기는 하다.
‘더불어 카오스 박스와 달리 이건 내가 직접 쓸 수 있는 스킬을 얻는 거고.’
적어도 꽝은 없다는 거다.
게다가 눈길을 끄는 것은…….
“스킬 등급이 없을 수 있다라.”
“간혹 그런 스킬들이 있다. 우리의 것은 아니야. 이계라 불리는 다른 차원의 스킬이지. 어째서 놈에게서 그런 게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알 거 같군.”
난 이미 이계 스킬을 가지고 있으니까.
검강과 업보 청산.
전자는 전투하는 데 강력한 파워를 보여 준다.
업보 청산은 쿨타임이 길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거의 확실하게 죽일 수 있다.
어디까지나 혼돈의 파편인 델버튼에게 당한 죽음을 상대에게 전하는 것이기에 델버튼보다 강한 사람이라면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러고 보니 이것도 쿨타임이 다 지났겠군.’
쿨타임이 9개월이라는 게 최대 단점인 스킬… 이었는데?
“뭐야. 이거 왜 이래.”
[업보 청산]
-사용 가능.
-쿨타임: 4개월
-혼돈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쿨타임이 반 토막 났다.
이것도 혼돈의 영향인가.
규칙을 깨 버리는 힘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세계 스킬에도 영향을 줄 줄은 몰랐다.
아마 90층에 올라와 혼돈의 파편과 에이션트 몬스터를 잡은 게 원인이 아니었나 싶다.
일정 수준을 넘어선 시점부터 혼돈 수치는 자기 멋대로 커지고 있었으니.
특히나 혼돈을 가지고 있는 상대를 잡으면 신나서 뺏어 오고는 했다.
찜찜하기는 하지만 좋은 거기는 하니까.
아무튼 상자깡은 따로 할 생각이다.
아델라의 말대로 혼돈이 붙은 건 조심하는 편이 좋았으니.
“받을 건 다 받았네.”
“바로 올라갈 건가.”
“아무래도 그편이 낫겠지. 여기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거잖아.”
“성채 복구부터 할 예정이다. 각 지역에 있는 성채의 연결로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고.”
“이왕이면 드래곤 산맥을 지나갈 수 있으면 더 좋겠지?”
“그건 불가할 터.”
“걔네 성격 더러워서 가만히 안 있을 텐데?”
내 말에 아델라와 갈리아스가 되묻는다.
보통 그렇긴 하겠지.
그런데…….
“가기 전에 선물이나 해 주려고. 내 부탁 잊지 마.”
내가 하면 좀 다르다.
녀석한테 받아 낼 수 있는 게 있거든.
덤으로 얘네한테는 부탁한 게 있다.
이후에 올라올 쁘찡 연합의 편의를 봐달라는 것.
비록 이들이 94층의 지배자는 아니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럼 이만 떠나지.”
천막 밖으로 나왔다.
나를 반기는 이들에게 인사를 나누고.
“이제 가는 거요?”
“그렇지. 고생 많았다.”
“꾸에에.”
미르바와도 작별을 고했다.
나한테 잡혀서 본의 아니게 고생을 많이 한 녀석.
“이건 무엇이오?”
“선물.”
녀석에게 용종 네임드 몬스터를 잡으며 얻은 피를 건넸다.
이걸 어디다 쓸지 몰라서 놔두기는 했는데, 듣자 하니 용종한테는 상위 종의 피나 고기가 좋다고 하더라고.
“와이번이 좋아할 거야.”
“오오! 보양식 같은 거군! 고맙소.”
고맙긴 뭘.
이어 박재경을 만났다.
녀석 또한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은 분명했으니.
“준비 다 했나 보네.”
“형씨도 올라갈 생각이우?”
포탈 앞에서 올라갈 채비를 하고 있는 녀석을 불렀다.
녀석과 인연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내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모르겠다.
워낙 자기 신념이 확실한 사람이라서.
그래도 친구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왕이면 다른 이들도 도와줄 수 있는 친구가.
“너 쁘찡 연합 들어올래?”
“아, 거기. 어떤 곳인지 알고는 있지.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들어와. 나도 거기 있고 다른 사람들도 나쁘지 않거든.”
이상하기는 하지만.
속으로 뒷말을 삼키며 품에서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드래곤의 피를 꺼내 던졌다.
냉큼 받아 드는 녀석.
“드래곤의 피로 만든 선지는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
“오오오오! 이 귀한 것을!”
“선물이니까 가져. 내가 말한 거 한번 생각해 보고.”
“흠흠, 이런 것으로 환심을 사려 하다니.”
얼굴을 구긴 박재경이 툭, 내 어깨를 쳤다.
“아주 제대로 봤수!”
“그 스승에 그 제자네.”
픽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요리 스킬을 배울 때도 이 녀석 스승한테 뇌물로 술을 주고 배웠는데.
스승이나 제자나 똑같았다.
* * *
드래곤 산맥.
94층의 중앙이자 지배자인 메리뮬레가 있는 곳.
용의 밤이 끝나며 이성을 되찾은 드래곤들이 각자의 둥지로 돌아가 회복에 전념했기에 나와 있는 건 나와 메리뮬레 둘뿐이었다.
“크흠, 그걸로 계산은 끝났다.”
“아쉽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고얀 놈. 감히 드래곤한테 드래곤 하트를 가공할 방법을 묻다니.”
“어허. 자고로 산지 직송! 전문가는 전문가한테!”
“세상 누가 자기 심장으로 만드는 것에 전문가가 된단 말이냐!”
“근데 알고 있었잖아.”
“그…….”
못마땅한 듯 입을 다문 녀석을 보며 킬킬거렸다.
릴카의 퀘스트를 통해 받아 낸 보상은 간단했다.
중량 팔찌를 대신할 아티팩트와 드래곤 하트 가공법.
이제는 구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드래곤의 비늘과 뿔, 이빨까지.
녀석이 가지고 있는 보물들도 눈에 들어오기는 했는데…….
‘그런 건 굳이 여기서 구할 가치가 없어.’
구하려고 작정하면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거다.
릴카, 화조국, 프램버그, 차원 상인까지.
내가 진짜 얻고 싶은 게 있다면 살 수 있다.
그에 반해 드래곤은 탑 안에서도 개체수가 극소수이고 부산물을 얻기란 심히 까다롭다.
그래서 챙긴 게 이것들.
더불어 쁘찡 연합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각 성채를 잇는 드래곤 산맥을 일부 개방해 달라 요구했다.
“차라리 보물이나 가지고 갔으면 속이 편했겠군.”
“오, 주면 가져가고.”
“말이 그렇다는 거다!”
“나도 알지. 농담인데 화를 내고 그래.”
“릴카나 네놈이나 상인이란 놈들은 죄다 그 모양인지.”
쯧. 혀를 찬 메리뮬레가 턱을 까딱인다.
포탈이 열려 있다.
94층을 클리어하며 열린 포탈의 위치로 이쪽으로 끌고 온 것.
다시 포탈 있는 곳으로 가기 귀찮아서 말해 봤더니 진짜 해 줬다.
보기 징그러우니 얼른 가라는 축객령이겠지만.
“잘 있으라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포탈로 향했다.
내가 이곳에서 보상을 얻고, 박재경을 영입하며, 무구를 만들 재료를 얻는 이유.
‘95층에 플래티넘 등급이 있다.’
놈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95층에 진입합니다.]
-우우우우웅
빛과 함께 울리는 공간.
얼마 지나지 않아 발에 땅이 닿는 감촉이 들었으니.
“오셨습니까, 고객님!”
“…갈매기?”
나를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탑의 우체국.
갈매기 소속의 갈매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