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화 출장
94층 남부.
아델라와 갈리아스를 주축으로 미쳐 날뛰는 용종을 상대하는 곳은 그야말로 처절함의 장이었다.
제대로 쉴 여유도, 밥을 씹어 삼킬 틈도 없다.
땀과 피. 입에서 나는 단내와 뼛속까지 시린 통증만이 살아 있음을 상기시킬 뿐.
입에 들어오는 흙먼지를 넘기며 검을 휘두른다.
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몬스터가 내뱉는 불길이 밤하늘을 밝혔다.
“후우. 후.”
그나마 두 사람이 에이션트 몬스터, 태초의 드래고니안을 상대하고 있어 이 정도.
사방을 에워싼 강화된 용종들과 동부에서 지원 온 이들의 창칼 앞에 모두가 악을 쓰며 싸움을 이어 나갔다.
지독하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분명 같은 NPC일 텐데도 동부에 속한 이들은 악의를 가지고 공격을 해 댔으니.
그 손속에는 기사의 신념도, 전사의 자긍심도 없었다.
부하를 소모품으로 갈아 넣고, 드래곤 나이트가 길렀을 용종을 풀어 버렸다.
자신의 와이번을 가족처럼 여기는 미르바가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이를 악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아델라와 갈리아스를 도우러 온 이들 또한 좋지 않은 미래를 그리며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동부 놈들이 원하는 건 뻔했다.
타고 온 그리폰과 길들인 몬스터들을 최우선으로 죽인 것만 봐도 확실했다.
고립.
“아델라 성주님! 잠시 물러서야 합니다!”
“너무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뒤쪽이 쳐지면 고립됩니다!”
“시끄럽다! 여길 막지 않으면 후방은 전멸이야!”
부하들의 요청에도 아델라는 검을 내리지 않았다.
최초의 드래고니안. 녀석은 용의 피를 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드래곤은 아니다.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말.
오히려 용의 힘을 가진 또 다른 괴물.
드래곤이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에서 보면 드래곤 슬레이어와 비슷한 방향성에 있는 자였다.
문제는…….
“크르르르르.”
“그가가가가!”
용의 밤이 되어 네임드 몬스터가 된 용종을 부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
백 보 양보해서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에이션트 몬스터 아니던가. 몬스터를 부리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놈 또한 드래곤의 피가 흘러 용의 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버프는 버프대로 받고, 아델라가 가진 칭호의 효과는 교묘하게 피해 갔다.
‘조금만 더 변이되면 칭호 효과가 살아날 것인데.’
아델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 비교하면 태초의 드래고니안, 카트란 할리우의 모습은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기존에는 눈동자나 특질과 같은 부분만 용의 것을 따랐다면 지금은…….
“꼴을 보니 이족 보행 도마뱀이나 다를 바 없구나.”
“네 꼴은 피에 절은 생쥐 꼴이군.”
얼굴까지 올라온 비늘이 몸을 보호했고, 발달한 손과 돋아난 손톱은 강철과도 같았다.
사람의 것이 아닌 송곳니로 가득한 주둥이와 갑옷을 뚫고 자라난 굵직한 꼬리.
소름 끼치는 건 이만큼 변이했음에도 이성을 여전히 유지 중이라는 것이었다.
드래곤조차 용의 밤에는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과연 반은 사람이라는 것인가.
“이만 끝내는 것이 어떠냐, 용살자여.”
“네놈 또한 반은 드래곤. 아직 그런 놈은 죽인 적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목을 베겠다.”
-퉁
땅에 꽂았던 클레이모어를 뽑은 아델라가 담담히 말했다.
기세 좋게 말했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부하들의 몸은 이미 탈진 직전.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며, 가장 도움이 되어야 할 남부의 왕 갈리아스는…….
“이거 죽겠는데.”
“지혈이나 마저 해라.”
“친절하기도 하지. 반하겠어.”
“…팔은 내가 어떻게든 다시 자라게 하겠다. 약속하지.”
왼쪽 어깨 아래가 시원하게 날아갔다.
영악한 드래고니안이 변이하는 동시에 기습적으로 덤벼들었고 팔을 물어 버리는 동시에 브레스를 뿜었다.
피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 갈리아스는 스스로 팔을 잘라 몸을 피했고.
그 모든 것은 아델라를 노리고 한 것이었다.
아델라는 그가 더 이상 변이하지 못하도록 하는 억제제였으니.
중간에 갈리아스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당하는 건 그녀였을 것이다.
[칭호, 드래곤 슬레이어를 불러일으킵니다.]
[칭호가 상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합니다.]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 칭호.
아델라가 천천히 클레이모어를 들어 올렸다.
어느덧 퇴로는 막혔다.
방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녀가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동시에 북부 남부 연합군이 전멸하게 될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서 포기했다.
어찌 보면 그저 전멸을 조금 더 늦추는 것에 불과할지 몰랐지만.
“오라.”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SSS급 권능, 북방의 별이 함께합니다!]
[칭호, 괴물 사냥꾼이 번뜩입니다!]
[단 하나의 의지(SSS) Lv.MAX]
[군주의 검(SSS) Lv.10]
-우우우우웅
아델라의 검이 울린다.
“쓸어버려라.”
드래고니안 카트란이 손을 뻗었다.
수백의 퍼스트 몬스터.
12마리의 네임드 몬스터.
그를 돕는 100여 명의 동부 숭배자.
“크아아아아아!”
“크르르르!”
“놈들을 죽이고 끝을 봐라!”
그들이 일제히 달려온다.
그리고…….
“출장 왔습니다, 고갱님───!”
그들의 머리 위로 무지개를 타고 온 이블아이가 뛰어내렸다.
* * *
무지개다리를 타고 넘어오면서 본 전장은 난장판이었다.
내가 상대했던 곤충 놈들이랑은 수준이 달랐다.
용의 밤을 직격으로 받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으니까.
아델라와 갈리아스의 상태도 최악이었다.
설마 드래고니안을 상대로는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가 안 터질지 몰랐지.
그래도 다행이다.
“늦지 않게 와서.”
-꽈아앙!
-쿠우우웅!
“억! 다리 저려.”
“뭐 얼마나 높은 곳에서 뛰었다고. 참아, 최강의 요리사.”
“높은 곳이랑 요리랑은 별 상관이 없수.”
적진 한가운데로 착지한 나와 박재경.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지만 그것도 찰나.
대규모 몬스터 무리가 일제히 아가리를 벌려 브레스를 뿜으려 한다.
어두운 밤, 백여 개의 브레스가 모이는 광경은 흡사 수많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장엄했으나.
“어허! 어딜 밥상머리 앞에!”
내 호통과 함께 공간이 찢어졌으니.
[헬다잉 출장 뷔페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페셜 오더 셰프 퍼펙트 코스!]
[완벽한 맛과 서비스가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빰빠라밤!
-빰빰빠바밤!
팡파레와 함께 깔끔하고 격식 있는 복식의 헬다잉 키친 요리사들이 등장했다.
동시에 서비스를 담당하는 이들까지 검은 정장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고 그 중앙에는…….
“헬다잉 키친의 대표이자 오너 셰프, 브루헴입니다.”
헬다잉 키친의 대표이자, 최고의 요리사 브루헴이 있었다.
오너 셰프임을 증명하는 배지를 찬 채 가볍게 손뼉을 쳤으니.
“지저분한 건 청소하세요.”
“최고의 서비스를!”
집사뿐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등장한 재료 수급팀, 청소팀이 일제히 움직였다.
번쩍.
섬광이 일었다.
몬스터 사이로 무언가가 번뜩인다 싶으면 피가 솟구쳤고, 브레스가 뿜어지려 하면 용종의 머리가 돌아가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화려한 불 쇼처럼, 가끔은 폭죽처럼 쏟아지는 불꽃과 빛무리.
[음성 차단(SSS) Lv.MAX]
브루헴이 손가락을 튕기자 고요가 감돌았고.
-우우우웅
어느새 자리를 잡은 음악단이 연주를 시작한다.
정장을 입은 이들이 테이블을 세팅하고, 요리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미리 준비한 요리를 꺼내온다.
“앉으시지요.”
“어, 어어?”
“이런. 이분은 다치셨군요. 식사에 불편함이 없도록 옆에서 시중을 들겠습니다.”
“응? 아. 어. 고맙다.”
얼떨떨한 표정의 아델라와 갈리아스가 자리에 앉는다.
클린과 샤워로 몸을 깨끗하게 만든 건 덤.
정신없이 싸우던 미르바와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
전장 속 갑작스러운 출장 뷔페.
난데없는 상황에 머리가 멈췄는지 멀뚱히 서 있었으나, 숙련된 헬다잉 키친의 직원들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었고.
“코스 순서가 있지만 고객님의 요청이 있어 약식으로 이루어지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바로 메인 요리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도 돕겠수다.”
“오늘은 손님이니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박재경의 도움을 거부한 브루헴이 신속하면서도 화려하게 요리를 시작한다.
이미 테이블에는 애피타이저와 간단한 요리와 음료가 마련된 상황.
“이, 이블아이. 이게 무슨. 아니! 지금 이럴 때가!”
“잠깐 쉬고 있어. 그냥 하는 거 아니니까. 목부터 축이고.”
발작하듯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아델라의 어깨를 누르며 앞에 놓인 뱅쇼를 건넸다.
찌푸린 얼굴로 불만을 표시하더니 이내 단숨에 뱅쇼를 들이켠다.
“마셨으니 이제……!”
입가를 닦은 아델라가 멈칫한다.
놀란 눈으로 자신의 몸을 살피는 걸 보니 효과가 좋나 보군.
“따뜻하지? 피로도 좀 풀리고.”
“설마 여기 있는 것 전부.”
“맞아. 옵션 붙은 것들이야. 피로 해소, 혈액 공급, 다른 내성이나 보조 능력치 등등.”
무려 헬다잉 키친의 대표가 직접 움직이는 코스 요리다.
음식이 평범할 리가 없지. 애초에 말해 놨다.
보양식, 그것도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오는 것들 위주로 해 달라고.
“밖은 걱정 마. 여기 서비스는 최고니까.”
박재경이 확인시켜 줬다.
브루헴의 최종 등반층은 98층.
그를 중심으로 각 업무를 책임지는 직책자들의 등반층은 96층에서 97층.
한낱 요식업체라고 보기에는 과할 정도의 전력이라 볼 수도 있었으나.
‘이 정도 되니까 박재경이 재료 수급팀 따라서 90층대를 돌아다닌 거지.’
애초에 제대로 된 계산을 하지 않으면 예약자를 두들겨 패겠다고 말하는 곳이 헬다잉 키친이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지.
것보다…….
“팔이 나갔군.”
“뭐, 그렇게 됐지.”
갈리아스한테 엘릭서를 던졌다.
거기에 이어 히든 가든의 레시피로 만든 영약까지.
“영혼 타격은 없어 보이니 자라날 거야. 완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그냥 잘린 거라면 엘릭서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보아하니 에이션트 몬스터한테 당한 상처다.
에이션트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느낀 게 하나 있는데 이놈들 재앙의 파편만큼은 아니더라도 혼돈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태초의 괴물이 되어 버린 놈들이니 혼돈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상처에 남아 있는 혼돈이 치유를 거부할 건 뻔하다는 말.
갈리아스는 사실상 전투 능력이 떨어진 상태고.
저기 밖에 있는 녀석은…….
“───!”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 아직 팔팔해 보인다.
원래 저렇게 생겼나 싶었는데 권능을 통해 보니 용의 밤을 이용해 스스로를 강화한 모양.
헬다잉 키친이 식사에 방해되지 않도록 주변 놈들을 정리하고는 있었지만 그게 토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잠시 쉴 시간을 주는 것뿐이지.
근처에 다가오지 않으면 상대할 이유가 없다.
물론 헬다잉 키친이라도 무리한 걸 할 수는 없기에 제한 시간은 있다.
‘최대 3시간.’
약속된 시간이 지나면 헬다잉 키친은 돌아간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가 길목을 차지하고 있으니 후방으로 넘어가는 놈들이 없다.
후방에서는 알아서 잘 처리해 줄 것이고.
“3시간. 그때까지 최대한 회복해.”
초인인 이들에게 3시간은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같이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그건 안 될 거 같다.
에이션트 몬스터들은 약아빠진 면이 있어서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내가 맡아 주지.”
“혼자서는 무리다.”
“괜찮아.”
아델라의 걱정에 난 고개를 저었다.
“얘들도 같이 가니까.”
옆에 있는 박재경의 어깨를 쳤다.
일단 한 명.
그럼 나머지는?
눈을 끔뻑인 이들이 내가 응시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떨그렁
나와 눈이 마주친 미르바가 숟가락을 놓쳤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오?”
반쯤 울먹인 미르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