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44화 (644/740)

644화 해금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죽을 때가 됐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사람을 고쳐서 쓰는 거 아니라는 말이 생기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숭배자들은…….

“대쪽 같은 녀석들. 어째 얘네는 한결같냐. 통일성 있어서 보기 좋다 야.”

“그에에.”

어떤 놈이든 하는 짓이 명확해서 참으로 알기 쉬웠다.

어디서 무슨 방법을 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비롯한 등반가들, 더 나아가 그 사이에 끼어 있는 NPC를 방해한다는 건 똑같다.

달리 말해 우리가 피해 볼 만한 것들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면 놈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처럼.

“망할 동부 놈들 같으니. 북부는 드래곤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꾸깃. 내게 전달된 급보를 구겼다.

내용은 간단했다. 아델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 동부 놈들이 북부로 쳐들어왔다는 거였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지금 북부는 빈집이니까.

아델라도 아델라지만 나 또한 서부에 있는 에이션트 몬스터를 잡으러 왔다.

북부에 성주급 인물이 아예 없다는 것.

동부 입장에서는 맛있는 식사로 보였을 거다.

실제로는 미친 드래곤들이 기다리는 곳이었지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진짜 미친 드래곤들이지.

“미친개는 주인도 문다는데 미친 드래곤은 어느 정도일까?”

“그에에.”

릴카가 만든 수면 안대를 찬 덕에 메리뮬레는 용의 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드래곤은 여전히 야성에 날뛰고 있지만.

난 그에게 동부를 막아 줄 것을 요구했고, 제정신이 아닌 드래곤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자 그냥 풀어 버렸다.

기생종에 감염되지 않도록 주둥이에 입마개를 채우고 말이다.

반쯤 미쳤어도 드래곤은 드래곤.

강인한 육체와 상식을 뛰어넘는 마법으로 재앙과도 같다.

정작 드래곤의 상징은 재갈 물린 대형견과 같은 처지라 쓰지 못하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중에 정신이 들면 이게 무슨 수치냐며 징징거리겠지만 별수 있나. 꼬우면 맨정신으로 있었어야지.

아무튼 미친 드래곤들에 의해 동부는 실시간으로 박살 나고 있으니 걱정을 덜었다.

기울던 힘의 균형이 중앙 산맥의 드래곤을 끌어들이면서 맞춰졌다.

남은 건 평행으로 돌아온 무게 추를 더욱 기울이는 것.

내가 서부에 온 이유이기도 하다.

“기생종 녀석, 잡히면 진짜 죽었다.”

용종을 내뱉는 남부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는 하나 무작정 놔둘 수는 없는 법.

잠재적인 위험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위험했다.

‘방심할 수는 없어.’

대비하기는 했지만 드래곤이 재감염될 수도 있고, 설사 그러지 않더라도 다른 감염체들이 남아 있다.

나로 인해 원래 목적이었던 드래곤을 완전히 감염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럼 남은 감염체들은 어디로 향할까?

어디긴 어디야. 북부는 남부든 사람들을 공격하러 가겠지.

가뜩이나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남부 쪽 상황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델라가 있으니 어떻게든 해결하리라 믿는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타이밍.

“어이, 형씨. 저쪽인 거 같수만?”

박재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보다 먼저 서부로 온 녀석은 서부에 머물며 특수 게이트가 있을 만한 곳들을 살폈고, 서부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구체적인 위치를 가늠했다.

그 결과 추려진 후보군이 4군데. 그중 2곳을 들렀고 이번이 3번째 후보였는데…….

“저거 같지?”

“그렇구만.”

우리는 단번에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 거리가 있는지 게이트가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그르르르륵.”

“키륵. 키그륵.”

“우으. 으으으.”

몬스터, NPC 가릴 것 없이 척 보기에도 강해 보이는 감염체들이 있었고.

그 뒤로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종류의 몬스터들이 있었다.

곤충형 몬스터. 초대형종으로 보이는 벌레도 있었고, 사람과 뒤섞인 듯한 형태의 괴물도 있었다.

야수형 몬스터와는 또 다른 종류의 살벌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으니.

[퍼스트 인섹트리안]

-8성급 충인종 몬스터.

-곤충 형태의 인간이라기보다는 인간 형상의 곤충에 가깝습니다.

[퍼스트 메가 맨티스]

-8성급 초대형 몬스터.

-재앙, 메스토카의 조상입니다.

[퍼스트 정령 벌레]

-8성급 몬스터.

-자연 생성 정령이 깃든 벌레.

-그 형태가 다양합니다.

단순히 기생종만 있는 줄 알았더니만 이제 보니 그냥 벌레왕이었다.

강력해 보이는 동시에 기괴한 뿔과 역관절, 갑주들이 우글거리니 그 생소함과 기묘함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특히 저거.

두툼한 허벅지의 다리로 굳건히 땅을 딛고 일어선 녀석. 승모근과 함께 달린 등딱지와 투구 장식처럼 매끈히 뒤로 넘어간 한 쌍의 더듬이.

‘냥펀이 봤으면 기겁했겠군.’

바퀴벌레 싫어하는 거 같던데.

저것도 밟으면 터질까. 궁금한데 확인하기는 싫은 기묘한 감각.

8성급들 앞으로는 7성급 퍼스트 몬스터들이 바글거리고 있다.

비교적 덩치가 작은 놈들이 여러 개의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기어 다니니, 땅에 파도가 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동안 어째서 용종 퍼스트 몬스터만 발견됐나 했더니만 곤충형 몬스터들은 따로 뒤에서 힘을 모으고 있던 모양.

심지어 독립적으로 날뛰는 놈들과 달리 이 녀석들은 집단으로 움직이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아무리 7, 8성급이라도 이 정도 물량으로 집단전을 하면…….

“츄릅.”

“츄, 뭐?”

상념을 깨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왜 침 닦아 이 자식아. 빨리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해 줘.

내 눈빛에 험험, 헛기침을 한 녀석이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곤충은 미래 식량 자원이라는 말 들어 봤수?”

“…들어 보긴 했다만.”

“어릴 때 할머니가 메뚜기 잡아서 구워 주셨지. 고소하니 맛있수다. 요즘엔 그런 거 안 먹지만!”

-쿵

한 손에는 창을. 다른 한 손에는 중식도를 쥔 녀석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맛을 아는 자들에게는 별미지! 자고로 최강의 요리사가 되려는 자는 자급자족, 현지 공급을 기본으로 하는 법! 이번에 괜찮은 구상이 떠올랐수!”

“어, 어. 그래.”

눈깔이 살짝 돈 거 같은데 괜찮은 건가.

새로운 식자재의 발견에 흥분한 거 같으니 일단 옆으로 빠져 있자.

나 또한 요리 스킬을 많이 찍었지만 미친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떨떠름하면서도 나 역시 검을 꺼내 들었다.

이런 놈들이 모여 있다는 건 놈들의 주인인 에이션트 몬스터가 있다는 뜻이니까.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건가.

-끼이이익

기묘하게 생긴 괴물이 비틀어진 관절을 이끌며 앞으로 나섰다.

외갑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통에 파리의 머리가 달린 녀석의 턱이 가로로 찢어진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내 친히 협력을 요청했거늘.”

“하이 링크 패러사이트로군.”

아델라가 말했었다.

기생종에 특수한 놈이 있고 그놈을 통해 에이션트 몬스터가 대화를 걸어왔다고.

나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본체가 아닌 저게 나왔다는 건 아직 본체는 게이트 안에 있다는 뜻이겠지.

‘다행이야.’

아델라가 간 남부의 게이트가 터졌다고 들었다.

용의 밤 때문에 안에 있던 몬스터들이 폭주해서 생긴 결과라고 하지만 이쪽이라고 다를까 싶다.

기생종을 이용해 엄청난 수의 퍼스트 몬스터들을 내보냈다.

게이트 밖으로 내보낼 몬스터가 부족해지면 특수 게이트는 터지고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나온다.

에이션트 몬스터를 포함해서 말이지.

만약 녀석이 밖으로 나온다면…….

‘추적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벌레 같은 놈이 아니라 진짜 벌레라 어디 처박혀서 자기 수하들만 움직이면 찾을 방법이 마땅치가 않다.

그러니 게이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확실히 끝을 봐야 한다.

툭. 박재경의 어깨를 쳤다.

“정면 돌파? 아니면 각개격파?”

“이 정도 양이면 조금 손상되더라도 남는 게 더 많겠지. 전자로 합시다, 형씨.”

“좋은 생각이야.”

-콰앙!

-쿠궁!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박재경이 창을 내지른다.

[관통(SSS) Lv.3]

[내부 비틀기(SS) Lv.4]

[파고드는 송곳니(SS) Lv.6]

[도축(SSS) Lv.4]

.

.

.

-콰르르르릉!

흡사 번개가 치듯 외갑에 충격을 받는 몬스터들이 불똥을 튕기며 터져 나간다.

짧은 일격에 담은 스킬만 6개.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스킬 중첩을 사용하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이전보다 훨씬 깔끔해진 걸 보니 요리하느라 실력이 녹슬었을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 같다.

그럼 나도 날뛰어 보자.

“벌레 타입은 불에 약하지.”

유구한 전통이다.

[파이어 밤(SSS) Lv.6]

[파이어 밤(SSS) Lv.6]

[파이어 밤(SSS) Lv.6]

.

.

.

앞으로 질주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놈들의 몸이 터지고 익어 갈수록 박재경의 말마따나 고소한 냄새가 나서 기분이 미묘했다.

고소한 전장이라. 적응 안 되게.

내 감상과 달리 이 상황을 반기는 녀석도 있었으니.

“그헤헤헤.”

덕춘이가 방긋 웃으며 앞으로 뛰쳐 나간다.

어지간하면 귀찮아서 직접 나서지 않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하. 진짜 천적은 따로 있었군.”

내가 굳이 서부로 온 이유.

내게는 기생종을 막을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박재경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거고.

하지만 진정한 천적은 따로 있었다.

“개구리는 곤충을 먹어!”

콰직!

덕춘이가 알맞게 익어 버린 멘티스맨의 뒷다리를 덥석 문다.

개구리 하면 곤충을 잡아먹는 포식자 아닌가?

매섭게 손바닥을 들어 올린 덕춘이가 몬스터 무리에 몸을 던졌다.

-짜악!

-짜아아아악!

채찍으로 때린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들릴 때마다 고개가 돌아가는 몬스터들.

꼴에 곤충이라고 머리가 날아가도 멋대로 움직였으나, 앞도 못 보는 놈을 기다리는 건 내가 쏟아 내는 파이어 밤뿐이었다.

덕춘이가 꼭지 따고 내가 익히고.

“이것도 추가하면 좋겠군!”

-파바바밧!

박재경이 끼어들어, 아니. 간단한 조리를 끝내는 동시에 덕춘이가 냉큼 받아먹는다.

이 모든 것이 이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 단 1초.

“그헤헤헤!”

만족하는 듯 크게 웃은 덕춘이를 보며 퍼스트 몬스터들이 움찔한다.

8성급 고대종이 7성급을 팔꿈치로 찌르며 눈치를 줬지만 고개를 흔들며 뒷걸음질 칠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다 보면 새로운 레시피 하나 얻겠군.”

“암! 괜찮은 걸 만들려면 수백 번의 시도를 해야 하는 법이지!”

불끈, 근육을 부풀린 박재경이 힘차게 뻗어 나갔다.

“식재료도 넘치겠다, 먹을 손님도 있겠다. 여기가 천국 아님 뭐요!”

“그거 맞는 말이네.”

어차피 뚫고 가야 하는 길, 덕춘이라도 배불리 먹이면 이득이지.

전진하면 할수록 나와 박재경의 손이 빨라졌고.

“그에에에!”

그에 맞춰 덕춘이가 가지고 있는 고유 능력을 발휘했으니.

-촤라라라랍!

-슈륵, 탑!

그야말로 폭식과 혀 놀림의 콤비네이션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런 내게 떠오르는 메시지.

[펫, 덕춘이 고대종의 에너지를 흡수했습니다!]

[성장이 임박합니다!]

한동안 멈춰 있었던 덕춘이의 진화 소식과.

[파이어 밤(SSS) Lv.6]

[스킬 레벨업!]

[파이어 밤(SSS) Lv.7]

[SSS급 권능, 스킬 합성이 해금됩니다!]

[시스템적 제한이 풀립니다!]

“오오오오! 드디어 풀렸냐!”

90층대, 과도하게 혼돈을 이용해 성장한 대가로 먹은 페널티가 풀렸다는 내용이었다.

그래. 94층까지 왔으면 풀릴 때 됐지.

이날을 위해 등급 업 시킬 스킬들도 다 골라놓은 참이다.

거기에 스킬 레벨 제한도 풀렸으니 대지를 새까맣게 물든 몬스터 떼가 다르게 보였다.

“으흐흐흐.”

“그헤헤헤.”

“하하하하!”

내게는 경험치로.

개구리에게는 먹이로.

요리사에게는 식재료로.

광기 어린 눈빛을 번뜩이는 우리를 보며 에이션트 몬스터의 말을 전하던 객체가 부르르 떨었다.

“저, 저저! 미친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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