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42화 (642/740)

642화 부탁으로 왔다

나는 오필리아를 가리키고, 오필리아는 나와 드래곤을 살피고, 드래곤은 나를 노려보고 있다.

처음 목적대로 산맥에 있는 드래곤과 오필리아를 만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분위가 안 좋네. 그러니까 살살하자니까.’

쿡, 덕춘이를 찔렀다.

짧게 울며 내 손가락을 쳐 내는 덕춘이.

일단 나의 재치로 오필리아를 끌어들였으니 계속 나아가 보자.

“동부에 숭배자 집단이 있다는 이야기는 고맙군.”

“예? 그런 이야기는, 박재경을 만났군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아니……!”

일단 발뺌했다.

자고로 구라를 쳤다면 밀고 나가야 하는 법.

오필리아 또한 내가 그냥 인정할 거 같지 않으니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다.

“메리뮬레 님,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기는 하지만 저와 인연이 있는 자가 맞습니다.”

“이리 과격하고 무식하며 예의라고는 전혀 없는 자가 말이냐?”

“괴상하고 인격적인 문제가 있지만 잔정이 많으며 많은 사람을 구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광자의 변덕으로 보인다만 그대가 그리 말한다면 그렇겠지.”

뭐지, 대놓고 뒷담 당하는 기분은.

앞에서 했으니 앞담인가.

아무튼 산맥을 불태운 일은 어떻게 넘어간 모양이다.

잠시 분위기가 누그러지길 기다린 후 입을 열었다.

“위로 올라가려는 것이겠지?”

“그걸 어떻게 알았죠?”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사실 모른다.

그저 오필리아가 이끄는 로얄 나이트들이 정석적인 방법과는 다르게 등반하고 있다는 것만 알 뿐.

내가 어디까지 아는지 눈을 살짝 찌푸리며 가늠하던 오필리아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왜냐…….

[SSS급 권능, 속삭이는 작은 빛이 당신의 마음을 묻습니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윙크합니다.]

그녀의 권능으로도 나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나 또한 오필리아의 정보를 살폈다.

[오필리아 글렛]

-최고 등반수: 94층

-닉네임: 갓블레스

-탑 공략 결사대, 노블 나이트를 이끌고 있습니다!

-SSS급 권능, 구원자 보유.

-SSS급 권능, 기적의 파편 보유.

-SS급 권능, 속삭이는 작은 빛 보유.

.

.

.

속으로 감탄했다.

오필리아 글렛. 자칭 인류의 구원자. 동시에 정말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 중 하나.

언제 밖으로 나갈지 모르는 나와 달리 확실히 밖으로 나갈 방법이 있었고.

‘권능 3개가 전부 SSS급이 되었군. 게다가…….’

-SSS급 권능, 멸망을 벗어난 세계의 선물 보유.

못 본 사이에 권능이 더 늘었다.

저거 말고도 자질구레한 권능이 더 있는 것을 보니 그녀를 계승자로 삼은 NPC들이 한둘이 아닌 모양.

나야 탑을 오르라는 히든 퀘스트 조건 때문에 계승권이 3개로 제한되지만, 이론상으로는 등반가가 가질 수 있는 권능의 제한은 없다.

기본적으로 각성하며 얻는 권능을 제외하더라도 NPC의 계승자가 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능을 얻을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오필리아는…….

‘100층에 오를 수 있도록 탑의 NPC들이 작정하고 밀어주는 사람.’

그렇게 볼 수 있었다.

NPC들이 새로운 기회를 얻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게 이거.

자신의 계승자가 100층을 클리어하는 것이었으니.

애매하게 계승자를 뽑느니 NPC들이 힘을 합쳐 한 명을 제대로 강하게 만들겠다는 거다.

어중간한 인물 여럿보다는 확실히 강한 한 명이 더 가능성 있을 테니까.

게다가 저건.

-SS급 권능, 다섯 문명의 끝을 지켜본 드래곤 (동화율: 3퍼센트)

드래곤이 건네준 권능이 분명했다.

아직 동화율이 낮아 SS급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SSS급까지 오르겠지.

저걸 준 녀석은 보나 마나 앞에 있는 에이션트 드래곤 메리뮬레일 것이고.

이제야 알겠다. 어떻게 오필리아가 이토록 빠르게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건지.

‘계승한 NPC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운 거겠지.’

특히나 90층대와 같이 한 층의 지배자가 있는 곳은 더 그럴 것이다.

지배자의 권한으로 위로 올려보낼 수 있을 테니까.

SSS급 권능, SSS급 권능이 될 예정인 것까지 합치면 무려 4개.

사람마다 강해지는 방법은 다양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등반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 드래곤이 94층의 지배자였어.”

“맞습니다. 저는 위로 올라갈 생각이에요. 지구의 멸망이 가속되는 지금, 탑에 오래 있을 여유가 없으니까요.”

그녀가 유독 서두르는 이유.

로얄 나이트는 빅스타 길드를 비롯해 다양한 곳의 지원을 받는다.

바깥소식 정도는 어떤 식으로든 뽑아냈겠지.

미국은 땅덩이가 넓고 사람이 많은 만큼 탑의 초대를 받은 이도 많다.

당장 하위층을 오를 때도 국가별로 채널이 나뉘어 있지 않았던가.

이준석이 알아본 바로는 로얄 나이트에 협력하는 단체가 빅스타 길드 말고도 더 있었다.

인도와 유럽권에도 있다고 했으니 정보량만 따지면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거다.

“재앙이 6개 나타났어요.”

“그렇게나?”

60층대에 있던 재앙.

내가 겪은 것만 하더라도 9개다.

6개면 절반 이상이 넘어왔다는 뜻.

“그중에는 우리가 마주치지 못한 것도 존재한다는군요.”

“탑이 늘 그렇지.”

언제나 다양한 방식으로 엿을 먹이고는 했으니까.

한국이야 그나마 90층까지 오른 오징혁과 김소담을 비롯해 상위층까지 오른 연합 사람들이 제법 있으니 다행이지만 다른 곳은 어떨지.

연합에 외국 출신 등반가도 늘어나기도 했고, 오필리아 또한 그들을 도왔기에 어느 정도 대비는 했을 거다.

공략법을 아는 이들이 있다는 것.

물론 그들은 소수이고, 그들이 속한 나라는 해외로 파병 나가는 것을 거부할 게 뻔했다.

괜히 나갔다가 죽거나 그 나라에 귀화하면 답이 없으니까.

“쁘찡 연합에서 도움을 많이 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아요.”

더불어 6성급 이상의 몬스터도 출몰이 잦아졌다.

소문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하와이 쪽에 특수 게이트로 추정되는 것도 발견되었다고.

이건 좀 문제인데.

다른 건 몰라도 특수 게이트는 놔두면 피해가 커진다.

“재앙이면 어떤 것들이지?”

“무너지는 돌탑과 소원 들어주는 연못, 레비아탄, 메스토카, 옥토 선생, 하나는 파악 중이에요.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괴현상을 가지고 있는 게 둘.

영물에 가까운 게 둘.

남은 하나는 뭔지 모르겠고. 아마 다른 멸망한 세계에서 나타난 재앙 중 하나겠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그나마 소원 들어주는 연못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으니 접근만 안 하게 하면 괜찮을 텐데.

잠깐만…….

“옥토 선생?”

내가 아는 그 옥토 선생?

운석을 떨구는 미친 토끼?

같은 재앙이자 타락한 영물인 쌍두귀도 엉엉 울면서 한발 물러서는 게 옥토 선생이다.

재앙끼리의 서열을 매긴다면 당당히 최상위를 차지하는 녀석.

심지어 수인족인 토인족의 시초이기도 했으니 반쯤은 에이션트 몬스터에 한 발 걸친 영물인데.

‘걔 내 소유잖아?’

녀석과의 내기를 통해 난 옥토 선생의 주인이 되었다.

그런 놈이 밖으로 나갔다는 건.

“그거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는데.”

“…인류를 위해서라도 모두가 하나 되어, 예?”

오필리아가 큰 눈을 깜빡인다.

뭘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인데 본인이 들은 게 맞다.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그게 무슨.”

“괴상하고 예의 없는 인간아. 네놈의 허영심을 위해 빛나는 아이에게 헛된 소리를 하는 것은…….”

메리뮬레가 한심한 눈으로 타박했지만 무시하고 상점창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 있지? 걔네를 옥토 선생에게 보내. 이블아이가 보냈다고 하면 알 거야.”

이블아이 가면 하나를 구매한 후 편지를 적었으니.

-거기서 까불지 말고 재앙이나 강한 몬스터 있으면 좀 정리해 놔라.

-나중에 나 나갔을 때 개판 되어 있으면 넌 진짜 토끼 되는 거야.

-토끼는 자기가 싼 건 다시 먹어서 소화한다더라.

-잘하자?

이 정도면 녀석도 알아듣겠지?

강압적이지 않게 둘러둘러 이야기했으니 마음 상하는 일도 없을 거다.

얼떨떨하게 편지와 가면을 받아든 오필리아가 어버버하고.

“다른 건 없어?”

“어, 그게… 혼돈의 파편이 등장할 거라는 예언이 하나.”

“밖에 나간 사람 중에 예언자도 있나 보군.”

“미래의 편린을 보는 정도지만 신빙성 있다고 해요.”

거기까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이러나저러나 아직은 탑에 갇혀 있는 신세라.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카오스 박스가 있기는 한데.’

혼돈의 파편을 잡고 얻은 물건.

뭐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운이 좋으면 혼돈의 파편을 막을 수도 있다.

물론 꽝이 걸리면 혼돈의 파편이 하나 더 튀어나오지만.

역시 인류의 미래를 가챠에 거는 건 안 되겠다.

힘들겠지만 알아서 잘 버텨 주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듣자 하니 아직 확실시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이건, 제가 반드시 전달하겠습니다.”

긴가민가하면서도 가면과 편지를 챙긴 오필리아가 고개를 숙인다.

덕분에 바깥소식은 잘 들었다.

탑과 관련된 것 외에도 대형 길드에 관한 내용이나 무너져 버린 나라 이야기 등등 흥미로운 것도 있었지만 당장 신경 쓸 건 없어 보였다.

짧지만 유익한 대화가 끝나고.

“저기, 괜찮다면 이블아이 님도 함께.”

오필리아가 드래곤을 바라보며 웅얼거린다.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위로 향하는 포탈을 만들어 둔 상태.

이대로 올라가 버리면 편하기는 할 테지만…….

“아니, 난 여기 남는다.”

“탑의 시련을 정면으로 도전하려는 것이군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어떻게 보면 편법으로 클리어하는 것이기에 오필리아가 얼굴을 붉힌다.

딱히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아직 아델라의 퀘스트를 끝내지 못해서.

갈 땐 가더라도 퀘스트 보상은 받고 가야지.

그래도 그냥 보내기에는 아쉬우니까.

“아, 올라가는 김에 그것 좀 알아봐. 우리 위에 있는 등반가 중에 숭배자 있다더라.”

“등반가 출신 숭배자 말인가요. 어찌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그런…….”

대놓고 경멸하는 표정을 지은 오필리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낸다.

이걸 줘도 되는 것일까,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내게 내민다.

“오, 오필리아 님!”

“그건 아무에게나 줘서는 안 되는!”

“괜찮습니다.”

로얄 나이트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지만 오필리아는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대체 뭐길래 저러는 걸까.

뭔지는 몰라도 좋은 건 분명해 보였다.

“이블아이 님 또한 숭고한 신념으로 100층으로 향할 테지요.”

그냥 밖으로 못 나가서 강제적으로 오르고 있는 건데.

뭐, 탑으로 초대받은 만큼 정점에 도달하고 싶은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앞을 막아설 강대한 존재가 있습니다. 이건 그것에 대한 거지요.”

“호의 고맙군. 인류의 희망을 위해 앞장서는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

“감사합니다. 95층은 안전지대와 유사합니다. 그곳에서 열어 보시길 바랍니다. 바로 열기에는 부담스러운 물건이니까요.”

“그럴게. 로얄 나이트를 잘 이끌어 줘.”

“로얄이 아니라 노블, 그건 중요하지 않겠지요.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오필리아가 나와 드래곤에게 작별을 고하고 포탈을 이동했다.

그녀를 따르는 이들 또한 사라진 자리.

남은 것은 나와 에이션트 몬스터뿐이었고.

“보통 놈은 아닌 게 분명하구나. 탑 안에 있으면서 재앙을 막을 방도를 가지고 있으니.”

“내가 능력이 좀 되거든.”

“그래. 이곳에 찾아온 목적은 다 이루었느냐. 그대는 내 계승자가 아니기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시스템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이해한다.

층의 지배자라고는 하지만 정말 모든 것을 자기 입맛대로 다룰 수는 없으니.

내가 포탈을 넘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그거다.

그랬다가는 이 녀석에게도 큰 부담이 생길 테니까. 그저 자신의 계승자가 원하니 입 다물고 있던 거겠지.

처음과 달리 부드러워진 말투만 봐도 알겠다.

슬쩍 하늘을 살폈다.

밤이 찾아온 공간. 산맥의 정상은 고요했으나 나는 안다.

이것이 폭풍 전야의 징조라는 것을.

“볼일 중 하나는 끝났지.”

“하나는 끝났다?”

오필리아와 대화하다 보니 알았다.

여기 있는 녀석의 이름이 메리뮬레라는 것을.

우연인가 인연인가.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

[메리뮬레]

-94층의 지배자.

-드래곤 산맥의 주인.

-존경받는 에이션트 드래곤입니다!

-영겁에 가깝게 살아온 드래곤은 어떤 존재일까요?

메리뮬레.

그 이름은…….

“릴카의 부탁으로 왔다.”

90층. 릴카에게 받은 퀘스트에 있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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