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화 오필리아가 불러서
박재경과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나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강하고 유능했으니까.
특히나 녀석에게 들은 정보는 공략의 방향성을 만드는 데도 도움이 됐다.
“거기서도 행복해야 해!”
“그에에.”
난 잠시 서부 방어선으로 향한 녀석을 떠올리며 하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따로 사람을 보내 아델라에게도 소식을 전달했으니 늦어도 며칠 안으로 소식을 받을 것이다.
나와 아델라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박재경이 왔으니 보다 빠르게 움직여도 될 거 같다.
“아델라가 남부로 오면 드래곤종을 부리는 에이션트 몬스터를 칠 거야.”
아델라와 갈리아스가 드래곤종 에이션트를, 나와 박재경이 기생종 에이션트를 처리할 생각.
박재경이 떠난 후, 내가 가장 먼저 찾아 나선 건 갈리아스였다.
기생종을 예방할 수 있는 식품 가공법을 알려 주며 특수 게이트의 위치를 밝혔다.
이후 도착할 아델라와 함께 싸우라고.
처음에는 꺼리는 기색이 있었으나.
“지들 있는 땅이 터지게 생겼는데 움직여야지.”
용의 밤이 찾아오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피해가 생길 건 자명한 사실.
놈들을 막는 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델라다.
드래곤 슬레이어 특성상 용종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스페셜 리스트니까.
그녀 혼자만 들여보내기에는 불안한 감도 있으니 갈리아스도 집어넣을 생각.
그들을 보필할 군사들도 함께 이동할 테니 공략 자체는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변수가 있다면 역시 그쪽인데.
“동부 놈들이 게이트를 지키고 있다 했지?”
“그엑. 그엑.”
숭배자로 이루어진 곳.
놈들을 피해 이동하던 박재경은 특수 게이트가 있는 위치를 확인했으나 들어가지는 못했다.
동부 놈들이 추적해 오는 것도 문제였지만, 게이트에도 숭배자로 보이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나.
동부와 남부 경계에 있는 애매한 위치.
자칫 남부와의 마찰로도 이어질 수 있었음에도 병력을 주둔한 건 모종의 이유가 있을 터.
다른 이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다고 봐야 했다.
‘이쯤 되면 동부와 에이션트 몬스터가 한 팀이라고 보는 게 맞겠네.’
그런 게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니.
목적도 맞다. 숭배자나 에이션트 몬스터나 등반가를 방해하는 역할이니까.
서부는 무너졌으니 사실상 인류의 진영은 3개가 전부.
그중 하나인 동부는 적이고 에이션트 몬스터는 놈들과 결탁했으니.
‘좋은 상황은 아니군.’
전체 병력을 따진다면 우리가 더 강할지 모르지만 주요 전력들이 특수 게이트로 들어간다.
나와 박재경 또한 기생종 에이션트 몬스터를 잡으러 움직여야 할 테니 성주급 전력은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 상태에서 동부에서 밀고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다 떠나서 놈들이 노리던 대로 드래곤을 감염시키면?
힘의 균형이 기우는 거다.
우리 쪽이 불리한 방향으로.
“드래곤을 끌어들여야 돼.”
서로 치고받고 싸우든 말든 드래곤들은 잠잠하다.
용의 밤을 생각해서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건지, 아니면 영역만 침범하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94층의 이름은 드래곤 산맥.
핵심 키가 그곳에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시스템은 어떤 식으로든 클리어할 방법을 마련해 두니까.
“여기부터가 드래곤 산맥.”
아델라는 남쪽으로.
나는 서쪽으로.
박재경과 합류하기 전에 난 중앙을 들르기로 했다.
용의 밤이 찾아오는 만큼 아델라와 갈리아스는 서둘러 움직여야 했지만 난 비교적 여유가 있다.
기생종은 용의 밤이 된다고 해서 더 강해지지는 않으니까.
“드래곤 산맥이라 부를 만하네.”
작게 감탄했다.
다른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보다 족히 2배는 거대한 것들이 가득하다.
드래곤이 사는 곳이라 나무도 드래곤 사이즈로 맞춘 건가.
덩달아 사는 놈들도 수준이 달라졌으니.
“크르르르륵.”
머리에 검을 박아 넣은 녀석도 5성급이다.
산맥 끝자락에서 나왔으니 서열로 치자면 가장 바닥일 텐데 이 정도라.
“기본 5성급부터 나온다고 보면 되겠군.”
안으로 들어가면 6성급이 있을 거고.
어쩌면 퍼스트 몬스터도 나올지 모르겠다.
밖으로 빠져나온 놈들이 제법 되는 터라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건 그거고.
-치이이이익
난 죽은 놈 몸에서 기생종을 꺼내 태워 버렸다.
에이션트 몬스터가 드래곤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은 했는데 진짜인 모양.
감염체를 이쪽으로 몰아넣어 놨다.
내가 사냥한 것 중 감염되지 않은 놈이 없다.
애초에 서로 먹히고 먹히는 관계니 퍼지는 건 금방이었겠지.
“설마 드래곤이 벌써 먹은 건 아니겠지?”
무지성인 몬스터도 아니고, 나름 고등 종족인데 막 먹고 다니지는 않았겠지.
덩치가 큰 만큼 뇌도 큰 건지 똘똘한 부분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세상일은 모르는 법.
세상은 넓고 머리에 나사 빠진 녀석은 많기에 애써 올라오는 불안감을 지우던 그때.
-쿠오오오오오오오!
산맥을 울리는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몬스터들은 낼 수 없는 강력한 마력이 담긴 드래곤 피어.
용종들이 따라 하는 조잡한 소음이 아니라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지를 상실하기에 충분한 위협이었다.
[칭호, 드래곤의 친구가 반짝입니다.]
물론 난 해당 사항 없었지만.
오히려 반갑기까지 하다.
웅웅 울리는 메아리에 이어 뒤따라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듣자 하니 역시나 한 마리는 아닌 거 같고.
“이거 귀찮게 됐네.”
난 살짝 찡그리며 자세를 낮췄다.
땅이 울린다.
드래곤 피어에 화답이라도 하듯 온갖 소리가 뒤섞인 괴성이 뒤늦게 울려 퍼졌으니.
“키히이이익!”
“카르르륵!”
울음소리에 놀라 산맥을 뛰쳐나오는 건 몬스터 무리였다.
산사태라도 난 것처럼 커다란 몸을 뒹굴며 내려오는 녀석들.
난 그 광경을 유심히 봤다.
차라리 아래로 도망치는 놈들은 정상이다.
그와는 반대로 위로 오르는 놈들도 있었으니까.
“저것들은 감염체로군.”
본능과 반대되는, 죽으러 가는 몸짓.
어떻게든 드래곤 주변에 알짱거려 잡아먹히려는 기생종의 발버둥이었다.
-콰아앙!
파이어 밤을 터트리며 전방으로 쏟아져 나오는 놈들을 무시하고 앞으로 향했다.
양팔을 뻗어 엑스자로 교차한 채 포탄처럼 달렸다.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는 나를 보며 놈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저리 꺼져!”
-뻐어어억!
-뿌드득!
“꾸에에엑!”
“크라라라락!”
내게 들이박힌 놈들이 트럭에 치인 것처럼 날아간다.
감촉을 보아하니 뼈가 완전히 부서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게 앞에서 봤으면 핸들을 돌려야지. 자고로 도로에서도 직진 차량 우선이다.
놈들이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은 탓이니 과실은 10 대 0이다.
물론 내가 0이고.
“어딜 가시나!”
“끄히이이이이익!”
난 냅다 뛰어 산맥 안으로 향하는 놈의 경추에 검을 꽂아 넣었다.
불똥과 함께 느껴지는 반발력.
비늘을 뚫고 나서도 질긴 근육이 검을 밀어내려고 꿈틀댄다.
‘단단해.’
용의 밤이 다가와서 그런가 벌써부터 놈들이 강화되고 있다.
기껏해야 간신히 6성급에 발을 걸칠 것 같은데 이 녀석보다 강한 놈들은 어떻게 될까.
키릭.
검을 비틀며 힘을 줬다.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절삭(S) Lv.MAX]
[도축(S) Lv.MAX]
[검강]
-쯔걱
수분기 있는 무언가가 갈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상체가 뜯겨나간다.
이어 안에 손을 넣고 파이어 밤을 터트렸으니.
-콰아아아앙!
-푸두두둑
그대로 폭발해 버린 몬스터가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자고로 일을 저질렀으면 확실히 해야 하는 법.
거리낄 것 없이 파이어 밤을 터트려 살덩이 하나하나 없애 버렸다.
괜히 밖으로 나온 기생종이 다른 녀석에게 들어가면 곤란했으니까.
문제는…….
“더럽게 몰려오네!”
“궤엑!”
아직 난 산맥 초입에 있다는 것이었고, 드래곤의 난동에 두려움을 느낀 몬스터들은 내가 길을 막아도 무작정 달려온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끼인 채 감염된 놈들까지 처치해야 했으니 그야말로 혼자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 내는 느낌.
아니, 따지고 보면 더하다.
단순히 막는 게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까.
내 마음을 읽었는지 덕춘이 또한 힘을 준다.
좋았어. 그럼 덕춘아.
“버스 타자!”
“그! 에?”
순간 앞으로 점프하려던 덕춘이가 가까스로 빨판의 힘을 빌려 멈춰 섰고.
[무지개다리(S)]
-촤아아아아악!
-퍼어어엉!
난 곧장 산맥 정상 부근을 향해 무지개다리를 사용했다.
이전에도 고속 열차처럼 사용했었는데 효과가 좋더라고.
이동 중 무적 옵션 덕에 앞에 있던 놈들이 연달아 터져 버렸고.
“기분 참 뭣 같네!”
비처럼 쏟아지는 핏물과 체액을 뒤집어쓰며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기생종이 원하는 건 드래곤에게 먹히는 것.
굳이 아래에서부터 잡으며 올라갈 필요 있나.
정상에 있으면 알아서 놈들이 찾아올 텐데.
그래도 지금 밀려 내려가는 몬스터 무리가 그대로 빠져나가면 다른 성채에도 부담이 될 터.
[파이어 밤(SSS) Lv.6]
[파이어 밤(SSS) Lv.6]
[파이어 밤(SSS) Lv.6]
.
.
.
-쿠구구구궁
-쿠와아아아앙!
양손을 넓게 펼친 채 무차별 난사를 날렸다.
무지개를 따라 달리는 불꽃 열차!
몬스터도 불타고 나무도 불타고 내 마음도 뜨겁게 불타오른다.
망할 몬스터들이 타 죽는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산맥 끄트머리에 큰 강이 있으니 산불이 나도 드래곤 산맥이 타지 다른 쪽은 괜찮을 거다.
뭐, 꼬우면…….
“드래곤들이 알아서 끄겠지.”
양심 터진 발언일 수 있었으나 별수 있나.
내 목적은 드래곤을 마주하는 것. 더불어 이곳으로 왔을 노블 나이트와 오필리아를 만나는 것이다.
솔직히 용의 밤이 오기 전에 이 넓은 산맥에서 드래곤을 찾을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역으로 놈이 오도록 만드는 수밖에.
아파트였다면 초인종을 눌렀겠지만 애석하게도 산에는 초인종이 없는 법.
고대부터 먼 거리에 있는 이들에게 봉화에 불을 지펴 연락을 보내지 않았던가.
그래, 이건 그냥.
“내가 왔다! 산맥 주인 나와아아아!”
찾아갈 방법 모르는 작은 인간의 귀여운 애교라고 보면 됐다.
* * *
산맥 정상. 드래곤들의 둥지.
“그대처럼 인간 중에서도 빛나는 자가 있고는 하지.”
“과찬의 말씀입니다, 메리뮬레 님.”
산맥의 주인이자 드래곤들의 존중받는 에이션트 드래곤 메리뮬레는 노블 나이트의 수장 오필리아와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태생적으로 오만하고 건방졌으나 인정만 한다면 얼마든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드래곤이었다.
다른 드래곤들이 메리뮬레의 태도를 봤다면 필시 놀랐을 것이나, 아쉽게도 다른 드래곤들은 용의 밤을 피해 자신의 레어로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저게 뭐죠?”
“으음, 그리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가볍게 미소를 짓던 오필리아가 물끄러미 산맥 너머를 바라보자 메리뮬레도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미세한 굉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무시하고 있었다.
달에 노출되는 것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드래곤들을 레어에 집어넣었지만 아직 어리거나 멍청한 객체는 쉽게 흥분하고는 했다.
몇 마리가 피어를 내지르니 늑대 무리처럼 다른 이들도 휩쓸려 피어를 뱉어 댔다.
산맥에 있는 몬스터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
으레 있는 일처럼 시간이 지나면 소란이 잠잠해질 것이라 예상했건만.
‘왜 탄 냄새가 나지?’
가만 보니 하늘도 뿌옇다.
해가 서서히 가라앉고는 있었으나 아직 밤이 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
물론 몬스터 중에도 화갑룡이나 샐러맨드라코와 같이 불을 내뿜는 이들이 있어 산불이 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산불이 원래 일직선으로 타던가.”
정확히 정상을 향해 불길이 일자로 이어져 있다.
그 불이 점차 퍼지며 산맥을 먹고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마치 불화살이 지나간 궤적 같지 않은가.
게다가 저기, 불길을 이끌고 날아오는 건.
“무지, 개?!”
탑에 오래 묵은 만큼 온갖 일에도 담담해졌다 자부하는 메리뮬레였으나 지금 광경만큼은 상식이 부서지는 느낌이었고…….
“덕춘아, 우리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그헤헤헤!”
놀랍게도 그 위에는 괴상하게 생긴 인간과 수상할 정도로 강력한 혼돈을 지닌 개구리가 불을 쏘아 대고 있었다.
‘왜 개구리가 불을? 영물 같아 보이기는 하는데. 근데, 아니… 어?’
황당함과 충격에 사고력이 급감한 것도 잠시.
이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가뜩이나 이전보다 흉흉해진 달의 기운에 최대한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산맥을 가꾸었는데 그 모든 것이 박살 나고 있었다.
“이 날벌레 같은 것들이 감히!”
-쩌어어어엉!
공기를 찢으며 터져 나오는 드래곤 피어.
그것도 에이션트 드래곤의 분노가 담긴 일갈에 산맥을 타고 오르던 불길이 꺼지며 뿌리째 뽑혀 나간 나무들이 떨어져 내렸다.
-탁
그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알록달록한 갑옷이 옷을 털어 낸다.
몬스터의 피와 흙먼지가 떨어져 바닥이 더러워진다.
발까지 쓱쓱 문질러 닦아 낸 이블아이가 고개를 들었으니,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드래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잠깐의 정적.
슬쩍 눈치를 보더니 옆에 있던 오필리아를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오필리아가 불러서 왔다.”
움찔!
“제, 제가요?”
뻔뻔하다 못해 진지한 이블아이의 모습에 오필리아가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