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9화 중식도를 휘두르는 남자
용의 밤.
새끼 달이 붉어지는 날에는 모든 용종들이 버프를 받는다.
저급한 놈들이야 좀 더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정도에 그치지만 그보다 윗 등급이 문제다.
‘아예 종을 뛰어넘는 놈들이 될 수 있다라.’
상위 객체로 갈수록 야성에 눈을 뜨며 더 강해졌는데, 그러다 아예 규격을 벗어나는 괴물이 되는 놈도 존재했다.
종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
달리 말하면 퍼스트 몬스터와 비슷해지는 과정에서 더욱 강해진다는 거다.
그렇다면 태초에 가까운 퍼스트 몬스터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거군.’
일반적인 경우라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퍼스트 몬스터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밖으로 나오지 못하니.
붉은 달이라는 것이 모든 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문제는 지금은 퍼스트 몬스터들도 밖에 나와 있다는 것이었고, 아델라 또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우연과 필연이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변수였다.
“퍼스트 몬스터도 그렇지만 가장 경계해야 할 건 중앙에 있는 드래곤 산맥이다.”
팔짱을 낀 채 얼굴을 구기고 있던 아델라가 나직이 말했다.
용의 밤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하기는 하지만 본질을 따지자면 이거다.
드래곤이 미쳐 버려서 다른 용종들도 영향을 받는 것.
현대로 따지면 사장이 난리를 피우면 밑에 있는 직원들도 고통을 받아 몸부림치는 거랑 비슷하려나.
‘드래곤이란 놈들이 보통은 아닐 텐데 영향을 받는다라.’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되려나.
심지어 드래곤 산맥이라고 했다. 아델라가 잡은 드래곤의 숫자도 그렇고.
한 마리 달랑 있지는 않을 거란 뜻이었으니 최악의 경우 드래곤 무리가 쳐들어오는 경우도 염두에 둬야 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만 하더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이때를 노려 남부나 동부를 압박하려 했으나.
“처음 계획대로는 못하겠는데.”
“기존에 있던 작전을 철회해야지. 상황이 어그러진 이상 굳이 고집할 필요 없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델라의 말에 동의하는 바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가 엿 먹으라고 고사라도 지내는 것인지 기생종에, 에이션트 몬스터에, 붉은 달까지.
“그나마 갈리아스와 화친을 해서 다행인가.”
남부, 기아스 성채의 주인.
살짝 띨빵해 보이는 놈이라 걱정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일시적인 동맹을 맺었다.
서부에 대한 지원도 보냈다. 이미 내가 어느 정도 방어선 구색을 갖추었으니 쉽게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식량이 문제로군.”
그렇다.
갈리아스와 대화를 해 본 결과, 이미 기생종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었다.
서부가 유독 심할 뿐, 남부를 비롯해 동부에도 기생종이 있다.
당연한 말이었다. 퍼스트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숙주 몸에 있던 기생종이 부화했다는 뜻이었으니까.
아직 크게 일이 터지지 않은 거지 이곳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남부에 계속 있을 수는 없다. 북부도 대비해야 하니까.”
갈리아스와의 협상을 위해 남부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본진은 북부.
결국에는 돌아가서 용의 밤을 대비해야 했다.
“너 먼저 가. 난 좀 더 할 일이 있거든.”
물론 그건 마르곤 성채의 성주인 아델라가 책임질 일.
굳이 우르르 몰려다닐 필요가 없다.
‘흐름에 휩쓸리기만 하면 답이 없어. 치고 나가야 돼.’
좋은 흐름이라면 말이 다르겠지만 파괴와 멸망으로 향하는 흐름에 몸을 맡길 수는 없는 법.
잡다한 거에 정신 팔리지 않고 핵심만 보면 간단하다.
“결국 에이션트 몬스터와 드래곤이 중요한 거잖아.”
남부에 왔으니 그걸 파악해야 한다.
특수 게이트의 위치. 서부 쪽도 정보를 취합해 위치를 추정하고 있다.
“서부에 있는 에이션트 몬스터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줘. 난 남부에 있는 것을 체크할 테니까.”
“음, 그러는 편이 낫겠군. 알겠다. 미르바를 옆에 붙여 주지.”
“저, 저도 말이오?”
“꾸에에.”
밖에서 와이번의 털을 골라 주던 미르바가 와이번을 부둥켜안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와이번 저 녀석은 왜 같이 껴안고 있냐.
몬스터 주제에 사람 말을 알아듣는 건가, 아니면 눈치가 빠른 건가.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이번 일은 혼자 하는 게 더 편하니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겠소. 성주와 함께 움직이는 수밖에!”
“꾸에! 꾸에에!”
그렇게나 좋을까.
아델라 따라 북부로 가도 고생 꽤 할 텐데.
남부 쪽에도 기생종이 퍼진 만큼 북부라고 다르지는 않을 거다.
저번에 성채 내부로 퍼지는 건 막았지만 북부에 있는 필드 곳곳에 기생종은 물론이요, 퍼스트 몬스터도 있을지 몰랐다.
‘어쩌면 용종 말고 기생종을 다루는 놈의 수하들도 있을지 모르겠군.’
이건 아직까지 발견된 게 없어서 확신할 수 없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방향은 결정되었군. 받아라.”
아델라가 내게 뭔가를 던진다.
뭔가 해서 봤더니 옥돌로 만든 새 조각상이다.
단순하게 생겼지만 마감이 깔끔하다.
안쪽에 은은한 마력이 깃든 것이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전서구 아티팩트다. 문제가 생기면 그걸 날리도록.”
“통신 구슬 같은 건 없나?”
“여기서는 못 쓴다. 시스템으로 막혀 있더군.”
아, 어쩐지 다들 파발을 보내거나 편지를 쓴다 했더니 막혀 있었구만.
하긴. 통신까지 원활했으면 이미 누가 대륙을 통일했겠지.
적당히 난이도를 조절하고 세력 간의 균형을 잡기 위해 시스템적인 조치가 있던 모양.
“이건 잘 쓰도록 하지.”
가능한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받아 둬서 나쁠 건 없다.
그럼 준비는 끝났으니 움직여 볼까.
새끼 달이 붉게 물들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0일.
11일째 밤이 되는 날 용의 밤이 찾아온다.
그 안에 특수 게이트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리고…….
‘드래곤 산맥도 한번 가 보기는 해야겠군.’
이쪽도 신경 써야 할 건 마찬가지니까.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은 중앙, 드래곤 산맥과 시네몬 성채를 필두로 한 동부 지역.
이곳에 대한 것도 확인하긴 해야 한다.
한동안 바빠질 거 같다.
* * *
겉으로는 허술하고 실제 성격 또한 나사 빠진 것 같은 면모가 있었지만, 갈리아스는 단순히 무력으로만 성채의 주인이 된 게 아니었다.
“녀석도 나름 준비를 했었군.”
“그에에.”
각 지역마다 특색이 있다.
멸망한 서부는 넘어간다 치고, 북부는 척박한 대신 병력들의 평균 실력이 가장 높다.
동부는 드래곤 산맥에서 뻗어 나온 산맥 줄기가 있어 가장 많은 드래곤과 용종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남부는 먹을 것이 많아 풍족한 편이었고 인구수가 가장 많았다.
먹을 입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는 것은 얼핏 보면 좋았지만 달리 말하면 균형이 깨지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먹이를 찾아 동부 쪽에 있던 용종 몬스터들도 내려오고, 기생종 때문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사람들도 곤란해지지.’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몬스터 웨이브 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음에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는다 했더니만 의도적으로 인구수를 조절하고 있던 거 같다.
인구수를 조절하는 이유?
“이미 식량 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야.”
“그엑. 그엑.”
그 증거로 내가 놈에게 특수 게이트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자 꽤 친절하게 나왔다.
아닌 척했지만 갈리아스 또한 그 위치를 찾아 나서고 있던 거다.
처음에 서부에 대한 지원을 망설였던 이유 또한 그쪽으로 보낼 식량을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이고.
단순하고 생각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제법 속이 능글맞다.
그래도 뭐.
“이렇게 길잡이까지 붙여 주니 나야 좋다만.”
내가 앉아 있는 곳은 마차.
보통 마차가 말이 끌고 가는 형태였다면 이건 달랐다.
커다란 도마뱀같이 생긴 샌드 드레이크가 이끄는 마차였으니까.
말이 마차지, 사실상 드래곤 나이트가 부리는 용종에 마차를 붙인 것에 가까웠다.
“퍼스트 몬스터가 등장하는 위치는 제각각이라 사실상 특수 게이트의 위치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게이트에서 나온 게 아니라 기생종이 부화해서 나오는 거니까.”
“예. 그저 전 범위를 수색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지요.”
드래곤 나이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서부는 무너진 성채를 기점으로 역추적이라도 가능했는데 여긴 뭐 알 수가 없다.
애초에 기생종을 움직이는 건 다른 놈이었으니 감염된 객체의 움직임으로 짐작할 수 없다.
“특히나 최근에는 움직임이 괴상합니다.”
“움직임이 괴상하다? 평소와는 다른 게 있었나 보지?”
끄덕.
드래곤 나이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이 많은 편인 건지 아니면 성주가 가능한 정보를 풀라고 명령한 건지 쓸 만한 이야기를 많이 해 주고 있다.
“기존에는 마땅한 방향 없이 마구잡이로 날뛰었지만 지금은 좀 다릅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제멋대로 움직이던 퍼스트 몬스터를 비롯한 용종들이 일제히 남부와 북부로 달려갔다고 한다.
마치 어떤 명령이라도 받은 듯한 움직임이었고, 관찰 결과 동부로 향하는 놈들은 없었다.
게다가 감염된 객체로 보이는 놈들은 일제히 중앙으로 향했다고 했으니.
“이상하긴 하군.”
나 또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놈들이 북쪽으로 향했다? 아마 원인은 나와 아델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델라가 말하지 않았던가. 기생종의 우두머리랑 대화를 나눴었다고. 그에 대한 무력시위가 아닐까 싶었고.
가장 중요한 건.
‘처음에는 감염된 객체가 동쪽으로 이동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중앙으로 향하고 있었군.’
이 부분이었다.
드래곤 산맥.
점차 차오르는 붉은 달.
이 녀석들 설마.
‘진짜 노리는 건 드래곤인가!’
번뜩 정신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진짜 놈들이 노리는 게 드래곤이라면…….
“모든 게 설명돼.”
지금까지 이상하다고 생각된 것들이 모두 정리가 된다.
어째서 기생종을 다루는 놈이 아델라에게 동맹을 요구했을까.
우리가 방해하지 않아야 드래곤 산맥으로 감염 객체를 이동시키기 편하니까.
왜 남부에 있는 용종들이 날뛰며 남부와 북쪽으로 향하는가.
그래야 우리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니까.
그렇다.
놈들의 최종 목표지는 중앙이다.
노리는 것은 드래곤.
그리고 용의 밤에는…….
‘드래곤도 야성에 휘둘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지.’
평소라면 아무런 문제 없겠지만 저 상태라면 감염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꾸준하게 감염체를 중앙으로 보낸 것도 그것을 위함일 것이고.
최악의 경우 놈들의 손에 드래곤이 들어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우우우우웅!
생각을 마치자마자 아델라가 준 전서구 아티팩트를 활성화시켰다.
옥돌로 이루어진 새가 날개를 퍼덕거렸고.
“아델라에게 전해. 놈들이 노리는 건 드래곤이라고. 막아야 돼.”
짧은 문장이었지만 아델라라면 파악할 거다.
이를 악물었다.
남부에 있는 특수 게이트를 찾아 나선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방향을 틀어야 하는가, 아니면 특수 게이트를 마저 찾고 움직여야 하는가.
기한 내에 반드시 찾으라는 보장도 없는데.
아니, 그 와중에 동부 놈들만 멀쩡한 게 말이 되나.
“카르르르륵!”
“워워! 진정해!”
상념이 이어가는 타이밍.
갑작스레 마차가 들썩이며 샌드 드레이크가 울부짖었다.
동시에 느껴지는 괴수의 목소리.
-콰앙!
마차를 박차고 밖으로 나서자 저 멀리 난동을 부리는 용종의 모습이 보였다.
그냥 용종만 있는 게 아니다. 퍼스트 몬스터까지 무리를 지어 괴성을 질러 대고 있었고.
“으아아! 기껏 동부에서 빠져나왔더니만 이렇게 몰려들다니! 너무 좋수다!”
웬 미친놈이 커다란 중식도와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따 식재료 싱싱하이 기깔나네!”
문제는 얼굴이 익숙하다는 것.
저거, 저 녀석.
“박재경?”
나와 함께 헬다잉 키친을 뒷배로 둔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