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8화 주홍빛 달
용종. 94층에 있어서는 사람들과 떨어질 수 없는 협력 관계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적이기도 했다.
길들인 놈들도 포악함을 감추지 않는데 야생에 있는 놈들은 오죽할까.
그런 걸 다 떠나서 용종은 몬스터 중에서도 포식자로 군림하는 놈들이었다.
일반적인 생태계였다면 각자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을 놈들이 무리를 이루어 움직인다?
“앞에 막아!”
“깔리기 전에 피하라고!”
“브레스! 브레스다!”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과 다를 바 없었다.
커다란 덩치의 맷집과 강력한 마법 저항력을 믿고 육탄으로 밀고 들어오는 동시에 용종 특유의 브레스를 쏘아 대니,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파괴의 현장이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또한 경험이 풍부한 이들.
특히나 용종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저항했다.
“앞에! 지금!”
“당겨어어어!”
“악으로 땡기라고!”
사람 허벅지만 한 두께의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그에 발이 걸린 드레이크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튼튼한 두 다리. 커다란 머리. 그에 비해 초라한 앞발 때문에 엎어지면 바로 일어날 수 없는 객체였고, 그 짧은 시간은 악에 받친 이들이 놈을 분해하기에 충분했다.
“쿠오오오오!”
광물을 캐듯 곡괭이와 둔기로 비늘을 부수고 화살촉처럼 가시가 튀어나온 창살을 꽂아 넣는다.
한번 박히면 자력으로는 뽑아낼 수 없는 것.
-쿠우웅!
창과 연결된 쇠사슬을 땅에 박고 바닥에 엎어진 놈을 조각낸다.
마치 자기 몸보다 수십 배는 커다란 사냥감을 노리는 개미 떼와 같은 모습.
“키햐아아아악!”
달리 말하면 상황이 반전되면 쉽게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용종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었고, 그중에는 와이번과 같은 공중 몬스터 또한 있었으니…….
“활강한다!”
“제기랄! 드래곤 나이트들은 뭐 하는 거야!”
“몸 숙여! 뭉개지기 싫으면!”
“으아아아아악!”
추락하듯 내려온 트윈 헤드 와이번이 병사들을 뭉개고 찢어발기고는 유유히 날아올랐다.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이상 공중 몬스터는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고, 드래곤 나이트 중 하늘을 날 수 있는 이들이 잡아두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전방 후퇴! 재정렬한다!”
“피해를 최소화해라! 더 죽으면 공중이 완전히 뚫려!”
그들이라고 몬스터 웨이브로 밀려오는 용종 전부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덤벼드는 놈은 많고, 드래곤 나이트는 죽으면 바로 채워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것을 쏟아붓지만 절대 무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빈틈을 뚫고 들어오는 놈들이 있는 건 당연.
그러나 참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흥!”
-쿠쾅!
대지를 울리는 굉음.
어떠한 폭발도 마법도 아니었다.
그저 강하게 땅을 박찼을 뿐.
“키헤에엑?”
포탄처럼 날아오는 여인의 모습에 트윈 헤드 와이번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공중에 있는 놈들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지.”
-퍼걱!
거대한 클레이모어가 한 쌍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단순하지만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잘려 나간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졌고, 한 박자 늦게 거대한 몸통이 추락했다.
아델라.
그녀의 활약에 남부 성채의 일원들이 환호했다.
“아델라! 아델라!”
“북부의 군주!”
“드래곤 슬레이어!”
“빌어먹을! 북부에서도 왔는데 기아스의 성주는 모습을 보여라!”
“겁쟁이 같은 갈리아스는 남부 수호의 의무를 실행해라!”
드래곤 슬레이어.
아델라를 부르는 칭호는 다양했으나 그중 으뜸을 뽑으라면 역시나 드래곤 슬레이어였으며 그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녀를 칭송하는 자들이 반.
정작 모습을 드러내야 할 남부의 주인. 기아스 성채의 성주, 갈리아스를 욕하는 이가 반이었다.
“후우.”
길게 숨을 토해 낸 아델라가 가늘게 뜬 눈으로 전장을 살폈다.
담담한 척 서 있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게 보인다.
갈리아스에게 빚을 지우기 위해 직접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정작 그 녀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으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난 와이번을 조종하고 있는 미르바를 재촉했다.
“얼른 가자.”
“안 그래도 최대한 속력을 내고 있는 것이오. 보시오, 우리 알렉산더 2세가 힘들어하지 않소!”
“꾸에에!”
맞다는 듯 소리치는 와이번.
아니, 이름이 알렉산더 2세였냐. 와이번 주제에 이름이 거창하네.
자고로 함께하는 동물은 이름이 복스러워야 건강하고 오래 사는 법이거늘.
“그치, 덕춘아아아아악!”
“그에에!”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흔드는 덕춘이 때문에 순간 밑으로 떨어질 뻔했지만 상식을 뛰어넘은 균형 감각으로 버틸 수 있었다.
이 녀석이 위험하게.
“뭐, 곧 뛰어내리려 했지만.”
미르바가 말한 대로 최대한 서두른 덕분에 늦지 않게 남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밀행이나 다를 바 없었으나 정식 허가야 뭐, 나중에 남부의 주인인 갈리아스를 만나서 받아 내면 그만이지.
지원군을 요청한 건 그쪽이니까.
“넌 저기 애들 좀 도와줘라. 난 아델라한테 가 볼 테니까.”
“성주님을 부탁드리오. 가자! 알렉산더!”
“꾸에에!”
미르바가 공중전을 하고 있는 드래곤 나이트를 향해 방향을 트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하늘을 나는 건 정도는 이제 익숙하다.
[파이어 밤(SSS) Lv.6]
-콰아아아아앙!
폭발을 추진력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난데없는 폭음에 내 쪽으로 시선이 쏠리는 건 덤.
긴 목을 빼 하늘을 올려다보는 드레이크와 갑주룡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버프 다이스(S) Lv.MAX]
[4]
[관통]
[오로라 빔(S) Lv.MAX]
[오로라 빔(S) Lv.MAX]
[오로라 빔(S) Lv.MAX]
.
.
.
유성우처럼 떨어지는 오로라 빔.
찬란한 색으로 수놓아지는 하늘은 얼핏 아름다웠으나.
-쿠구구구구구궁
-콰아아아아앙!
이내 지축을 울리는 굉음으로 현실을 깨우치게 해 주었다.
S급 스킬이면 6성급 몬스터한테도 충분히 통하는 법.
가뜩이나 덩치가 큰 놈들이니 피하는 건 어림도 없었고, 그나마 화갑룡이나 빙갑룡과 같은 갑주룡과는 타고난 맷집으로 버티는 거 같았지만.
“왔군!”
이내 밝게 웃으며 날뛰는 아델라의 손에 목을 내줘야 했다.
칭호부터가 드래곤 슬레이어라 그런가. 그녀가 사용하는 클레이모어는 대형종을 상대하기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쟤도 괴물이긴 하네.”
땅에 착지하며 작게 감탄했다.
별다른 스킬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놈들을 썰어 댄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여유가 있다고 해야 하나. 돌발 상황을 대비해서 체력을 아끼는 것이 느껴진다.
아마 그 원인은…….
‘남부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겠지.’
지금도 그렇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델라와 함께 움직인 병력들은 따로 떨어져 있었고 아델라 홀로 남부의 전사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대충 이유는 짐작 간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소규모의 인력만 가지고 남부로 향했다.
외부에서 온 세력은 총알받이로 쓰기 마련. 그들을 지키기 위해 정면에 나선 것일 것이다.
“남부 놈들이 양아치기는 하네.”
“그에에.”
어떻게 보면 정석적인 방법이기도 하지만 뭐랄까, 지들이 당하고 있는데 저렇게 나오면 우리도 아니꼽다.
나중에 우리가 이번 일을 빌미로 보복하면 어쩌려고 저러지?
어째서 아델라가 남부 놈들을 정신 사납고 즉흥적이며 탐욕스러운 놈들이라고 했는지 알 거 같다.
기본적으로 소리 지르는 걸 좋아하거니와 멀리 내다보는 시야가 부족해 보였으니까.
즉흥적인 만큼 행동력 하나는 좋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다른 지역과 힘겨루기를 할 수 있는 건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오합지졸 같아 보이지만 개개인의 무력은 나쁘지 않아.’
식량이 많이 나오는 만큼 잘 먹어서 그런가.
자원이 풍족한 만큼 전사의 숫자가 많기도 하고.
아무튼…….
“여기부터 끝내고 생각하자.”
저 멀리, 몬스터 웨이브의 본대라고 볼 수 있는 퍼스트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다.
저놈들만 처리하면 급한 불은 끝날 텐데.
왤까, 묘하게 아쉬운 이 기분은.
타앗.
앞으로 뛰어 아델라와 합류했다.
“곧 끝날 거 같은데 이대로 마무리하기에는 좀 아니꼽지 않아? 남부 놈들?”
“같은 생각이다. 아둔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기본적인 예우가 없는 놈들이야.”
상식이 없기에 논리와 정치질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행동해도 되지 않을까?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 했다. 그럼 남부에 왔으면 양아치짓 좀 해도 되겠지.
“지금까지 고생해 줬으니 남은 건 넘기자고.”
“음?”
아델라가 뭐라 하기도 전에 몰려오는 놈들을 향해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발현되는 칭호.
[칭호, 드래곤의 친구가 포효합니다!]
[드래곤의 아류종이 공포를 느낍니다!]
“그, 그오오!”
“그르르르륵!”
용종이라고 한들 진짜 드래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저 겉모습에 유사성이 있고 브레스를 쓰는 놈들이지 고등한 건 그다지 없으니까.
폭발에 가려져 멀리서 보기에는 열심히 싸우는 것으로 보였지만.
-우드드드드드
-쿠구구구궁
실제 공격에 당한 놈들은 많지 않았고, 나를 피해 흩어진 놈들이 남부 전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내 행동을 보고 의도를 파악한 아델라는 함께 내려온 북부 전력에 합류한 지 오래.
“퍼스트 몬스터다!”
“드래곤 나이트 뭐 해!”
“방패! 방패 든 녀석들 앞에 버텨!”
아델라라는 방파제가 없는 놈들은 몸을 용종 떼를 맞이해야 했다.
* * *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고, 해가 지고 나서야 우리는 기아스 성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남부의 주인, 갈리아스.
그에 대한 첫인상을 말하자면.
‘뭐 하는 놈이지?’
이거였다.
생긴 건 멀쩡하다. 오히려 잘생겼는데 뭐랄까, 나사가 몇 개 빠져 있는 거 같다고 해야 하나.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에는 은은한 광기가 서려 있다.
그냥 난폭하거나 한 그런 광기 말고 순수하게 미친놈의 눈깔이다.
그리고 아무리 남부라지만 반바지 하나 달랑 걸치고 웃통을 까고 있다.
원래 남부 복장이 저런가 싶어서 주변을 살펴봐도 저놈만 그렇다.
‘묘하게 탈모맨이랑 비슷… 에이, 그건 아니지.’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초면에 실례되는 생각을.
“오랜만이야, 아델라.”
“멀쩡히 잘 살아 있군. 누누이 말하지만 옷이란 걸 입어라.”
“에이, 여긴 따뜻하잖아. 북쪽과는 다르다고.”
땅 크기만 보면 엄청나게 멀지는 않았지만 시스템의 개입 탓인지 각 지역마다 기후 차이는 확실한 편.
남부가 따뜻한 건 맞았다. 그건 그거고.
“이번에 우리 쪽 애들이 많이 당했던데.”
“불만이면 네놈이 직접 나섰으면 됐을 터.”
“아냐 아냐. 그럴 수도 있지. 도와줘서 고마워.”
싱긋 웃은 녀석이 손을 내젓는다.
의외로 담담하다. 몬스터 웨이브 후반에 꼬장을 부려서 남부 쪽 피해가 꽤 있었을 텐데.
드래곤 나이트도 여럿 죽었고, 전방에 있던 전사들은 거의 전멸했다.
후방에 있던 예비대가 추가로 붙어서 마무리는 지었지만 뼈아픈 손실이 맞았다.
‘그러고 보니 남부가 사람이 제일 많다고 했었나.’
그래서 저런 여유를 부리는 건가?
아니면 생각이란 걸 포기해서 칼로리 소모를 줄이려는 건가. 그러기엔 얘네 잘 먹고 잘산다며.
됐다. 무지성을 지성으로 파악하려는 것부터가 난센스다.
이해하지 말고 그냥 그런 놈인가 하고 받아들이자. 이미 그건 멤버들과 연합 사람들과 어울리며 익숙하다.
“서부 쪽에서 난리가 났다지? 도와달라고?”
“돕는 게 아니라 너희도 당하기 싫으면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멍청하고 멍청한 놈아.”
“아하! 싫다면?”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을 강제로라도 가져갈 것이며 서부에서 오는 감염 객체를 남부로 몰아주지.”
각 지역의 대표들의 대화라기에는 예의고 뭐고 날 것 그대로였지만 갈리아스를 상대할 때는 이게 맞아 보였다.
“그렇군.”
“후우. 머리가 장식인 것 같으니 친히 설명해 주마. 감염 객체가 들어오면 네놈들이 차지하고 있는 식량도 의미가 없다. 모조리 폐기해야 할 것이니까.”
“그건 좀 아까운데.”
“이런 아둔하고 뇌에 기름 낀 개돼지보다 못한……!”
“아냐 아냐!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폭언을 내뱉는 아델라를 황급히 막은 갈리아스가 딱, 손가락을 튕기며 위를 가리킨다.
“곧 붉은 달이 떠. 이거부터 막아야 하지 않겠어?”
붉은 달.
드래곤을 비롯한 모든 용종들이 야성에 미쳐 날뛰는 시기.
창문 너머로 새끼 달이 주홍빛으로 빛나고 있다.
용들의 밤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