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35화 (635/740)

635화 꿈틀거리다

성채를 점령하는 것은 일단 중지하는 게 좋을 거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

비어 버린 성채에 남아 있던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기생종을 정리한 후, 뒤이어 찾아온 이들을 돌려보냈다.

아직 제대로 된 기생종 퇴치법이 없다. 당하면 그대로 감염된다는 것.

괜히 욕심부렸다가 감염되면 얻는 거 없이 손해만 보다 끝나는 거다.

그나마 이번에 얻은 칭호의 효과로 나름 해결책을 만들기는 했는데.

“꾸에에에에! 꾸엑! 꾸에에에!”

“워워. 진정하시오. 그래도 도와준 귀인이오.”

“얘가 날 많이 싫어한다?”

“누구라도 배를 갈랐다 붙이면 싫어하오. 어쩔 수 없는 과정이기는 했지만 말이오.”

부작용이라고 해야 하나,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해야 하나.

미르바의 와이번과 사이가 나빠졌다. 옆에서 덕춘이가 ‘콱 씨, 그냥 한 대 때려 박을까’ 하는 표정으로 와이번을 노려보자 슬금슬금 울음을 멈춘다.

칭호의 효과로 기생종이 어디 있는지는 알게 됐다. 나를 피한다는 설명이 있었으니 작은 상처를 내서 그곳으로 빠져나가도록 유도했는데…….

‘곧 죽어도 상처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지.’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는 뭐. 일단 위치는 알아냈으니 대충 와이번을 기절시키고 배 갈라서 끄집어냈다.

덕춘이도 있고, 회복 포션도 넉넉해서 치료 자체는 문제없고.

링크 패러사이트가 기생종치고는 큰 편이기도 하고, 나도 경험이 없어 좀 여기저기 많이 갈라서 잡아 뽑았다.

정신 차리고 보니 개복 수술을 당했다는 걸 깨닫고는 길길이 날뛰었지.

기껏 도와줬더니만 새대가리는 새대가리. 고마운 줄도 모른다.

그건 그거고.

“어째 불길한 예상은 틀리질 않냐.”

“한발 늦은 듯싶소.”

“그러게 저렇게 빨리 갔을 줄은 몰랐지.”

서부의 빈 성채를 차지하러 움직인 건 우리뿐만이 아니다.

나와 미르바가 갔던 곳으로 온 지원 부대는 도로 돌려보낸 상태.

마르곤 성채로 돌아가 아델라에게 기생종이 나타난 것과 와이번뿐만 아니라 사람도 감염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라고 했다.

이번 사항은 중요하다. 이곳에는 용종이 많고 이제는 삶에 완전히 섞여 있는 게 용종이었으니까.

드래곤 나이트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가축처럼 이용하기도 했으니 한번 퍼지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그나마 성채와 성채끼리의 거리가 떨어져 있어서 전파되는 속도가 느린 거지 대형 성채 내에서 일이 터졌으면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다.

다르게 말하면 이번에 파견된 이들이 감염된 상태로 돌아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

빠르게 다른 곳으로 가서 기생종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려 했는데.

“이봐! 정신 차려! 뭐 하는 건가!”

“마, 말이 좀 이상한데?”

“좀 말리고 있어 봐! 으읍!”

상황을 보아하니 한발 늦은 거 같다.

여기가 이렇다는 건 다른 성채로 간 이들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봐야겠지.

“미르바, 와이번 입 안 벌리게 묶어 두고. 나눠 준 마스크 써.”

“알겠네. 뭐든 예방이 중요한 법이니까.”

링크 패러사이트는 대부분 섭식으로 감염된다.

감염된 몬스터를 다른 포식 몬스터가 먹다가 넘어가거나,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입으로 뛰어 들어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상처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는 형식.

따로 몸에 상처가 없다면 마스크만 잘 쓰고 있으면 어느 정도 예방이 될 거다.

‘뭔가 역병 의사가 된 거 같기도 하고.’

상점창에서 파는 마스크가 마땅치 않아서 길쭉한 새 부리 모양의 마스크를 쓰고 있다.

거의 얼굴 전체를 뒤덮는 모양새였는데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효과는 있다.

와이번도 재갈을 물렸으니 이쪽은 끝. 마음에 들지 않는지 우리에 갇힌 와이번이 들썩였지만 난동을 부리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감염된 이들을 분류하는 거야. 사람들은 따로 빼 둬.”

“사람들부터 치료해야 하니, 알겠네.”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상태가 멀쩡해 보이는 이들 우선으로 할 거야. 그쪽이 더 살릴 가능성이 크니까.”

아직 기생종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게 많다.

상황을 봤을 때 감염된 지 얼마 안 된 경우에는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치료를 해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건지, 아니면 영구적인 손상을 입어 예전처럼 돌아올 수 없는지.

그 시기와 정도를 알 수가 없으니 일단 감염된 지 얼마 안 된 이들부터 구하는 것.

[칭호, 기생종도 거르는 자가 발휘됩니다.]

-움찔

-부르르

칭호의 효과가 발휘되자 확연히 반응을 보이는 놈들이 있다.

“저기부터 저기까지 싹 격리.”

“알겠네.”

“이쪽은 멀쩡한 거 같으니 재갈부터 씌우고. 샌드 리자드는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네.”

군용 말을 비롯해 드래곤 나이트가 타고 온 몬스터는 대부분 감염된 상태.

사람의 경우에는 그나마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속이 메스껍소.”

“그거면 차라리 다행인 거지. 아직 위장을 갉아 먹고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았다는 거니까.”

“크아아압!”

툭. 감염된 이의 배에 손가락을 대자 위경련이 일어나듯 떨림이 느껴졌다.

나를 피해 몸부림치는 탓에 환자만 고통받았으니.

“덕춘아, 진통제 투입.”

“그에엑.”

-철썩!

우리의 믿음직한 의료 개구리가 환자의 뺨을 때려 기절시켜 줬다.

세상 평온한 얼굴로 죽은 듯이 잠든다.

오른쪽 뺨이 퉁퉁 부은 걸 보니 기생종 때문에 몸이 약해진 게 분명하군.

…설마 진짜 죽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어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대니 다행히 심장이 뛰고 있다.

그냥 엄살이었군.

괜히 괘씸해서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으으.”

살짝 마취가 덜 됐는지 신음 소리를 내며 뒤척이는 녀석.

악몽이라도 꾸는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고 있었다.

뭐, 됐다. 깨어나지만 않았으면 상관없지.

설사 깨어나더라도 한 번 더 기절시키면 되는 거고.

뺨은 2개니 2번 정도는 충분히 잠재울 수 있다.

“바로 시작한다.”

“그에에.”

클린으로 단검을 소독하고 망설임 없이 배를 갈랐다.

출혈이 나는 건 당연했으나 덕춘이가 지혈제를 들이부으며 회복을 써 줬으니 쇼크사로 죽지는 않을 거다.

나 또한 해부학에 정통한 건 아니지만 이래저래 많이 찔러 보고 찔려 보니 대략적으로는 안다.

탑에 올라오기 전, 응급치료법 같은 것도 배웠으니 의사는 아니더라도 돌팔이는 할 수 있다.

“저, 저 녀석이 사람을 죽였어!”

“크윽!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미르바 네 이놈!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냐! 저런 살인마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니!”

나를 보며 분개한 이들이 뭐라 뭐라 소리쳤지만 가뿐히 무시해 줬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감염되지 않은 이들은 마스크를 씌워 건물 안에 넣어 뒀고, 감염된 이들은 저렇게 묶어서 한곳에 모아 뒀다.

저게 다 감염돼서 예민해져서 그런 거다.

비록 돌팔이지만 의사로서 환자들을 안심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법.

한창 헤집던 단검은 들어 가리켰다.

“다음은 네 차례야.”

“이, 이이! 내 옆에 친구에게 순서를 양보하지!”

“너 이 새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동료를 바라보는 녀석.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 속, 서로에게 순서를 양보하며 완치되기를 바라는 참으로 마음 따뜻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끼에에에엑!”

“일단 한 마리 끝.”

위장을 타고 올라가 폐에 자리를 잡으려는 기생종을 끄집어낸 후 따로 유리병에 넣었다.

몬스터들을 살펴보면 종종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가 있는 경우도 있어서 좀 더 확인해 봤지만 다행히 한 마리가 끝인 모양.

열렸던 배를 잘 덮어 주고 포션을 부어 마무리했다.

“얘 치우고 다음.”

“누구로 데려오면 되오?”

“가장 싱싱한 녀석으로.”

내 눈길을 받은 놈들이 일제히 기침하기 시작한다.

“쿨럭! 쿨럭! 내 오랜 지병이!”

“난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었지. 병약한 아들을 용서하십시오, 어머니!”

“크윽! 3년 전 칼에 찔렸던 부위가 아직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헛짓거리하는 놈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결정을 내렸다.

“시간 없다. 그냥 한 번에 다 하자.”

“이, 이런 악독한!”

“사람 살려! 이 악마들아!”

약간의 저항이 있었으나 이미 감염되어 약화된 놈들은 덕춘이의 수면제(손바닥)를 버틸 수 없었다.

* * *

서부의 빈 성채를 차지하기 위해 100여 명으로 이루어진 파견대를 보내고 아델라 역시 서부의 중심, 그라지아 성채로 향하고 있었다.

행동은 빠르게. 상대방이 대응하기 전에 움직이는 편이 좋았으니까.

이쪽에서 먼저 점거하고 이후 협상을 할 예정이었다.

어찌 보면 급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협상만을 생각하고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남쪽에서의 움직임은 없는가?”

“어제 온 파발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이 있다면 몬스터들이 예정보다 빠르게 흉폭해지고 있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군요.”

“새끼 달이 붉어지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을 텐데. 흠. 최근 들어 성격이 포악해지는 게 늘기는 했지.”

성주는 성채의 대표.

다르게 보자면 성채를 수호하는 최강자이기도 했다.

다른 성주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림에도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괜히 무리해서 마찰을 빚어 다른 성주와 싸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특히나 동서남북 4곳의 패자인 이들은 차원이 다른 무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남부의 핵심, 기아스 성채도 아델라와 직접 싸우는 것은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성주가 성채를 비웠다면?

‘남부나 동부에서 이때를 노려 다른 성채 몇 곳을 집어삼킬 수도 있겠지.’

아델라가 경계하는 부분이 이거였다.

빈집 털이만큼 적은 비용으로 영향력을 키우는 방법은 없으니까.

당장 본인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고.

“서부에서 답신은 왔는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쪽에서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못 본 사이에 많이 신중해졌나 보군.”

“아무래도 서부 쪽에 이런저런 사건이 많다 보니까요.”

부하의 대답에 아델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전멸한 성채가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 나왔으니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녀 또한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했으나. 파견대에서도 큰 수확이 없어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번에 직접 움직이면서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확인할 수 있다면 할 생각.

“아, 그리고 소식이 왔는데 이블아이가 성채로 통신을 보냈다고 합니다. 성주님이 자리를 비운 걸 몰랐던 모양입니다.”

“예정보다 빠르게 움직이기는 했으니 어쩔 수 없지. 단순 보고는 아닐 테고 변고가 생겼나 보군.”

아델라가 기수 몇 명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이블아이가 보낸 소식을 가져와라. 너희는 성채를 차지하고 있을 부대를 들러 현황을 파악하고 필요 물자와 인력이 있는지 확인 후 지원 요청을 해라.”

“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곧장 말 위에 올라탔고.

“3일 치 식량입니다. 고기를 좀 넣었습니다.”

“하하! 고맙네.”

병사들이 그들에게 식량을 건넸다.

기본적으로 육류를 좋아하는 곳이 북부였다.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하면 되겠군.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그라지아로 향한다.”

“아직 답변이 오지 않았는데…….”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내가 가면 그쪽도 문을 열 것이다.”

성문이 부서지길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아델라의 명령에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탈것들을 보살폈고 하인들이 요리를 준비했다.

“오늘 메뉴는 뭔가?”

“고기를 잔뜩 넣은 토마토 스튜입니다.”

“벌써 기대되는군!”

병사들과 하인들이 대화를 나누고 보초를 설 인원을 배치한다.

요리사들 또한 커다란 솥에 손질한 재료들을 넣었고.

-꿈틀

당연히 움직일 리 없는 고깃덩어리가 미약하게 움직였다.

갈라진 속살, 하얀 뭔가가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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