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6화 새로운 엔딩을 위해
마왕성. 과거 왕성이었던 곳에 왕과 신하들이 모였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격조 있는 행동을 하던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으니.
“피를, 피를 더 모아야 합니다!”
“닥쳐라, 혈귀. 네가 계약한 악마나 그런 것을 따지지. 고풍스럽지 못하군.”
“시체잡이가 할 소리는 아닐 텐데? 겉가죽이나 핥는 녀석이.”
“뭐라? 기어코 오늘 네놈의 얼굴이 뜯겨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판타데미아의 왕, 이시사르 드 그레인이 마왕을 계승하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강제적인 마왕화. 그를 포함해 왕성 소속 모든 인원이 악마화되었으며, 지금은 자신이 따르는 악마의 힘의 영향을 받아 본질이 흐려졌다.
몇을 제외한다면.
“휴펜피디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괴이궁입니다.”
“그 가증스러운 놈들이야말로 게임에서 가장 위험한 놈들이지요.”
“세작이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괴이궁의 수장이 인간일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마왕의 최측근들.
그들은 자아를 온전히 유지한 채 악마의 힘을 받아들여 더욱 강해졌다.
5성급. 각성.
악마종 특유의 강인함을 생각한다면 일반적인 몬스터랑 비교했을 때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기사단장인 밀레 아이하드 또한 마찬가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59레벨에 달했던 강자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왕을 제외하고 가장 강했다.
같은 등급에서도 급이 나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자. 악마화가 된 이들조차 그는 되도록 건들지 않았다.
“마왕이시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괴이궁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생겨났고, 게임 진행 방식 또한 과거 마왕이 하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대가 생각해도 개입자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기회입니다.”
마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역할을 오랫동안 이어 온 이들은 한 가지 생각을 한다.
‘어째서 우리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가.’
플레이어들이 새로운 엔딩을 위해 달려 나갈 때, 어째서 우리는 여전히 같은 삶을 반복하고 주어진 역할만 한 채 꼭두각시처럼 살아가야 하는가.
플레이어가 아닌 NPC라고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군대를 일으킨 적도 있었고, 현상금을 내건 적도 있다. 온갖 방법을 사용해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시스템이란 참으로 가혹하다.’
왕은 왕성을 나갈 수 없었으며, 게임이 후반부로 넘어가 플레이어들이 오지 않으면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플레이어들이 오더라도 업적과 칭호, 퀘스트 등을 부여하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고.
NPC였지만 정말 게임 속 NPC가 된 듯한 기분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기다렸다. 인내하고 기회가 왔을 때를 노렸다. 빈틈이 있을 것이다. 시스템은 가혹하지만 공정하다. 기회 자체는 모두에게 주니까.
NPC는 곧 한때 탑을 올랐던 등반가라는 말. 마왕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회를 결코 헛되이 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마왕이 된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핵심적인 역할로 게임에 직접 참여가 가능했으니까.
그렇기에 마왕군을 움직였다.
휴펜피디아. 왕성이었을 때는 든든한 방파제였으나 지금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적이었다.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기사단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보낸 것 또한 그의 판단이었다.
“승전보는 아직인가.”
“파발을 보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오지 않겠습니까.”
기사단장의 말에 마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하지 말자.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다. 조금만 더 참을성을 가지면…….
-쿠구구구구구궁!
“뭐, 뭐냐!”
“지진? 아니, 여기에 지진이 날 리가?”
“마왕님, 일단 대피하십시오.”
갑작스러운 충격음.
건물이 흔들리며 먼지와 돌조각이 날리고 벽에 붙어 있던 액자가 떨어져 깨진다.
한 번이 아니다. 연달아 들려오는 폭음과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으니.
-벌컥!
거칠게 문이 열리며 3성급 악마종이 알현실로 뛰쳐 들어왔다. 악마화되며 손속이 더욱 거칠어진 만큼 바로 죽여도 할 말 없는 무례였지만…….
“적, 적입니다! 적군이 왔습니다!”
“벌써 말인가? 대체 어떤 놈이!”
“휴펜피디아에서 공습을 막아 낸 모양이군. 그렇다 한들 타격이 없지는 않을 텐데. 괴이궁 쪽인가.”
저마다 상황 판단에 애썼지만 모두 틀렸다.
“휴펜피디아와 괴이궁의 연합군입니다!”
그의 외침에 알현실에 있던 모두가 얼굴을 구겼다.
* * *
“오우. 잘 날아간다. 나도 저거 타 봐도 돼?”
“저거 놀이기구 아니라니까.”
탈모맨이 머드 골렘을 던지는 마운틴 골렘을 흥미롭게 쳐다본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만 아직은 우리가 나설 타이밍이 아니다. 안에 몇 명이나 있을 줄 알고 벌써 힘을 뺄까. 휴펜피디아에서 싸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높은 곳이 좋기는 하네.’
높은 곳에 있어야 전장 전체를 보기 편해 골렘을 개조했다. 옛날로 치면 페르시아의 전쟁 코끼리 같은 느낌이랄까.
전투용으로 써도 되고, 이렇게 지휘용으로 써도 되고.
나랑 탈모맨만 앉아 있는 건 아니다. 베놈은 내 주머니에 들어가 회복하고 있고, 화무선과 송곳 요정도 앉아 있다.
화무선이야 허허 웃으며 부채질이나 하고 있고 옆에 있는 송곳 요정은…….
“어째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탈모맨한테 막타 다 뺏겨서 그런가?”
“뺏기기는! 양보한 거지.”
뾰족하게 말하는 녀석.
휴펜피디아 전투에서 녀석과 탈모맨이 기사 둘을 상대했는데 막타를 전부 탈모맨이 먹었다.
경험치 분배가 있기는 하지만 탈모맨이 더 많이 먹은 건 사실. 그것 때문에 성질이 난 거 같다만 뭐 별수 있나. 먼저 먹는 게 임자지.
그건 그거고.
“확실히 마왕성이 대비를 많이 했네. 기습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너도 만만치 않을걸. 설마 공습 막자마자 역으로 칠 줄이야.”
“이쪽 소식 모를 때를 노려야지, 그럼.”
그렇다. 공습을 막아 내자마자 히메룬을 괴이궁으로 보내 역습을 시작했다.
적들이 전열을 다듬기 전에 치려는 속셈이었고 급한 대로 병력 일부만을 데리고 진격했다. 이런 건 속도가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다만, 한 가지 놓친 게 있다면.
-우우우우우우웅!
-콰아아아아앙!
“구오오오오오!”
적들의 준비가 상상 이상으로 잘되어 있다는 것.
마운틴 골렘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대마법진을 설치해 뒀다.
거대한 폭발에 마운틴 골렘뿐만 아니라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골렘들까지 같이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걱정할 건 없다.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갑작스럽게 그늘진 공간. 골렘 위에 타고 있는 내게 그늘이 생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나왔어! 내가 왔다고!”
“늦지 않게 온 모양이군.”
저기, 와이번을 타고 등장한 삐에르와 가르티.
하늘을 유영하는 몬스터들에게는 페이둠이 만든 장치가 달려 있었고, 그곳에는 몬스터들과 공성 장비가 달려 있었다.
이어서 뒤쪽에서 소음이 들렸으니.
“다들 비켜라! 문을 열 것이다!”
“이건 좀 개량이 필요하겠군. 흔들림이 크면 사격에 방해가 될 터이니.”
방벽을 밀고 오는 미노타우로스 부대와 전차를 타고 있는 나이트와 페이둠이 보였다.
뒤따르는 군세까지 합친다면 그 수가 천은 우습게 넘긴다. 거기에 휴펜피디아의 플레이어들까지 합친다면.
‘대략 3천 조금 넘겠군.’
적은 수는 아니지만 충분한 숫자도 아니다.
플레이어들 대다수가 아직 40레벨에 불과하고 몬스터 중 절반 이상을 3성급 이하다.
적들은 기본이 3성급인 악마종이고. 4성급도 상당히 많은 것 같았으니 맞부딪친다면 저항이 거세겠지.
그래도 괜찮다. 그렇기에 공성 장비를 가지고 온 거니까.
“화무선, 송곳 요정, 움직일 때가 됐다. 원정대한테도 알려 줘.”
“대마법진도 다 쓴 모양이니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네.”
“소인이 힘을 쓸 때가 됐구려.”
-쿠구구구구궁!
-콰아아앙!
-쐐애애애액!
적들이 대포와 발리스타를 쏘아 댄다. 화살이 비처럼 내렸고, 성벽에 가까이 다가온 이들에게는 뜨거운 기름과 돌을 떨궜다.
그 사이를 밀고 나가는 건 미노타우로스.
“우오오오오!”
보강된 목책을 방패 삼아 앞으로 진격. 그 뒤에 숨어 있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벽을 타고 오른다.
이어 골렘의 엄호를 받으며 공성추가 성문을 쳤고 마지막은…….
[타이탄 골렘이 소환됩니다!]
원정대가 가지고 있는 타이탄 골렘이 해 줄 것이다.
마운틴 골렘까지는 아니지만 성벽과 비견되는 크기. 아이언 골렘보다 단단한 갑주에 파워까지 가진 게임 내 최강의 공성 장비가 등장했다.
원래의 흐름대로였다면 마왕성을 공격하기 위해 나타났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쿠와아아아앙!
“으아아아악!”
“대포! 대포 쏴!”
“여기서 저지해야 한다!”
타이탄 골렘이 주먹을 휘두르고 몸통 박치기를 한다.
성벽이 크게 흔들리며 활을 쏘던 이들이 아래로 떨어지고 우글거리는 몬스터에게 짓밟힌다.
-콰과과과과광!
-투두두두두!
그뿐일까. 와이번이 빠르게 하늘을 날며 포격했으니 적들의 화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고, 굳건하게 버텨 주던 성벽도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늘 가오리도 나름 쓸 만하네.”
저 정도 높이면 돌만 떨궈도 엄청난 살상 병기다. 느리기는 하지만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게 장점.
그곳에서 침투 부대가 뛰어내린다.
“삐이이이익!”
곤두박질치는 녀석들을 하피가 붙잡아 땅에 착지시켜준다.
성벽 내부까지 적이 침입한 상황.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콰아아아아앙!
“성문이 무너졌다! 안으로 들어가!”
“공성 장비 보내!”
그 틈을 타 성문을 박살 냈다. 타이탄 골렘이 성벽을 무너트려 길을 터 주는 건 덤.
이후부터는 전차의 시간이다.
디펜스 장비를 탑재한 전차가 포탄과 기관총을 쏘아 댔으니까. 아무리 장비를 잘 입어도 디펜스 장비의 성능은 발군인 법.
저항이 거셌지만 적들의 피해가 누적되었고, 이내 후퇴를 알리는 깃발이 나부꼈다.
“후퇴! 시가지로 유인해!”
“사격조 지정 장소로 이동!”
“요새화를 한다!”
물론 놈들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성문이 뚫렸을 때를 대비해 작전을 짰겠지만.
-따악
[시한폭탄(S) Lv.MAX]
[시한폭탄(S) Lv.MAX]
[시한폭탄(S) Lv.MAX]
.
.
.
-쿠과과과과과광!
-콰르르르릉!
“마왕성으로 진격해라.”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외곽은 이미 내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왕성 내부에 침입했을 때 설치해 두었던 시한폭탄이 일제히 터지며 건물이 무너졌다.
놈들의 2차 저지선이 붕괴된 것. 놈들에게 남은 거라고는 왕성 하나.
밀려드는 병사들에 의해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기어코 마왕이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
“괴이궁의 주인이 인간이라더니 사실이었군.”
“마왕성에 온 것을 환영한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곳에는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 집결한 기사단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기사를 보호할 정예 병사들 또한 한가득하였고 그 뒤로 보이는 적들의 간부들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뭔 5성이 이렇게 많아.’
기껏해야 5명 정도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휴펜피디아에서 4명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5성급만 10명이 넘는다.
이거 밸런스 파괴 아닌가? 그것도 아니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눈치가 빠르구나.”
이 녀석들 처음부터 소수의 인원에만 집중 투자를 하고 있었다.
마왕성마저도 미끼다. 가장 위험한 이들이 한곳에 모이기를 기다린 거다. 새로운 엔딩을 보고 싶은 자들은 이곳으로 모일 테니까.
저 멀리, 모두의 보호를 받는 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아는 얼굴이다.
마왕, 이시사르.
모든 제약이 사라진 녀석이 천천히 손을 내린다. 나 또한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승리하라.”
“진격하라.”
한껏 고조된 긴장감이 터지며 마왕성과 연합군이 서로를 향해 돌진한다.
“새로운 기회를 위해.”
“새로운 엔딩을 위해.”
이 게임의 끝을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