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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623화 (623/740)

623화 선제공격

탑과 시스템은 악랄하다. 시련이라 부르기 부족하지 않은 상황과 환경을 마련하고 위로 올라가기를 종용하니까.

그 수법은 위로 올라갈수록 다양해지고 은밀해지는 경향을 보였으니 그것은 개인이 만들어 낸 작은 세계, 90층대에도 적용이 되었다.

“게임을 클리어하는 데 집중하게 만든단 말이야. 정작 목표는 새로운 엔딩인데.”

게임의 규칙, 주어지는 조건과 히든 피스 등등. 모든 것이 게임에 집중하게 만들고 있다. 정석적인 흐름으로 가도록.

거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난이도가 확 뛴다. 당장 나도 중간에 스테이지를 침공한 플레이어들을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히지 않았다면 원정은 시도도 못 했을 거다.

아니, 원정을 나선 후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추가적인 원정을 나서지도 못했겠지.

한 번 나가는 데 소모되는 골드와 몬스터들이 상상을 초월하니까. 동시에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원정과 침공 양쪽을 신경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가장 강한 전력인 간부들도 나눠서 움직일 수밖에 없고 말이지.

‘이러니까 사람들이 새로운 엔딩을 못 보는 거야.’

이 층을 만든 지배자까지도 못 볼 정도로 시스템의 개입이 강하게 들어왔다.

마왕성으로 초대한 원정대. 그중 등반가는 두 명. 화무선과 송곳 요정. 송곳 요정이 93층의 지배자였다는 말을 들은 건 의외였다. 굳이 내게 말할 필요 없는 것이었으니까.

아마 내가 91층에 지배자 대리인을 세웠다는 말에 반응한 거 같다.

이러나저러나 이제 처음 보는 사이. 내게 계획이 있으니 신뢰해 달라고 하기 위해서는 내가 해낸 일을 말할 필요가 있어서 했던 것이었는데.

아무튼.

‘대리인도 없이 지배자가 자리에서 내려오면 시스템이 뭣대로 구조를 바꾸는 거 같단 말이지.’

주인이 없으니 굵직한 구조는 남겨 둔 채 시스템의 입맛대로 이것저것 추가하고 생략하는 모양.

처음 만들었을 때만 해도 각 스테이지는 처음 생성할 때부터 모든 몬스터와 디팬스 장비를 설치해야 했다고 한다.

내가 사용했던 꼼수는 사용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그뿐인가.

“이 녀석도 원래는 안 됐다는 건데.”

“예? 형님, 저 부르셨습니까!”

“아냐, 그냥 누워 있어.”

“형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이 낮잠 좀 자겠습니다요!”

내가 던전에서 데리고 온 베놈. 이 녀석도 기존 규칙에 의하면 내가 원정을 나가 던전이 있는 영역을 차지하지 않으면 못 데리고 오는 거라고 했다.

‘베놈은 바뀐 규칙을 알고 있었고 말이야.’

아마 시스템이 영향력을 끼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됐을 거다. NPC는 시스템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거다.

“시스템은 다양한 방식으로 플레이하기를 원해.”

버그든 뭐든 악용할 수 있으면 하고, 꼼수를 부릴 수 있으면 부리고,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봐라. 그 정도의 자유도와 융통성은 발휘해 줄 테니.

그동안 봐 왔던 시스템의 스탠스와 동일하다.

이것들을 확인한 이유는 하나.

[왕위 계승이 완료되었습니다.]

며칠 전, 이 메시지가 떴기 때문.

솔직히 나로서도 도박에 가까운 행위였다. 나의 모든 기반은 마왕성에 있다. 판타데미아의 왕을 마왕으로 바꾸면 마왕성과 간부들, 내가 부리는 몬스터들을 어떻게 되는가.

최악의 경우 이곳으로 왕이 소환되고 지금까지 함께했던 이들 모두가 그를 따르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의 의지가 그러하다면.

“괴이왕이시여,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원정을 나서려거든 조금 늦추는 것도 좋다. 아직 장비 수복이 끝나지 않았어. 공성 장비도 재점검을 마저 해야 하고 말이지.”

이들은 여전히 내 편일 거다.

내게 다가오는 히메룬과 페이둠. 마왕이 바뀌었지만 세력은 여전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이곳을 잃게 된다면 인류 측으로 넘어가려 했었다. 원정대와 동맹을 맺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난 더 이상 마왕이 아니다.

모든 괴물과 몬스터들의 왕.

‘괴이왕怪異王.’

하나의 새로운 세력으로 인정받았다.

스테이지도 여전히 존재한다. 플레이어들이 포탈을 타고 넘어올 수도 있다.

최종적으로 잡아야 하는 것은 마왕이지만 그곳 말고도 이곳을 쳐들어와 성장할 수도 있다는 것.

게임으로 치자면 새로운 맵이 해금되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곳이 기존에 있었고 마왕의 영역이 새롭게 생겨났다는 게 다르기는 하지만.

덕분에 이곳의 이름도 마왕성에서 괴이궁怪異宮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규모 패치가 이루어진 만큼 왕성에도 변화가 있었으니.

‘악마종들 위주로 생겨났다고 했던가.’

왕성 근처에 심어 두었던 첩자들에 의하면 악마종으로 보이는 자들이 확인되었다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몬스터로 바꿀 수는 없으니 악마와 계약한 것으로 설정을 잡은 거 같다.

‘악마종이면 나한테는 오히려 편하군.’

아무래도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까.

꾸욱. 주먹을 쥐었다.

새로운 세력의 우두머리로 인정돼서 정말 다행이다. 어쩌면 나도 다른 몬스터처럼 등급이 정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당장 전대 마왕, 아니지. 이제는 전전대 마왕인 가르티도 왕위에서 내려오면서 5성급 몬스터로 강등되지 않았던가.

운이 좋다. 아니, 두 번 다시는 안 올 기회다.

‘마왕성에서 어떻게 나오는지가 중요해.’

갑작스러운 변화였기에 왕성 내부도 소란스럽겠지. 대책을 세워야 하니까.

현재 왕성은 문을 걸어 잠근 상황. 기존에도 외부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지만 지금은 아예 폐쇄적으로 바뀌었다고.

휴펜피디아에 보내지던 지원도 모두 끊겼다.

-띠링

탈모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니머리 탈모]: 공듀! 이쪽에는 아무런 소식 없는데? 왕성이 마왕성 된 거 아무도 몰라.

[쁘띠공듀]: 따로 공지 사항도 없었다는 거죵?

[니머리 탈모]: 응. 그냥 우리가 알아서 해야 하는 거 같은데?

[쁘띠공듀]: 좋아용! 계획은 잡혀 있으니까욧!

[니머리 탈모]: 다 부수면 된다는 거지!

[쁘띠공듀]: ……? 그렇게 말한 적은 없…….

뭐라 메시지를 보냈지만 보지 않는다. 이 녀석 무슨 짓을 하려고.

짧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든 상관없지. 동맹을 맺은 원정대는 돌아갔고 대략적인 상황은 이미 다 전달한 상태니까.

다음 전투를 준비하면서 각자 역할을 나누었다.

나는 마왕성을 칠 준비를.

원정대는 동맹 사실을 알리고 왕성의 정체를 알린다.

탈모맨은 직접 움직여 그 증거와 정황을 뿌리는 거고.

이미 왕성이 수상하다는 의심은 원정을 이어 나가면서 만들어 뒀다. 지금까지 없었던 전개라 사람들이 왕성이 마왕성이라는 사실을 믿을지가 문제였지.

한마디로 이거다.

“왕인 척 있던 녀석이 마왕이었고, 그 사실을 눈치챈 내가 먼저 그들을 노렸다. 그러니 같이 싸우자.”

억지다. 앞뒤도 안 맞고 상식적으로도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뭐 어떤가.

“지금 마왕은 그 녀석인데.”

입꼬리를 올리며 가르티를 불렀다.

이번 일을 위해 녀석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쪽에는 연락했지?”

“물론이지. 곧 그쪽에서도 움직일걸세.”

내가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을 넘어 구체적인 계획까지 확인시켜 줬기 때문일까, 녀석 또한 최근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새로운 엔딩. 그것을 위해.

“아, 그리고 이건 선물이라네. 우리의 동맹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가르티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넘긴다.

녀석이 말하는 동맹이 의미하는 건 명확하다. 함께 숭배자의 우두머리를 치자는 동맹.

그에 대한 선물이면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인데.

찰랑이는 액체가 담긴 병. 미약하게 느껴지는 피 냄새.

“오호.”

“이 정도면 내 진심이 통할 거 같군. 오래 기다릴 필요 있겠나.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것. 그게 동맹인 것을.”

“난 항상 너의 진심을 믿고 있었지.”

가르티가 내게 넘긴 물건.

[고위 뱀파이어의 피]

-고위 뱀파이어이의 피가 담긴 병.

-숭배자, 패트의 피를 뽑았습니다!

-희귀한 영약을 만들 수도 있을걸요?

패트의 피다.

안 그래도 이 녀석이 좀 걸렸는데 다행이다.

중간에 93층으로 넘어와 분탕질 치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92층에서 받은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라도 녀석의 피가 필요하기도 했고.

[피의 주인- 히든 퀘스트]

-피의 광기를 앓고 있는 뱀파이어, 칼리버.

-변이가 끝나기 전에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처음 자신을 문 뱀파이어의 피를 마시는 것이죠.

-칼리버를 문 뱀파이어의 피를 구해 오세요!

-보상: 칭호, 혈문개방血門開放, 혈술血術, 92층의 지배자 자격

최근 할 일이 많아 잠시 접어 두고 있었는데 이렇게 알아서 챙겨 준다면 나도 녀석의 진심을 믿어 줘야지.

‘보상 달달하겠네.’

90층대의 지배자가 내건 퀘스트라 그런지 파격적인 보상이다.

“잠시 자리 좀 비우지.”

간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라스로 이동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탑의 우체부를 부르는 건 좀 부끄러운 일이라.

양손을 입에 모으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갈매기는 끼룩끼룩!”

저 멀리, 본인이 독수리라도 되는 척 활강하는 갈매기가 보인다.

* * *

동맹이란 개인과 개인이 맺는 것이 아니라면 각 세력의 수장이 대표로 나서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공신력이 생기지 않고 다른 무리들이 돌발 행동을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현재 인류 측은 대표가 공석이었다. 원래라면 대표였어야 할 왕이 마왕으로 바뀌었으니까.

달리 말하면 내가 대표로 있는 괴이궁과의 동맹을 맺은 원정대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 동맹을 해야 한다며 설득을 하고 다녀야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요구한 역할이기도 했고.

그것을 돕기 위해 탈모맨을 붙여 준 거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야외 공간에 펼쳐진 술자리에 작게 혀를 내둘렀다.

같은 목표로 움직이기는 하지만 개인으로 움직이거나 소규모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다 함께 어우러져 술을 마시고 있다.

“열심히 했네. 그래도.”

탈모맨과 원정대는 잠시 소란이 벌어진 곳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상태. 치안은 본인들이 책임질 테니 나머지는 파티를 즐기라는 배려였다.

심심하기도 하여 슬쩍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붙여서 궁금증을 풀었다.

지금껏 수차례 게임이 진행됐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고. 개개인이 침공할 때는 몰랐지만 역으로 침공을 당하며 강대한 적에게 대항하다 보니 유대감이 꽤 생긴 모양이었다.

비교적 겉돌던 원정대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거 같고. 탈모맨이 중간다리 역할을 잘해 줬다.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지만.”

동맹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인류 측 대표자는 탈모맨. 그를 지지하는 가장 강한 세력이 원정대.

몇몇 인원들이 반발하기는 했으나 상황은 금방 바뀌었다.

“그으으으윽.”

“빌어, 먹을.”

파티 분위기인 공간에 이질적인 인물들.

왕성에서 파견되었던 병사와 기사들 일부가 두들겨 맞은 채 기둥에 묶여 있었다.

모습이 바뀌었다. 갑옷 사이로 돋아난 뿔. 눈동자가 길쭉하게 찢어지고 피부 또한 단단하게 변질됐다.

악마를 받아들인 자. 마왕성이 되어 버린 왕성에 속해 있던 이들은 모두 악마화되었다.

겉으로도 보이는 특징이 있으니 다른 플레이어들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렇다. 이번 파티는 동맹을 확인하고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기 위한 행사다.

대표로 내가 이 자리에 온 것이고, 그나마 성격이 부드러운 간부 몇몇을 데리고 왔다.

“그러니까, 나랑 형님이!”

“오오! 그래서? 계속해 봐!”

저기, 꼬리로 맥주잔을 쥐고 술을 퍼먹는 베놈과.

“하여간 상사는 전부 쓰레기라니까요?”

“맨날 바쁜 척하면서 일은 떠넘기고. 진짜 속 터져.”

“혼쭐을 내놔야 정신을 차리죠. 그럼요!”

저기 나의 비서인 히메룬이 자연스럽게 뒷담인지 앞담인지를 하며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과 녹아들고 있다.

거기에 한 명 더.

“여기, 신기해.”

“많이 먹어라.”

의외의 인물이 왔으니. 평소 연금 공방에 박혀 있던 미니믹이 함께 나왔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인류 측 진영에 호기심이 있던 건지 먼저 가 보고 싶다고 말을 걸어왔다.

하기야, 호기심이 없으면 연금술 못 하지. 새로운 걸 보는 것도 자극이 되어 영감을 줄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독을 타서 술을 먹는구나…….”

“그렇지. 맥주가, 어?”

-댕댕댕댕!

미니믹이 말을 하기도 전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들린 곳은 왕성, 아니. 마왕성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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