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2화 계승
원정을 마치고 마왕성으로 돌아와 재정비했다. 인류 측을 공격하기는 했으나 이곳도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결국 본진은 이곳이니까.
가장 신경 쓰던 원정대가 스테이지를 공략하고 있을 때를 노려 나갔던 것이니 어디까지 뚫렸는지를 확인해야 했는데…….
“이놈들도 장난 아니네.”
무려 36 스테이지까지 밀렸다.
준비해 둔 스테이지가 41개였던 것을 생각하면 거의 다 밀린 거라고 보면 됐다.
“자네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공략하면 하는 대로 놔두라고.”
“그렇긴 했지.”
가르티의 말대로 후반에 마련된 스테이지는 정석대로 갔다.
텅 비어 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치밀하게 함정을 파거나 강력한 놈들을 깔아 둔 것도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마왕성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살짝 열어 둔 느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밀고 왔을 줄이야. 아무래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성과를 보여 주려고 무리를 한 듯한데.
“의도한 거기는 하지만 레벨이 많이 올랐어.”
몬스터를 사냥하면 강해진다. 참으로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성장이 보장되는 구조.
이번 원정에서 탈모맨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레벨이 빠르게 올랐고, 스테이지를 거의 다 밀어 버린 원정대도 성장 폭이 컸다.
탈모맨도 곧 50레벨에 도달할 거 같다고 했으니 아마 다음에 부딪칠 때는…….
‘적들도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오겠지.’
일반 플레이어들도 40레벨에 오를 거다.
시간이 더 흐르면 물량전을 펼치더라도 승부하기 쉽지 않다는 뜻.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때? 효과가 좀 있어?”
“물론입니다. 후우. 역시 등급이 올라가는 건 좋군요.”
“난 강해졌다! 이히이!”
“주군의 은혜에 항상 감복할 따름입니다.”
“형님, 동생을 뭘로 보시고!”
나 또한 원정을 통해 이득을 많이 봤다는 거다.
놈들이 몬스터를 잡고 성장하듯 우리 또한 플레이어를 잡을 때 가장 빠르게 강해진다.
거기에 영향력.
인류 진영의 절반 이상을 집어삼키며 보상을 더 얻어낸 결과 간부 전원을 5성급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
거기에 각성까지 마쳤으니 최상위 전력만 비교하자면 엇비슷하다.
변수가 있다면 왕성.
‘왕성은 비교적 전력을 보전하고 있어. 특히 기사단장이라는 녀석은 50레벨이 넘지.’
최상위 전력을 제외하고 보자면 현시점에서는 플레이어들보다 수준이 높다.
물론 기사도 그렇고 왕성 병사들도 그렇고 플레이어가 아니기에 마왕성으로 쳐들어오지는 못하겠지만.
상황은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
“지금부터가 중요해.”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테니까.
이번 원정이 끝나고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인류 측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고 우리도 재정비해야 하니까.
이때를 노려야 한다. 적들의 시선이 이곳에 쏠렸을 때를 이용해야 한다.
“정비하고 있어. 난 갔다 올 데가 있으니까.”
“스테이지는 어떻게 할까요?”
히메룬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근시일 내에 또다시 침공해 올 거 같지는 않지만 혹시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스테이지 뒷부분 열어 놔. 마왕성에 오면 싸우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대접해 줘.”
“알겠습니다.”
“오오, 과연 형님! 적들을 포로로 잡으려는 거군요!”
“아니거든?”
“겸손하시기 까, 끽!”
가볍게 베놈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왕성.
[외박권을 사용합니다.]
-우우우우웅
난 왕성으로 가는 길목 근처로 이동했다.
* * *
현재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은 휴펜피디아에 몰려 있다. 왕성으로 진격하기 전에 거치는 곳이기도 했거니와 혹시나 왕성이 공격당했을 때 지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거점이라 전략적 가치가 크다.
왕성도 그 사실을 알아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왕성 쪽이 비었다는 거지.”
왕성 안으로 잠입한다면 지금이 적기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사람들이 빠진 건 빠진 거고, 병력은 여전히 왕성을 지키고 있을 테니까.
“전보다 감시하는 인원이 늘어난 거 같은데.”
“그에에.”
나무 사이에 모습을 숨긴 채 대교 너머로 보이는 왕성을 살폈다.
저번에 왔을 때랑 비교하면 2배 이상 경계 인원이 많아졌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왕은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게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까.
왕이 죽으면 플레이어들의 후반부가 꼬이니 그들도 왕성을 지키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곳을 뚫을 것인가.
저번처럼 협곡을 넘을까?
‘그건 안 돼.’
당시에는 몬스터들을 이끌고 가서 눈길을 끌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무리 협곡을 넘기 위해서는 파이어 밤이든 무지개다리든 써야 하는데 저렇게 보는 눈이 많으면 무조건 걸린다.
프리즘 레인보우를 사용하는 것도 방법이기는 하다. 완전 은신인 만큼 당당히 대교를 통과할 수 있다. 문이 잠겨 있어서 문제지.
결국에는 다리를 통과하고 성벽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스킬이 지속될지 확신할 수 없다.
어쩔 수 없군.
[땅굴 이동(S) Lv.MAX]
-쿠르르르르
진동음이 울리며 녀석들이 소음의 정체를 찾아 나서겠지만 상관없다. 놈들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왜냐.
“등잔 밑이 어두운 거다, 이것들아.”
협곡을 따라 대교 바로 아래쪽으로 이동했으니까.
다리에 가려져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몰라 외톨이의 길을 사용했고.
[달라붙기(S) Lv.MAX]
대교 밑바닥에 거꾸로 붙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달라붙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나는 가능하다. 최대한 몸을 넓게 펼쳐 마찰력을 올린 채 기듯이 이동.
-후우우우웅
협곡 사이로 거친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흔들렸지만.
“궤에엑.”
“나이스 덕춘이.”
내게는 빨판 달린 덕춘이가 있다. 듬직하게 혀로 내 몸통을 묶고 함께 버텨준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다리 끝까지 이동한 후에는 쉬웠다. 프리즘 레인보우를 사용해 성벽을 타 넘었으니까.
무사히 안으로 들어오고 미리 익혀 둔 골목길을 따라 왕성에 진입했다.
병력이 외부에 주로 몰려 있어 내부는 비교적 한산한 편. 그래도 긴장은 늦추지 않았다.
‘기사들이 많아.’
인원은 적지만 하나같이 강력한 놈들을 배치해 뒀다.
이미 왕성의 내부 도면은 전부 기억해 뒀다.
원래라면 각종 이벤트를 열어 주는 NPC들과 업적과 관련된 이들이 가득해야 했으나 상황이 안 좋은 만큼 다들 자리를 비운 모양.
괜히 나돌아다니다가 객사하면 후반부가 엉망이 될 테니 자택에 있으라고 해 둔 거겠지. 덕분에 나는 편하게 다닐 수 있지만.
벽에 가까이 붙은 채로 움직였다. 목표는 알현실. 그곳에 왕이 있다.
가는 길에 종종 병사들과 마주치기도 했으나.
“읍!”
“쉿. 조용히 있어.”
우둑.
가볍게 목을 쓸어 주자 얌전해졌다. 적당히 비어 있는 방에 잘 접어 책상 아래에 넣어 뒀다.
나중에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겠지만 상관없다. 내가 다시 왕성으로 올 때는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올 테니까.
“발리스타와 대포는 증량했고. 골렘에 대한 대비책은 마련됐겠지?”
“마운틴 골렘만 처리하면 골렘 투석은 불가능합니다. 사정거리 안에 대마법진을 설치해 두었으니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준비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시점, 복도에서 척 봐도 비싸 보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와 그의 부하로 보이는 이가 보였다.
다른 기사들과 비교해도 화려한 녀석의 가슴에는 왕가의 인장이 박혀 있었으니.
[밀레 아이하드 Lv.59]
-93층의 NPC.
-왕성의 기사단장입니다!
-숭배자 골드 등급이죠!
‘기사단장이라는 양반이 숭배자였구만.’
왕성 내부에 구린 놈들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거물이 숭배자일 줄은 몰랐는데.
이거 내가 꾸미기는 했지만 실제로 왕성 기사단은 숭배자들이 장악한 걸지도 모르겠다.
딱히 상관없다. 결국에는 처리해야 할 놈이었으니. 오히려 숭배자면 더 좋지.
그것보다 레벨 59라. 저 녀석은 진짜 내가 상대해야겠는데. 간부들도 5성급에 올라서 50레벨까지는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다지만 기사단장쯤 되면 뭔가가 있을 게 분명했다.
특히 숭배자라면 더 그렇겠지.
“흠?”
너무 대놓고 쳐다봤나. 녀석이 슬쩍, 내가 있는 쪽을 살핀다.
감이 좋은 녀석이네. 레벨이 괜히 높은 게 아닌가. 그래 봤자 완전 은신 덕분에 놈의 눈동자는 내 너머 어딘가를 살필 뿐이었다.
“뭔가, 다른 전달 사항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가지.”
찝찝함을 버리지 못하는지 내 쪽을 기웃거리는 놈에게 중지를 세워 줬다.
역시나 보지 못한 녀석이 자리를 벗어날 때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금 처리해?’
기습한다면 잡을 수 있을 거 같기는 한데. 만렙에 가깝기는 하지만 나 역시 마왕이라 제약이 걸려 있지도 않고 골드 등급 정도는 충분히 처리할 자신이 있다.
다만 그렇게 되면 깽판 치고 도망친다는 선택지밖에 안 남는다. 겸사겸사 왕의 목도 잘라 올 수도 있을 거다.
‘부질없는 이야기지.’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창문을 통해 알현실로 진입했다.
왕좌에 앉아 있는 녀석의 뒤통수가 보인다. 회의를 하고 있는지 양쪽에 기립해 있는 귀족들도 보이고.
그럼 목적을 달성해 보실까.
영향력을 키우며 얻은 추가 기능.
언데드 강림, 움직이는 마왕성, 개척지 테라포밍 등등 눈길을 끄는 것들이 많았다.
무엇을 골라도 단번에 마왕성이 성장할 수 있는 강력한 기능들.
하지만 내가 고른 것은 다른 것이었으니.
[왕위 계승을 진행합니다.]
[대상자]
‘마왕을 바꾼다.’
[판타데미아의 왕, 이시사르 드 그레인]
[진행률: 0.5퍼센트]
[마왕성 전이율: 0.5퍼센트]
* * *
수많은 몬스터가 둘러싸고 있는 곳, 마왕성.
모든 간부가 접대실에 모였다.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어야 하는 곳이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 웃기지도 않은 가면은 치우는 게 어때?”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아까우니 말이야.”
“허허. 다들 신경이 날카롭구려. 마음에 여유를 가져야 하는 법이거늘.”
“넌 좀 닥쳐 줘.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인류 측의 원정대가 안에 있었으니까.
이곳에 들어오면서 한바탕 싸웠는지 다들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다. 간부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마왕님이라도 무리한 부탁을 했어요. 저들을 죽이지 말라니요.”
“진짜 죽을 뻔했다니까?”
직접적으로 싸운 나이트와 히메룬, 삐에르는 척 봐도 큰 상처를 입어 회복 중이었고, 비교적 뒤에 있던 페이둠과 미니믹 역시 피곤한 표정이었다.
베놈이야 아예 혀를 빼물고 소파에 늘어져 있고.
가장 고생했을 가르티는 별다른 말 없이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아하니 타격이 아예 없는 건 아닌 거 같지만.
“다들 고생했어.”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진짜 원정대가 들어왔을 줄은 몰랐다.
저번 침공도 있고 해서 바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들어왔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배척했나? 탈모맨의 말을 들어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우리를 보고 싶다고 했지? 우리도 할 말이 있어서 온 거니까 바로 하자고. 가면 치우고. 얼굴도 모르는 녀석은 신뢰 안 가니까.”
저기 날카롭게 생긴 여인이 송곳 요정.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그래. 본론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지.”
쓰고 있던 가면을 천천히 벗었다.
처음에는 얼굴을 가리고 협상을 하려고 했는데 태도를 보아하니 별로 먹히지 않을 거 같다.
어차피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내 정체를 밝히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난 탑에서의 인지도가 제법 있으니.
[펠라인 세트를 착용합니다.]
철컥.
갑옷이 입혀지고 소파 뒤에 숨어 있던 덕춘이가 폴짝, 내 어깨 위로 올라온다.
처음에는 뭐 하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보던 이들의 눈이 커졌으니.
“…너?”
“우리 구면이구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아이다. 이번 게임의 전 마왕이지.”
대화할 준비가 된 거 같다.
녀석들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동맹을 요청한다.”
이번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새로운 엔딩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