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화 없어져 봐야 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내가 방향성을 잘 잡은 것도 있겠지만 다른 간부들이 빠르게 일해 준 덕분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집단으로 움직일 때는 중간 관리자들이 일을 잘해 줘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그에 따른 보상도 적절히 해야 한다. 그냥 일만 시키면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무리 같은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말이지.
“개척지 탐사는 무사히 되는 거 같고. 각성에 필요한 재료들은 어디까지 모았지?”
“아직 목표치에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순 각성을 위한 것들은 확보했지만 원하시는 물건들은 얻고 싶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 영역에서 해결 안 되면 인류 측에서 구해 와도 돼. 양지에서는 구하기 힘들 테니까 암거래나 개인 거래도 다 써 버려.”
“그러면 예산이 많이 들 텐데요?”
“상관없어. 그냥 쓰는 돈 아니야. 너희들을 위해 쓰는 거지.”
나의 말에 히메룬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파견 보낸 이들에게 지시하겠습니다.”
“항상 수고가 많아.”
내가 간부들에게 약속한 것 중 하나.
전원 각성. 그것도 그냥 각성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트가 어둠의 구를 먹고 각성한 것처럼 각 특성에 맞는 각성을 하는 거다.
그래야 그 효과 덕분에 스킬이 더 생기고 성장 폭도 올라가니까.
결국에는 해야 할 일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물건이 드문 편이라 돈이 많이 깨지기는 하겠지만.
“예산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어.”
인류 측과 거래를 하며 뽑아낸 것도 있고, 저번에 적들을 전멸시켜 획득한 보상도 상당했다.
원정에 나서느라 소비한 재화도 적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노획하거나 약탈한 것도 있으니 완전히 손해는 아니었다.
나에게 있어 1, 2성급 몬스터들은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는 기초 자원이었으니까.
‘이게 다 던전 덕분이지.’
진화석을 이용해 몬스터들을 강화했다면 더 빡빡했겠지만 삐에르를 이용해 발견한 던전을 통해 몬스터의 등급을 올릴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높은 등급의 몬스터들은 늘어갈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3성급 몬스터들도 심심치 않게 볼 정도. 원정 때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음에도 이 정도다.
애초에 첫 원정은 다 죽을 것을 예상하고 보낸 거라 적당히 조절한 것이기도 했지만.
공성 장비도 양산에 들어갔고, 디팬스 장비를 이용한 물건들도 몇 가지 시제품을 만들어 개량을 진행 중이다.
지금은 육로를 이용한 장비들만 있지만 최종 목표는 공중에서 사용할 것들까지 만드는 것.
하늘을 장악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높이만 충분하다면 땅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요격할 수단은 제한적이니까.
“발리스타나 대포로는 상대 못 하지.”
각 자체가 안 나온다.
성벽 위에서 땅으로 덤벼드는 놈들을 잡으려고 만든 거라 고개를 위로 올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서.
일반적인 활로는 당연히 못 건들고, 운 좋게 맞춘다 하더라도 적당한 철판 하나만 붙여 주면 아무런 타격도 없다.
유일하게 신경 써야 하는 게 있다면 각종 스킬을 사용할 플레이어들인데.
‘이거 때문이라도 서둘러야 해.’
시간이 흘러 게임이 후반부에 들어서고 충분히 위력적인 스킬들이 등장한다면 나도 곤란하다.
그렇기에 게임이 중반에 들어선 지금 끝을 보려고 하는 거고.
자고로 전투는 내가 유리할 때 하는 법이다. 안 되면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자신이 유리한 시점을 알고 타이밍을 뺏는 것. 이게 기본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라도.
“얼른 포획해야겠군.”
디팬스 장비를 달고도 날아다닐 수 있는 몬스터를 구해야 한다.
다행히 몬스터를 길들일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여긴 게임이었으며 나는 몬스터들의 왕인 마왕이니까.
테이밍?
“필요 없어.”
친절히 찾아가는 서비스 정신과 서열을 정리하는 주먹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미 개척지 중 비행 몬스터가 발견된 곳은 정리해 뒀다. 이곳에서도 공중 유닛을 귀한 편인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끽해야 두 군데.
낙석 지대와 절벽 땅굴.
다른 간부들을 보낼 수도 있지만 이건 내가 직접 해결할 생각이다.
준비는 마쳤으니 바로 떠나면 될 것이고.
슬쩍 커뮤니티를 확인했다.
“탈모맨 쪽에도 반응이 슬슬 나왔으면 좋겠는데.”
[니머리 탈모]: 애들 다 쫄아서 사냥터 도는데? 유적 쪽 가는 사람도 있는 듯?
[니머리 탈모]: 숭배자로 보이는 애들은 안 보여, 놀러 갔나?
[정수리 핥짝]: 거긴 숭배자 없냐? 와, 이쪽에는 드글거린다, 좀 데려가!
[냥냥펀치]: 얘넨 어딜 가나 있는 듯.
보니까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어 보인다.
또 모르지. 뒤에서 슬금슬금 움직이는 걸지도.
그동안 한 게 많으니 원정대든 숭배자든 왕성이든 뭔가를 하기는 할 거다.
그 반응을 토대로 다음 스텝을 정한다. 그때까지는 준비, 또 준비.
핥짝이를 보면서 배웠다.
승리를 위해 끝없이 준비하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다.
* * *
마왕성.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니 좁은 느낌마저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키헤에에엑!”
가뜩이나 덩치 큰 녀석들이 땅을 가득 채웠는데, 더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공중 몬스터들이 하늘까지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너무 큰 거 같기도 한데 튼튼하고 좋지, 뭐.”
“그에에.”
짧게 입맛을 다시고 테라스에 걸터앉아 하늘을 날아다니는 녀석들을 보았다.
락 와이번과 하늘 가오리.
커다란 덩치에 다리 한 짝만 달린 게 락 와이번. 하나지만 강력한 발로 바위를 잡아 떨구는 놈이다. 힘이 좋고 빠르지만 체력이 좋지 않아 장거리 비행은 못 하는 편.
하늘 가오리는 느리지만 오래 나는 게 장점이고 락 와이번보다 튼튼하다. 넓적하게 생긴 탓에 공격받는 면적도 늘어나는 게 문제지만.
각각 장단점이 다른 만큼 용도에 맞춰 사용하면 된다. 도저히 디팬스 장비를 못 싣겠으면 그냥 운송용으로 써도 되는 거고.
깜짝 드랍 되는 병력만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니까.
“편대 조정을 완료했습니다, 주군.”
“운송 물자도 준비했어요.”
“흐음, 조금 아쉽기는 하네만 임시로 사용한 거점 정도는 만들 수 있게 해 뒀네.”
간부들이 저마다 완료한 작업을 알려준다.
첫 번째 원정이 밑 작업이었다면 이제는 압박을 가할 차례.
인류 진영에 마왕의 영역을 만들 생각이다. 아무래도 마왕성에서 원정만 계속하는 것과 물질적으로 거점이 존재하는 건 큰 차이가 있어서.
‘가장 먼저 차지할 곳은 포탈.’
플레이어들이 스테이지로 넘어오는 포탈을 차지해 성장 동력을 차단한다.
물론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류 측 진영에는 수많은 포탈이 존재하니까.
당장 스타팅 지점 근처에도 포탈이 존재했고, 대도시인 휴펜피디아의 경우에는 도시 내부에도 넘어갈 수 있는 포탈이 존재했다.
“하나씩 집어삼킨다.”
급할 필요 없다. 조금씩 가져가다 보면 놈들이 사용할 수 있는 포탈은 제한될 거고, 그곳으로 모이기 마련이니까.
일종의 몰이 사냥. 최종 목표는 놈들을 왕성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본진이 공격받을 것을 감안하고 스테이지로 들어올 것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몬스터를 막을 것인가.
‘둘 다 해야겠지.’
그렇게 만들 거다. 게임은 마왕을 잡아야 끝이 나니까.
하루 종일 침공해 온 몬스터만 잡으면 뭐 하는가, 최종 보스인 내가 안 나오면 결국에는 마왕성으로 찾아와야 한다.
그때를 대비해 마왕성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녀석이 가르티.
“원정대 상대로 잘할 수 있지?”
“걱정 말게나. 지금 수준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니까.”
“그거 다행이군.”
맞는 말이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놈들이 들어와도 막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가장 강력한 장비들로 세팅하고 각성까지 마쳤다.
녀석 근간이 혼돈에 가까운지라 재료를 얻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에는 성공했다.
이미 5성급. 진화시킬 필요가 없었기에 뭔가를 더 할 필요도 없다.
‘원정대가 50레벨이 넘어가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괜찮아.’
마왕성을 지키는 건 가르티뿐만 아니라 다른 간부도 있으니까.
연금 공방의 미니믹과 최근 각성을 마친 히메룬. 둘은 이곳에 남는다.
페이둠도 놔둘까 했지만 아무래도 전초기지를 세우려면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이번 원정에 참여한다.
그리고 이 녀석.
“안 가? 빨리 가! 난 여기서 놀고 있을게!”
삐에르 역시 놔둔다.
히메룬도 전투 능력이 상당한 거 같지만 아무래도 가르티를 제외하면 전투에 특화된 녀석이 없어서, 혹시 모를 상황에 변수가 될 녀석이 필요했다.
“넌… 그래, 그럴 수 있을 때 놀고 있어라.”
“응, 알겠어! 히히, 히? 어? 말이 왜 그래? 왜 불안하게 말해!”
삐에르가 뒤늦게 이상함을 느끼고 달라붙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해 줬다.
나머지는 전부 나와 함께 간다. 이날을 위해 예산을 끌어모아 간부들을 각성시켰다.
4성급에 각성까지 맞춘 간부들이면 플레이어들은 상대할 수 없다. 잡으려고 한다면 꽤 많은 인력을 동원해야겠지.
물량전을 펼칠 가능성도 있기는 한데.
“그런 멍청이가 있을지는 모르겠군.”
슬쩍, 밖을 보자 출정 준비를 마친 몬스터들이 우글거린다.
“페이둠, 공중 장비는 언제 설치 완료되지?”
“달이 뜨기 전에는 완성되겠군. 와이번이 가만히 있질 않아서 말이야.”
“몇 대 쥐어박아도 되니까 서두르자고. 완료하는 즉시 출격이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5시간, 그 안에 해결하지.”
오케이.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시점, 그때 등장할 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는 휴식. 다들 장비 점검하면서 대기하라고 명령하고 알현실로 향했다.
커뮤니티를 열자 그동안 탈모맨이 보낸 메시지가 보인다.
[니머리 탈모]: 왕성에서 지원 왔어. 이야, 애들 레벨 높던데?
[정수리 핥짝]: 넌 레벨 몇인데?
[니머리 탈모]: 이제 46레벨. 무려 가장 높으시다!
[정수리 핥짝]: 엥? 니가 1등이라고? 공듀도 있잖아?
[니머리 탈모]: 아, 공듀는 마왕이라 레벨 없더라.
[냥냥펀치]: 쁘공… 레벨 따위로는 가늠할 수 없는 궁극의 공듀…….
[정수리 핥짝]: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맞지! 우리 공듀는 레벨로 말 못 하지ㅋㅋㅋㅋㅋ
[니머리 탈모]: 그리고 여기 돌아다니는 애들 중에 눈깔이 수상한 애들 있어.
[냥냥펀치]: 숭배자냥!
[니머리 탈모]: 그런 거 같기도? 왕성에서 온 애들이랑 수상하게 돌아다니던데?
“저쪽도 움직이기 시작했군.”
어째 가만히 있나 했더니만 왕성 쪽에 숨어 있던 숭배자들과 접선하는 데 시간이 걸렸던 모양이다.
저번 침공으로 경계가 심해졌을 테니 더 그렇겠지. 내가 보낸 첩자들도 아직 남아 있으니까.
주르륵, 스크롤을 내리며 두서없이 떠든 탈모맨의 채팅을 확인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뭐가 나온 건 없지만.
“이 녀석들 선동질하려 하네.”
그건 확실했다.
현재 플레이어들의 구심점은 탈모맨.
화무선을 비롯한 원정대 멤버들은 묘하게 사람들과 거리감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게 있었다.
마왕성 공략.
인류 측 진영은 탈모맨과 자신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라는 것.
정말 중요하고 힘든 일이지만 정작 진영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는 교감할 수 없는 애매한 위치.
그렇다고 정색하고 나서기에는 여론이 좋지 않다.
그들이 지금까지 독점하다시피 공략을 이어 나간 것도 있지만.
“숭배자 놈들, 하여간 갈라 치는 걸 좋아한다니까.”
미묘하게 사람들 사이에 파고들어 편 가르기를 하는 숭배자들 탓이 컸다.
가장 강력한 무리를 따돌려 분열시키려는 거겠지만.
[쁘띠공듀]: 탈탈탈탈! 탈수기! TALTALTAL! 탈MO맨!
[쁘띠공듀]: 5시간 뒤 침공할 거랍니닷☆
[쁘띠공듀]: 위치 맞추고 원정대 칭구들 스테이지 입성 시키세욧!
난 그렇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자고로 필요할 때 옆에 없어 봐야 소중한지 아는 법.
“다들 고생 좀 해 봐.”
턱을 괴며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