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18화 (618/740)

618화 다리를 달다, 그리고 날개도

마왕성의 알현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그동안 대부분 회의실에서 살아서 몰랐는데, 여기 의자가 푹신하니 앉아 있기 좋았다.

어디 영화나 만화를 보면 항상 마왕 같은 녀석들이 의자에 앉아서 적들을 기다리던데, 의자가 편해서 그랬던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커뮤니티를 확인했다.

[니머리 탈모]: 나를 따르라아아아아! (사진)

[정수리 핥짝]: 관종 쉨.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고. ㅉㅉ

[냥냥펀치]: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친구… 냥…

[정수리 핥짝]: 저것도 병이라니까?

[니머리 탈모]: 병아리 같다고? 내가 좀 그렇긴 해!

[정수리 핥짝]: 병아리가 아니라 병…

[냥냥펀치]: GOD!

[니머리 탈모]: GOP는 아는데…

[냥냥펀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수리 핥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전히 잘 놀고 있는 녀석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탈모맨이 올린 사진을 보니,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주먹을 하늘로 뻗은 채 개선장군처럼 서 있다.

반파된 마을, 사방에 쓰러져 있는 몬스터와 패잔병 같지만 의지가 담긴 사람들.

하늘에서 빛까지 쏟아져 얼핏 신성한 느낌마저 주었지만.

“쫄쫄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나.”

“그에에.”

저게 모든 것을 다 반감시킨다.

나야 펠라인 세트 효과가 있으니 그렇다 치고, 핥짝이도 스펙이 중첩되는 옷차림이라 최종 장비가 맞고, 냥냥펀치도 과할 정도로 반짝거려서 그렇지 장비는 모두 최고급품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됐다. 보니까 칭호인지 권능인지 그거랑 관련 있는 거 같던데.”

머리를 긁적이며 커뮤니티를 껐다.

녀석이 말해 준 것과 첩자들이 보내 온 보고서를 확인해 전반적인 상황을 정리했다.

계획했던 대로 탈모맨이 잘해 줬다.

불의의 순간에 들어간 침공. 대비하지 못한 인류 측. 때마침 스테이지에 들어간 원정대.

잘 짜 맞춘 타이밍에 그려진 듯 등장하는 영웅, 탈모맨.

원정대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움직이던 그가 위기의 순간 나타나 사람들을 이끌고 침공해 오는 마왕군을 무찌르는 것, 얼마나 멋진가.

‘좀 진부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효과적이기에 클리셰라 불리는 거 아니겠나.

팬텀 나이트도 그걸 알기에 치열하게 싸우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퇴각한 거고. 최대한 탈모맨이 돋보이도록 말이지.

이것으로 탈모맨의 영향력이 세졌다.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승승장구하는 원정대와 필요할 때 함께하고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거부하지 않는 탈모맨.

사람들이 둘 중 누구를 지지할까.

“결국 본인들에게도 기회가 오길 바라거든.”

평화롭게 이곳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무료해지기 마련이었고 과거는 희미해질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멸망해 버린 본인들의 세계를 떠올리며 그때 이렇게 할걸, 그때 내가 모두를 구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하고는 하는 것이다.

굳이 멸망이라는 거대한 키워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흑역사가 생기고 이불 킥 할 때 다들 해 봤을 일이니까.

기본적인 밑밥은 다 깐 거 같고.

“가르티.”

-스르르륵.

내 부름에 공간 한편이 일그러지더니 가르티가 모습을 보인다.

볼 때마다 신기하다. 분명 기척이 없었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차라리 은신 같은 거였으면 상관없겠는데, 권능에도 잡히지 않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마 불가사의라는 녀석의 권능을 사용한 거겠지.

불가사의한 것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었으니까.

“패트는 움직이고 있나? 내가 추가적으로 부탁한 것도 있잖아.”

“걱정 마시게나, 그대가 원하는 대로 했으니.”

마왕성의 배신자, 동시에 숭배자인 패트.

녀석을 잡으려 했지만 한번 놔주었다. 가르티의 말마따나 당장 죽여 봐야 되살아날 뿐이었으니 차라리 이용해 먹는 편이 이득이었고, 위에 있는 또 다른 플래티넘 등급이 나를 불러들이도록 유도하는 것에 더해 한 가지 더 인류 측에 있는 숭배자들을 부추기도록 했다.

아직 놈들은 가르티가 배신한 걸 모른다. 숭배자들은 철저히 등급에 따라 움직이니, 녀석의 명령이라면 분명히 듣겠지.

놈이 나를 시험하듯 나 또한 놈을 시험하는 거다. 내가 원하는 대로 숭배자들을 다뤄 줄 것인지.

‘가르티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나도 나쁠 건 없거든.’

동격인 플래티넘 등급 두 명과 가장 위에 있는 숭배자들의 왕. 다이아 등급을 제외하면 모두 가르티보다 급이 낮다.

직간접적으로 숭배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똑똑.

-끼이이익.

노크 소리와 함께 히메룬과 페이둠이 들어온다.

첫 번째 원정을 마친 만큼 사후 정비와 다음 원정 준비를 해야 했다. 첩자들을 이용한 공작도 이어 나가야 하고.

어째 마왕이라는 자리가 바쁘기만 하고 좋은 점이라고는 없는 거 같은데.

됐다.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내야지.

다들 열심히 준비했는지 시제품과 모형, 서류 더미를 잔뜩 들고 있다.

이번 원정에 나서지 않아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내가 없을 때 최종 방어선이 되어 줄 가르티와 마왕성을 관리해야 하는 히메룬, 장비 보급을 위한 페이둠, 포션 공급을 해야 하는 미니믹은 원정에 데려가지 않았다.

삐에르는… 데려갔다가 사고 칠 거 같아서 그냥 놔뒀고.

“예상했던 대로 스테이지에 진입하는 인원이 상승했습니다. 생존율도 올라갔고요.”

먼저 히메룬. 스테이지에 진입할 인원이 늘어날 것을 우려해 급하게 스테이지 구간을 강화했다.

침공을 당해 인류 측 역시 사후 처리를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을이나 도시 NPC들이 알아서 할 일. 플레이어들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침공으로 마왕 측이 피해를 입었을 때를 기회로 삼고 덤벼들겠지.

이번 일로 내가 가만히 앉아서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으니 더 강해지기 위해서 발버둥 칠 거고.

생존율이 올라간 이유?

“원정대 놈들도 정말 자기들끼리만 할 수는 없거든. 특히나 이렇게 내가 침공을 하면 말이야.”

입꼬리를 올렸다.

플레이어들이 스테이지에 대거 입장했음에도 생존율이 올라간 이유는 하나다.

원정대가 각 스테이지의 공략법을 풀었으니까.

놈들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공략법을 독점해야 남들보다 치고 나갈 수 있으니.

먼저 먹을 거 다 먹고 나서 공략을 풀 생각이었겠지.

그걸 깨부순 거다.

이제 디팬스를 하는 건 인류 측도 마찬가지라고. 더 이상 스테이지 공략만으로는 게임을 클리어 할 수 없다고.

단순 스테이지를 클리어 해 마왕을 잡는 건 소수의 인원으로도 가능하겠지만, 침공을 막아 내는 건 다수의 사람이 필요한 법.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략법을 풀고 있었다.

‘뭐, 그것도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대중들은 탈모맨에게 모인 직후라서 말이지.

필요하다면 탈모맨에게 스테이지 공략법을 알려 줄 생각이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스테이지는 유지해야 해서 전부 알려 줄 수는 없지만.

“마왕님이 원하는 그림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놀라울 지경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런데 또 몰라 아직 변수가 남아 있어서.”

아직 숭배자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그래도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 변수마저도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으니까.

히메룬과 나머지 사항을 정하고 다음 차례는 페이둠.

“왕성을 공격한 경우는 거의 없어 애먹기는 했네만, 설명해 준 것을 토대로 실험작을 몇 개 만들어 보았네. 연무장에 준비해 뒀으니, 테라스에서 바로 볼 수 있을 게야.”

“벌써 만들어졌나? 빠르군.”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니까.”

페이둠에게 부탁한 것은 침공 장비.

디팬스 장비야 뽑기로 뽑을 수 있지만 공성 장비는 따로 구할 곳이 없다.

애초에 마왕에게 있어 원정을 떠나는 것은 부수적인 기능이지 메인은 디팬스였다.

나야 그럴 생각이 없지만 기본적인 구조가 이 모양인지라 준비할 게 많았다.

그나마 원정을 나섰다가 아니다 싶으면 마왕성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외출이나 외박과 달리 원정을 나서면 지정된 위치에 들어와야 마왕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으나 그 정도는 감내할 만했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몇 가지 장점도 있었기에 불만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해야 할 것들이 잘됐는지 확인하는 게 더 낫지.

“오. 저건가. 겉모습은 괜찮아 보이는데. 내가 따로 말하지 않은 것들도 보이고.”

“개량한 부분도 있고 새롭게 추가한 공성 병기도 있다네.”

따로 말하지 않아도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이게 장인 정신, 뭐 그런 건가.

넓게 깔린 연무장 위에 각종 공성 장비가 나열되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임시로 만든 성벽이 존재했다.

급하게 만들어서 벽과 문만 달랑 있었지만 돌을 쌓았으니 어느 정도 대용품은 될 거 같다.

모의 훈련을 하듯 몬스터들이 양쪽에 달라붙어 악을 쓰고 있었다.

“적이 발리스타와 대포를 사용한다고 했었지? 자네 말대로 뒤에 두꺼운 나무를 겹치는 게 더 저렴하고 충격 분산에도 좋지.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말이야.”

“쟤들도 무식하니 괜찮아.”

철판을 덧댄 나무 방벽.

그래. 방패가 아니라 방벽이다. 괴목을 잘라서 몇 겹으로 쌓아 어지간한 목책 따위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사이즈의.

그 아래 바퀴를 달고 밀어붙인다. 방벽 뒤에는 힘을 쓰는 미노타우로스와 각종 병장기를 쥔 몬스터 열댓 마리가 줄지어 따라간다.

-콰가가가가각!

성벽 위에 설치한 디팬스 장비가 거대한 작살을 날려 보냈지만, 둔중한 충격에 잠시 주춤할 뿐 진격을 멈출 수는 없었다.

저걸로 발리스타와 대포는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 거 같고.

나란히 나아가던 방벽이 좌우로 갈라지자 공성추가 땅을 울리며 성문에 돌진한다.

이어 성벽에 올라가는 갈고리와 사다리.

고전적이지만 효과가 검증된 것들의 시연이 연달아 이루어진다.

짧은 기간 동안 꽤나 완성도 있는 물건들이 나왔다. 물론 이 정도 물량으로는 어림도 없다, 아주 많이 필요할 테니까.

“훌륭해. 이 정도면 충분히 먹힐 거야.”

“다음은 그거다. 특별히 신경 써서 만들었지. 내구도는 테스트가 좀 필요하다네.”

“그거야 하면 그만이니까. 이거 좀 설레는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준비한 건 공성 장비뿐만이 아니다.

그걸로는 부족하지. 그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준비에 불과하니까.

찬찬히 임시 성벽 위에 설치된 고래잡이 작살을 바라봤다.

그렇다. 난 마왕이라서 디팬스 장비만 뽑을 수 있다. 저기 인류 측은 수성 장비도 있고 원정대가 유적을 클리어 하면서 얻은 공성 장비인 타이탄 골렘까지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말이 공성 무기지 활용하는 방법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기적인 물건이 타이탄 골렘이다.

일종의 비대칭 무기라고나 할까.

참으로 불합리하고 아니꼬운 상황. 그러니 별수 있나.

“없으면 억지로라도 가져야지, 비대칭 전력.”

내가 준비한 건 2개다.

그중 어느 정도 만들어진 건 저거고.

-드르르르륵.

묵직한 소리와 함께 철갑을 두른 말 형태의 몬스터. 그 뒤로 보이는 마차 형체의 무언가.

겉모습만 보면 삼두마차였으나.

“가끔 드는 생각인데 말이야. 자네는 참 무식하고 무시무시하다네.”

“칭찬으로 듣지.”

마차에는 지붕 대신 기관총이 달려 있었다.

디팬스 장비. 한번 고정하면 해제할 수 없지만 성능만큼은 확실한 그것.

난 그것에 다리를 붙여 줬다.

“마왕님, 충성!”

“기관 마차 시범 사격에 들어간다!”

-투두두두두두두!

-카가가가가강!

바퀴라는 다리를.

그리고 날개도 달 것이다.

“와이번 같은 거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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