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화 흔들어 두다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마왕성의 영역에 들어선 원정대는 파죽지세였다.
현시점 최상의 레벨과 장비를 갖추었고, 중반부에서는 드물게 칭호도 얻었다. 40레벨을 얻으며 축복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스테이지는 어렵지 않았다. 초반 스테이지야 저급한 몬스터와 귀찮은 흡혈충, 독초들이 득실거릴 뿐이었으니까.
아직 방어구와 방어 스킬을 얻지 못한 시기였다면 모를까 지금은 별다른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물론 방어구라고 몸 전부를 가릴 수는 없기에 손톱만 한 흡혈충이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지만.
“하드 스킨!”
버퍼이자 힐러가 스킬을 사용하자 흡혈충의 날카로운 주둥이도 피부를 뚫지 못했다.
피를 빨지 못하는 벌레는 그저 몸에 달라붙어 있는 날벌레나 마찬가지. 따로 잡을 필요도 없이 거칠게 움직이면 갑옷과 근육 사이에 끼어 찌부러졌다.
-콰직!
-푸슈슉!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무기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쓰러진다.
어떻게 파고들어도 전방 탱커의 도발 스킬과 방패에 막히기 일쑤였고, 하늘에서 습격하려고 하더라도.
“허허허. 바람이 몹시 부니 이 또한 풍류가 있지 않소.”
“삐이이이이!”
화무선이 부채를 가볍게 휘두르자 기류가 급변하여 하강하던 하피의 몸이 뒤집힌다.
땅과 하늘이 반전되는 모습을 처음 본 하피의 눈이 빙글 도는 것도 잠시.
-퐁
가벼운, 어쩌면 상쾌한 소리와 함께 하피의 심장에 구멍이 뚫린다.
언제 뚫렸는지도 모른 채 절명한 하피가 땅에 고꾸라지고 송곳 요정이 송곳을 빙글 돌린다.
얼마나 빠르게 찔렀는지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다.
“우측 괴목 사이에 레일건!”
“저거 전에는 없던 거잖아! 언제 설치한 거야!”
“레일건이라니. 뽑기 운이 있지 않소이까.”
-퍼석!
경고하기가 무섭게 쏘아진 레일건이 바위를 꿰뚫는다.
원정대가 입은 방어구도 막아 줄지 어쩔지 모르는 위력이었으나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
기습에 실패한 이상 더는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라도 조종수가 타깃을 쫓지 못하면 명중률은 제로에 가까웠고, 아무리 훈련받은 고블린이더라도 레벨에서 오는 차이는 숙련도로 해결할 수 없었다.
“키헤에에엑!”
악착같이 방아쇠를 놓지 않고 쏘아 댔지만 목이 달아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어느덧 17 스테이지. 이미 한 번 와 봤기 때문인지 시간이 더 단축되었다. 경험치와 보상 또한 나쁘지 않았다.
여기서 잡은 몬스터의 물품을 노획하면 이득을 극대화할 수도 있었으나…….
“잡다한 건 버려. 오늘 20층까지 찍어야 하니까.”
“너무 급한 건 아닌지 모르겠소.”
“치고 나가야 돼. 노리고 있던 축복을 놓쳤잖아. 탈모맨인지 뭔지 하는 녀석보다 레벨을 올려야 타협을 하든 협박을 하든 한다고.”
화무선의 걱정에 송곳 요정이 인상을 썼다.
분명 계획적이었다. 여러 차례 게임을 플레이하며 강해질 수 있는 최단 루트를 짰다. 함께할 동료들도 영입했다.
당장 전 시즌에도 원정대로 나서며 전략을 다듬었지만.
‘이상한 놈이 나타났어.’
정말 예정에도 없던 등반가 한 명이 가장 먼저 40레벨을 차지했다.
어떤 놈인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송곳 요정 역시 요정 클럽의 일원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커뮤니티를 자주 하는 편이었으니까.
탈모맨은 관종끼가 있었기에 커뮤니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 봤다.
‘마그마 요정은 단순하기는 하지만 좋은 녀석이라고 했는데 왜 짜증이 날까.’
이곳에 가장 오래 있던, 정확히 말하면 93층의 지배자였던 자신보다 빠르게 레벨을 올렸기에 질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가끔은 후회하기도 했다. 스스로 지배자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잠깐 투정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밑에서 올라오는 요정 클럽 인원들을 생각해 90층대 하나를 먹은 것이었으니.
게임 규칙을 만들고 지배자의 자리에서 물러나 게임에 참가했다. 그 대가로 게임에 숨겨진 히든 피스나 유적과 같은 것에 대한 기억을 내놓았다.
그것으로 지배자 없는 층을 완성.
새로운 엔딩이라는 클리어 조건을 내걸어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만들었다.
탑은 가혹했고, 송곳 요정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한 층 정도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머물 공간이 필요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지.’
까앙!
송곳 요정이 거칠게 바닥을 굴러다니는 방패 조각을 걷어찼다.
“이 씨, 짜증 나.”
어떻게 보면 스스로 게임 속에 갇힌 것과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자신 있었다.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에도 후에도 게임을 해 왔고 꽤 자신 있었으니, 기억을 잃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자신보다 먼저 성장하고 있는 탈모맨에게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유치한 질투일지도 몰랐지만 이런 감정 덕에 승부욕과 경쟁심이 발동할 수 있었다.
“평소보다 힘이 많이 들어갔구료. 마음을 비우고 정신수양을 하면 평화가 찾아오는 법이지.”
“시끄러워. 너도 잘해야 해. 루키 그룹에서 이야기 나온 거 없었으면 이렇게 안 했어.”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법. 이 또한 오묘한 음양의 이치 아니겠소.”
“…음양오행이 뭔지는 알고?”
“프랑스어 너무 어려워요우.”
“이게 지 필요할 때만! 통역으로 다 들리잖아!”
화무선의 멱살을 잡고 흔들던 송곳 요정이 지친 한숨을 내쉰다.
지금까지 화무선과는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둘 다 상위 헌터 그룹의 일원이기는 했지만 요정 클럽과 루키 그룹은 깊은 관계는 아니었으니까.
서로 공격하지는 않지만 살갑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마 탑의 정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통해 가끔 도와줄 뿐.
‘화무선보다 먼저 올라가서 균형을 맞추려고 했는데.’
본인이 있는 93층. 그보다 높은 곳에 있는 루키 그룹 멤버는 2명, 요정 클럽은 1명이었다.
그나마 가장 높이 오른 찌리리 요정과 루키 그룹의 실질적인 리더인 스마일캡이 나름 친분이 있어서 아직까지는 큰 마찰이 없었지만…….
‘95층에는 그게 있어.’
자기 사람을 위해 언제 돌변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대의를 내세우고 똘똘 뭉쳐 올라오는 로얄 나이트와 빠르게 성장 중인 빅스타 길드도 있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건 쁘찡 연합. 만들어진 계기도, 분위기도 그동안 탑에 없던 종류의 집단이었고 규모로만 보면 탑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탑에 존재하는 세력가 모두 주시하고 있는 곳.
모두가 탑에서 나갔을 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집단이 아닐까.
등반가 모두 언젠가 밖으로 나갈 터. 송곳 요정은 그때의 상황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사람이 쁘띠공듀 한 명에 매료되어 함께한다. 아직까지는 무해했지만 사람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법.
“쁘띠공듀도 90층대에 있겠지.”
어떤 자일까. 순진무구함을 가면으로 쓰는 전략가인가, 오필리아와 같은 구원자일까.
‘그냥 사이비 같기도 하고.’
쁘띠공듀도 그렇지만 쁘찡 연합 사람들도 워낙 제정신이 아니라 가늠이 안 된다.
작게 혀를 찬 송곳 요정이 뚜둑. 목을 풀었다.
“자, 쉴 만큼 쉬었으니 바로 올라, 음?”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인류 측에 남겨 둔 연락망. 그것이 붉은빛을 뿜어 대고 있었으니까.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 * *
[쁘띠공듀]: 쁘띠☆파워!
[갈갈믹서]: 쁘띠!
[리라로]: 사랑!
[근육파워전사]: 평화!
[이준석]: 쁘─멘.
[라임라이]: 공듀 님, 한동안 안 보여서 걱정했다구요!
└공듀 님은 무적이다! 어디 감히!
└걱정은 죄가 아니잖아! 갸스꺄!
└공듀 님, 이 새끼 욕해요!
└걱정은 할 수 있잖아요, 사랑해!
└나두!
“허허. 어허허.”
어지러운 채팅창에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요즘 등반이 바빠 멤버들하고만 떠들었지 연합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못했었다.
실질적인 연합 관리자인 이준석과는 종종 연락했지만, 나를 찾는 이들이 채팅창을 불태우고 있었으니 한 번쯤은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이러고 있으면 각박한 탑에서 쌓인 긴장이 좀 풀리기도 했고.
뭐라 뭐라 말 하지만 연합 사람들은 소중…….
[해파리컷]: 공듀 님으로 피규어를 만들어 보자(사진 있음)
[김부영]: 사랑탑의 공듀 님 팬픽 쓰신 분 밖으로 나갔나요? 제발 다음 편 좀… ㅠㅠ
└그분 78층에서 나간 거로 앎. ㅇㅇ
└아… ㅠ
[부부젤라]: 행운이 들어오는 쁘띠 공듀 씰 팔아요~~
└공듀 님으로 돈 벌면 님 우리한테 사지 찢김.
└그 돈으로 50층에 쁘띠테마파크 만들 건데요? 저 건축 쪽임.
└후원 계좌가 어딨죠? ^^
└재료 필요하면 개인 거래 열어. 여기 골렘 많아서 좋은 거로 보내 줄게.
“아. 스트레스.”
미친놈들아, 그만둬.
이 꼴을 봤는데도 정신 보호 스킬이 뜨지 않다니. 성장한 걸까, 아니면 받아들인 걸까. 괜히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절대 정체 안 드러내야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혀 깨물고 죽을 거다.
더 봤다가는 주화입마에 빠질 거 같아 커뮤니티를 껐다.
그건 그거고.
“생각보다 타격이 있긴 하네.”
난 마왕성으로 돌아와 살아남은 병력을 확인했다.
200마리가량 데리고 갔었는데 40마리 정도만 살아 돌아왔다. 그만큼 적들의 저항이 거셌다는 뜻.
개도 자기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홈그라운드에 있는 녀석들은 당황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게임의 형식상 스펙이 다운그레이드됐다지만 모두 90층대에 있는 NPC들. 그 경험과 숙련도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겁니다. 무려 왕성을 공격했으니까요.”
“그렇긴 해. 다 죽을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병력 손실은 왕성 쪽에서 났다.
공성보다 수성이 유리한 건 모두가 아는 사실. 고작해야 2, 3성급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기는 했다.
애초에 내가 작업할 시간을 끄는 것이 목표였기도 했고.
“다리는?”
“일부 무너지기는 했지만 정상적으로 운용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일주일이면 복구하겠죠.”
히메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침공한 김에 왕성으로 이어진 다리를 폭파하려 했는데 잘되지 않았다.
협곡을 잇는 곳인 만큼 내구도가 상상 이상이었던 거겠지. 이건 내가 직접 부수지 않으면 안 될 거 같다.
방법도 있고.
챙겨 온 지도를 체크했다. 왕성을 마지막으로 대략적인 지도를 완성했다. 그것도 무려.
“어? 마왕님, 이건?”
“맞아. 왕성 내부 도면이야.”
“이, 이걸 어떻게?”
“정말이십니까, 주군! 적진의 핵심에 들어갔다 오셨다니!”
내 말에 간부들이 감탄한다.
피식 웃으며 옆에 있던 베놈을 토닥였다. 움찔하는 녀석.
“끼잉. 끼이이잉.”
그새 더 작아져서 지금은 콘스네이크보다 작다. 한 뼘 정도 되는 사이즈라고 해야 하나.
[그레이트 베놈]
-감정 상태에 따라 덩치가 달라집니다.
-현재 잔뜩. 잔뜨으윽! 쪼그라져 있습니다!
감정 상태에 따라 사이즈가 바뀌는 특성.
자신감이 넘치면 덩치가 커지고 반대로 쫄면 사이즈가 쭈그러든다.
혹시나 해서 해 봤는데 몇 대 쥐어박으니까 아담해졌다. 덕분에 안으로 침투시켜 내가 들어가기 힘든 곳도 알아 올 수 있었다.
“얘가 많이 도와줬지. 장하다, 내 동생.”
“혀, 형님?”
동생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는 녀석.
훗훗. 콧김을 내뱉더니 점차 덩치가 커진다.
“흠흠! 내가 바로 마왕성의 2인자! 그레이트 베놈이다!”
턱을 높이 쳐들고 우쭐거리는 걸 보니 참 다루기 쉬운 놈이지 싶었다.
아무튼, 목적은 달성했다.
혼란을 일으키며 분위기를 흔들었으니.
‘곧 숭배자들도 움직이겠군.’
놈들은 혼란을 좋아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