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화 우리 차례
갑작스레 이루어진 수색 작업이 끝나고, 봉쇄했던 마왕성을 개방했다.
다른 간부들에게는 배신자인 패트를 처리한 것으로 말해 두었고 각자 업무에 집중하도록 지시했다.
그동안 쓰지 않은 알현실에는 나와 가르티 둘만 남아 있었고.
“패트가 층을 오갈 수 있는 걸 이미 알고 있었군.”
“추측이었지만 말이지.”
92층 때도 짐작하기는 했다. 누군가 층을 오가며 나를 감시하는 거 같다고. 그게 패트인지 몰랐을 뿐.
이제야 정리가 되는 거 같았다.
가르티가 내게 알려 준 패트를 없애는 방법은 간단했다.
“다른 층으로 보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잡도록 유도하라라.”
“그게 가장 가능성 있는 일이지. 물론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 게임은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패트도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 있으니까.”
게임이 진행 중일 때는 다른 층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뜻.
그럴 거 같았다. 숭배자도 NPC인 건 변함이 없었고, NPC의 역할은 등반가가 각 층에 도달했을 때 준비된 시련을 진행시키는 거였으니까.
이렇게 따지면…….
“지금 죽여 놓고, 다음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네가 다른 층으로 보내면 되잖아.”
게임이 끝나면 죽었던 이들은 다시 살아난다. 게임 내에서 죽은 거지 진짜 죽은 게 아니니까.
게다가 더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으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상 네가 놈을 꼬드기지 않으면 못 잡는다는 거네?”
패트를 움직일 수 있는 건 플레티넘 등급인 가르티뿐.
녀석이 어느 층으로 갔는지, 가서 뭘 하고 있는지 말해 줄 사람도 가르티 본인이다.
정말 실행할지 안 할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선물로 상위 헌터 중 숭배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지 않았나.”
“이름을 정확히 말하란 말이야, 어? 특징만 말하지 말고.”
“거기까지는 나도 알 수 없다네. NPC면 몰라도 등반가인 숭배자는 그분이 따로 관리하거든.”
“다이아 등급?”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숭배자인 등반가는 이미 만나 봤다. 내 손에 죽었지.
당시에 녀석은 골드 등급의 지시로 움직였던 거 같은데.
“무엇을 할지, 누가 관리할지 또한 그분이 지시하네. 담당자가 아니면 알지 못해. 나 또한 이 위치에 있기에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것이지.”
“그 녀석도 참 비밀이 많다. 그치? 같은 숭배자한테도 말 안 하고.”
빈정거림이 섞인 말이었지만 가르티는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어쩌면 녀석이 숭배자들을 배신하려는 이유와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거야 됐다 치고.
“놈을 이용할 방법이라.”
이쪽에 살짝 흥미가 있다.
93층을 클리어하고 위로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숭배자들을 만나게 될 거다.
이곳도 가르티와 패트, 그 밖의 숭배자들이 작당해서 오게 된 거니까.
혼돈의 파편, NPC, 등반가.
지금껏 겪은 90층대 지배자들의 종류는 다양했다. 장담컨대 위로 올라가면 숭배자가 지배자인 곳도 마주칠 터.
그전에 준비를 좀 해 둘 필요가 있었다.
“후우. 이곳 클리어하는 데만 집중하고 싶은데 가만 놔두질 않는군.”
“어쩔 수 없다. 숭배자들의 역할이 그것이니까.”
이젠 숨길 생각도 안 한다.
그렇겠지. NPC는 저마다 역할이 있으니까. 숭배자도 예외는 아니고.
그런 놈들이 가장 주시하고 있는 게 나고.
가볍게 손가락을 두드렸다. 층을 오갈 수 있는 패트. 녀석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가르티. 패트 또한 다른 숭배자들과 연락할 방법이 있을 거다.
“다른 플레티넘 등급은 어디에 있지?”
“95층에 한 명. 다른 한 명은 존재한다는 것만 안다네. 대외적으로 나선 적이 없거든.”
플레티넘 등급은 총 3명. 95층이면 충분히 나를 끌어들일 만한 위치다.
오케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어디 있는지 아는 녀석부터 정리한다.
이놈들도 충분히 웃대가리니 처리하면 아래에 있는 놈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
이 정도 규모의 집단이라면 결국 우두머리의 역할이 커지기 마련이니까.
“패트를 이용해 95층에 있는 녀석이 그쪽으로 나를 불러드리도록 만들어.”
“그러지. 93층과 94층을 클리어할 시간이라면 그쪽도 충분히 준비할 수 있을 거다.”
품에서 꺼낸 종이에 뭔가를 끄적인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더 필요한 거 있나?”
“있지.”
이쪽 일은 여기서 마무리. 지금부터는 93층 클리어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르티의 역할이 중요하다.
“저번에 침공해 온 녀석들 있잖아. 유적 갔다 나온 애들.”
“그들이 신경 쓰이나 보군.”
“언제쯤 40레벨이 될 거 같아?”
“그 인원 모두가 40레벨이 됐을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대략 일주일. 그 정도는 필요할 거네.”
일주일이라.
빠듯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될 거 같다.
“마왕 역할은 질리도록 해 봤지? 막 원정대가 덤벼도 버티고.”
“그렇긴 하다만 왜 묻는 거지?”
“별거 아니야.”
진짜 별거 아니다.
“잘하는 거 하라고.”
* * *
인류 측에 뿌린 첩자들로부터 다양한 소식이 들려왔다.
그 과정에서 당한 첩자들도 있지만 충분히 원하는 만큼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다들 당황하는 눈치입니다. 본인들이 가장 먼저 40레벨을 달성할 줄 알았을 테니까요.”
“결과적으로는 상급 축복을 받아내기는 했습니다, 주군. 결코 얕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다른 플레이어들 또한 레벨대에 맞는 무장을 했군.”
“걔네보다는 늦었지만 유적이나 던전을 클리어한 애들도 좀 있는 거 같은데? 뭐, 내가 찾아낸 곳보다는 별로겠지만!”
저마다 입을 여는 간부들.
그중 삐에르의 어깨가 유독 솟아 있다. 우쭐거리는 꼴이 괜히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럴 만했으니까.
‘예상대로 마왕성 쪽에도 던전이 있었어.’
그것도 다름 아닌 몬스터를 강화시킬 수 있는 던전이.
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한 녀석들은 죽었지만 생존율이 그리 나쁘지 않다.
현재 대부분의 1성급 몬스터들은 2성급을 찍었고 그중에서도 절반은 3성에 도달했다.
“이런 게 숨겨져 있는 줄은 몰랐군.”
가르티도 몰랐던 던전.
가끔은 고인물도 모르는 것을 뉴비가 알아차리기도 하는 법이었다.
“진화석만으로 모든 것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광산에서 나오는 것도 물량이 넉넉하지 않았고, 침공을 막아 내는 대가로 얻어낸 것들도 무한하지는 않았다.
플레이어 숫자가 준다는 건 다시 말해 침공 횟수가 줄어든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후반에 이를수록 스테이지에서 죽는 플레이어는 줄어들 테니 보상으로 얻는 것도 줄어들 게 뻔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 없으면 만들고 필요하면 찾아내야지.
지도를 살폈다. 이미 첩자들의 정보와 반복적인 외출, 무엇보다 남들 눈치 안 보고 인류 측에서 활동할 수 있는 탈모맨의 활약으로 처음과 비교할 수 없지 정교해졌다.
나만 가지고 있지 않다. 똑같이 복사해 간부들에게도 나눠줬 다.
“이렇게 정교하게 만든 지도는 처음입니다.”
“허허. 대략적인 구조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인류 측에 나갈 일이 극히 드물었던 만큼 꽤 신기해했지만 이들 모두 NPC가 되기 전까지는 각자의 세계에서, 또 탑에서 수많은 일을 겪었던 이들. 금세 지도에 담긴 정보를 습득했다.
“첩자들 전원 자리에 위치시켰지?”
“물론입니다. 모든 인원 활동을 마치고 준비된 자리에서 대기 중입니다.”
히메룬이 고개를 끄덕인다.
흘낏 홀로그램을 살폈다. 나뿐만이 아니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넓게 펼친 화면 속, 그동안 준비해 둔 40개의 스테이지가 쭉 펼쳐져 있다.
3성급 몬스터는 물론이요, 흡혈충에 괴목, 던전을 돌며 가져왔던 각종 독충과 독액초까지 양식해 스테이지에 풀어 뒀다.
그동안 모았던 포인트를 활용해 디팬스 장비를 설치한 건 말할 것도 없고.
딱 32스테이지까지는. 그 이후부터는 구색을 갖추었지만 보스 몬스터도 지정되어 있지 않았고, 전반적으로 허술한 부분이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다른 거 다 챙기면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저 정도가 한계.
-띠링
커뮤니티 알람이 뜬다.
“흠흠.”
잠시 자리를 떴다.
NPC들은 커뮤니티를 볼 수 있으니 안 보이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
탈모맨한테서 연락이 왔다.
[니머리 탈모]: 일단 말한 대로 하기는 했는데 언제쯤 시작하냐? 진짜 그냥 있으면 돼?
[쁘띠공듀]: 그럼용! 신호 주면 대기하다가 딱 10스테이지까지만 깨고 나오면 된다구욧!
[냥냥펀치]: 핥짝아, 얘네 또 뭔가 수상한 짓 하려고 함!
[정수리 핥짝]: 요놈들 무슨 사고를 치려고.
[니머리 탈모]: 사고라니. 성실하게 93층 공략 중이지!
[정수리 핥짝]: 뭐야. 아직도 못 끝냈냐? 이 몸은 조만간 94층으로 올라가지. 후후후.
[냥냥펀치]: 진짜냥! 왜 혼자 가!
[정수리 핥짝]: 다들 아래층 공기 맡고 있으라고. ㅎㅎㅎㅎ
핥짝이는 벌써 93층을 거의 다 클리어한 모양.
오랜만에 선두를 달려서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나도 너무 늦지 않게 따라갈 생각이지만.”
홀로그램을 노려봤다. 집중해서 보고 있는 곳은 단 하나.
맨 첫 번째, 1스테이지.
첩자들의 보고와 탈모맨의 소식에 의하면 조만간 놈들이 온다. 원정대.
화무선과 송곳 요정, 그 외 함께 유적을 클리어한 파티원들. 우리는 그들을 원정대라고 불렀고, 다른 플레이어들도 그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다들 30레벨대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 파티만 전원 40레벨을 돌파했으니 그럴 만도 하고. 다만 유일하지는 않았으니.
“탈모맨이 잘해 줘서 다행이야.”
딱 한 명. 그들의 라이벌로 인식되는 존재가 탈모맨.
내가 녀석에게 부탁한 건 다른 게 아니다. 가능한 빠르게 레벨을 올리고 영향력을 키울 것.
현재 탈모맨의 레벨은 49레벨.
원정대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송곳 요정도 아직 42레벨이다. 속이 쓰리겠지. 노리던 축복도 놓치고 게임에 대한 자존심도 구겨졌을 테니.
그러니 서두를 것이다. 지난번 침공이 끝나고 시간이 흘러 다시 침공이 활발해지는 타이밍. 녀석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니머리 탈모]: 원정대 애들 들어가는 듯?
[쁘띠공듀]: 확인했어용! 4시간 뒤 출발해여. 굳☆럭!
1스테이지에서 원정대의 모습이 포착됐다.
커뮤니티를 종료하고 앞으로 나섰다. 각자 무장을 한 채 대기 중인 녀석들.
이날을 위해 간부들에게 맞춤 장비를 지급했다. 그뿐일까, 팬텀 나이트와 히메룬은 각성까지 마쳤다.
거기에다가.
“언제든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주군.”
팬텀나이트는 진화석을 쏟아 4성급으로 진화시켰다. 확률이 개판이라 고생 좀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했다.
“가자.”
간부들을 이끌고 테라스로 향했다.
마왕성 아래로 도열해 있는 몬스터들. 모든 무장을 마친 채 내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다.
-우아아아아아아!
나를 보자마자 일제히 함성을 지르는 녀석들.
몬스터 특유의 박력과 생동감이 전해진다.
이번이 2번째인가. 맨 처음 비슷한 광경을 본 건 93층에 막 들어왔을 때였던 거 같은데.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오늘. 그동안 우리의 영역을 침공했던 인류에게 그 대가를 받아 낼 것이다!”
그렇다.
“멋대로 들어와 짓밟고 동료를 죽인 그 잔악한 자들을 우리의 손으로 처단하고 부수고! 불태워 침공이 무엇인지 보여 줄 것이며! 다시는 이곳을 넘볼 수 없도록 엄중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와아아아아아아!
하늘을 울리는 몬스터들의 포효.
그에 화답하듯 검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었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원정에 나섭니다.]
촤르르륵.
골드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 거대한 전송 마법진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