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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614화 (614/740)

614화 배신자가 너무 많다

마왕성 안에 내가 모르는 간부가 있었다. 그것도 처음부터.

이건 처음부터 의도했다고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러지 않았다면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모습을 숨겼을 리가 없으니까.

특히나 가르티를 포함해 다른 간부들의 말에 따르면…….

‘게임이 시작하기 전 있던 위치가 역할에 영향을 줘.’

게임이 시작될 당시 집무실에 있던 히메룬이 비서가 됐고, 대장간에 있던 페이둠이 대장장이 역할을 하는 것처럼.

가르티 또한 이번에 마왕 자리를 벗어나고 나를 그 자리에 앉히고자 도서관에 있었다고 했었지.

놈과 아직 나누지 못한 대화가 많이 남아 있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올지 어떻게 확신한 걸까.’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확률적으로 말이 안 될 정도로.

90층대는 같은 층이라도 여러 개의 공간이 존재한다. 이곳이 아니라 다른 93층으로 갔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

아무리 숭배자가 영향력이 있다고 하지만 시스템에 개입할 수는 없을 법. 사용했다면 편법을 이용했겠지.

그렇다는 건.

“가르티 녀석이 말하지 않은 게 있어.”

조력자. 혼자서는 이만한 일을 꾸밀 수 없다.

내가 지나쳐 온 층에 있는 숭배자들의 긴밀한 협조와 동층대에 있는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겠지.

이 부분이 의문이다.

플레티넘 등급이라는 게 숭배자 집단 내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마주친 숭배자는 없었으니까.

한마디로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아니다. 과정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가르티가 내가 93층에 올라올 타이밍을 알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니까.

92층 때도 층을 오가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는 했다.

‘머리 좀 썼군.’

정면으로도 안 되고 함정을 파도 안 되니까 뒤에서 지켜보겠다는 뜻인가.

이건 잠시 놔두고.

“나이트 제외 3성급 이하 몬스터는 잠시 지하 감옥에 모여 있도록. 나머지는 배신자 패트를 잡는다.”

“알겠습니다!”

“다들 이동! 지하 감옥으로 간다!”

지금은 배신자를 찾는 데 집중한다.

녀석이 새로운 엔딩을 위해 변수를 만든 평범한 NPC라면 상관없겠지만 만약 숭배자라면…….

‘가르티와 할 이야기가 많겠군.’

-쿠구구구구궁

곳곳에서 울리는 묵직한 소음.

관리창을 통해 마왕성을 봉쇄하자 모든 출구와 창문이 막힌다.

마치 방화벽 셔터가 내려가듯 두꺼운 벽이 빈 공간을 메꾼 것.

혹시 부수고 탈출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져 파괴 불가 옵션이 달려 있다.

이것으로 마왕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

물론 완벽한 방법은 아니다. 이미 성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만.”

놈은 마왕성 안에 있다.

플레티넘 등급인 숭배자 가르티가 마왕성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 달리 말하면 마왕성을 숭배자들의 거점으로 잡았다는 것.

밖에 있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장치도 이 안에 있을 게 뻔했다.

아마 그 장소는…….

-콰앙

“나와라, 패트.”

마왕성의 알현실.

나야 회의실을 더 좋아하지만 정석대로 흘러갔다면 마왕이 가장 오랜 시간 머무를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허락받은 자가 아니면 들어오지 못하니까.

여기가 아니고도 침실이나 집무실이 있긴 하지만 침실이야 개인적인 공간이라 숭배자들이 모이기 어렵고, 집무실은 현재 히메룬이 사용하고 있다.

다른 간부들이 각 층으로 흩어져 배신자를 찾고 있는 상황, 이곳에 온 것은 나 한 명.

아니, 한 명 더 있다.

“가르티.”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군.”

어느 순간부터 내 뒤를 쫓아온 녀석이 있었다.

쿵. 알현실의 문이 닫혔다.

이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인가. 놈에게 시선을 주면서도 사방을 경계했다.

역시나.

-스륵

인기척이 느껴진다.

아주 희미한. 처음부터 경계하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음.

[오로라 빔(S) Lv.MAX]

-콰가가가강!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곳을 향해 오로라 빔을 쏘았다.

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거에 맞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와, 벌써 들킬 줄은 몰랐는걸요?”

“네가 패트군.”

뒤로 슬쩍 물러나 벽을 등지고 모습을 드러낸 녀석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NPC인 시점에서 이미 수십, 수백 년은 산 괴물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셔츠에 멜빵바지.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은 순진무구했으나 그 안에 깃든 살의는 명확했다.

[패트]

-93층의 NPC.

-골드 등급의 숭배자입니다!

-피를 좋아하는 뱀파이어.

-스토커 기질이 있습니다.

권능을 사용하자 나오는 정보. 역시나 숭배자다.

살며시 눈을 찌푸렸다. 골드 등급이라고는 하나 평범한 골드 등급일 리가 없었다.

녀석의 얼굴에 긴장감이라고는 없었고, 느껴지는 기세 또한 범상치 않았으니까.

옆에 가르티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본인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가.

곁눈질로 가르티를 살폈지만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다. 그저 외눈 안경을 고쳐 쓰며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나와 할 이야기가 있겠는데?”

“그렇군. 그냥 넘어가기는 어렵겠어.”

가르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혼돈검을 뽑았다. 배신이 확인된 이상 전투는 피할 수 없다.

다만, 확인은 해야 했다.

“목적, 지금까지 들키지 않고 숨을 수 있었던 방법.”

검으로 패트를 가리켰다.

“직접 알아내라, 가르티.”

녀석이 정말 숭배자 집단을 배신할 것인지.

오히려 잘됐다. 여전히 난 가르티를 의심하고 있다. 숭배자 놈들에게 당한 것이 많아서.

당장 지금도 마왕성에 또 다른 숭배자가 있다는 사실을 내게 말하지 않았다.

정말 나와 비즈니스 관계를 만들 거라면 여기서 증명해야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응?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

킥킥거리며 등 뒤로 감추고 있던 단검을 꺼낸 패트가 어깨를 으쓱인다.

반면 가르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으니.

“어떻게 안 되겠나, 이블아이. 이 친구는 꽤 오랜 시간 함께했는데 말이야. 내가 노리는 건 이 친구가 아니야.”

“너보다 위에 있는 녀석을 노리고 있다는 건 알지. 내 알 바가 아닐 뿐.”

놈은 숭배자를 배신하겠다 이야기했지만 따지고 보면 숭배자들의 정점인 다이아 등급을 처치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개인적인 원한인지, 개인의 신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쪽 사정이고.

“난 숭배자 전체가 적이거든.”

내게는 그놈이나 이놈이나 똑같은 장애물에 불과하다.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아서는 짜증 나고 귀찮은 것들.

“그냥 처리하죠? 무슨 말을 길게 합니까!”

패트가 달려든다. 쾌속하게 내지르는 단검. 리치가 차이가 확연하지만 놈은 개의치 않았다.

-카가가가가각!

단검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벗어나더니 흉갑을 긁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히지 않았다면 목을 그었을지도 모르겠다.

원격 이동?

놈의 손목을 베어 낼 생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녀석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고 단검은 거리를 무시하고 나타났다.

어째 위로 올라갈수록 괴상한 수법을 쓰는 놈들이 늘어난다.

뭐, 그러니까 여기 있는 거겠지만.

-콰앙!

발을 박찼다.

평범한 골드 등급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상대할 수 없는 놈은 아니다.

그저 한 번 휘두를 거 여러 번 휘둘러야 할 뿐.

-쾅! 콰가가각! 카아아앙!

시작은 수직 베기. 이어 몸을 틀며 사선을 그었고, 뒤로 빠져나가는 녀석 뒤로 어스 워를 펼쳐 퇴로를 막았다.

그사이에 진격하며 놈의 머리와 어깨, 손목, 발을 노리며 검을 휘둘러 댔으니.

“크으읍!”

쉴 틈을 주지 않고 뻗어 나오는 공격에 얼굴을 구기며 막아 내기 급급하다.

가끔 기습이랍시고 단검을 뻗어오기는 했다만.

-티잉!

몸을 비틀어 펠라인 세트로 막아 냈다.

온몸을 두른 갑옷. 녀석이 노릴 곳은 많지 않았으니까.

저게 녀석의 전부일 리는 없었으나. 그것도 사용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그, 그냥 죽이려는 거냐!”

“당연하지. 네놈한테 묻고 싶은 건 없거든.”

담담히 답하면서도 가르티를 주시했다.

녀석이 바로 나서기를 기대했으나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처리하는 수밖에.

“궤엑!”

“이런, 망할 개구리가!”

패트가 옆으로 던지듯 몸을 날리는 타이밍, 덕춘이가 녀석의 발목을 휘감았다.

힘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덕춘이의 힘은 생각 이상이었고 이윽고 균형을 잃은 녀석이 넘어지는 찰나.

-카가가가가각!

그대로 목을 내리치려는데 가르티가 검을 막아섰다.

팔이 변형된 건지 길쭉한 시커먼 검이 혼돈검을 버틴다.

‘힘이 좋아.’

얼굴에 여유가 있는 것을 보니 전력을 다한 거 같지는 않고.

나랑 비슷하거나 살짝 약한 정도가 아닐까 싶다. 탈모맨 수준은 절대 아니고.

그것보다.

‘혼돈이랑 비슷한 느낌인데.’

공격한 힘이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기묘한 현상. 마치 깊게 자고 난 다음 주먹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듯한 감각.

[SSS급 권능,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일렁입니다.]

이게 녀석의 권능인가. 여전히 어떤 건지 정확히 파악은 못 하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놈은 혼돈의 파편과 꽤 가까운 존재라는 것.

물론.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검강]

-차아아아앙!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불어넣은 마력에 혼돈을 더해 녀석을 쳐 냈다.

빠져나가던 힘이 단단해지면 가르티의 팔을 높이 튕겨 냈고, 그 틈을 타 파이어 밤을 터트리려는데.

-빠아아아악!

“크헥!”

가르티가 녀석을 거세게 걷어찼다.

공처럼 저 멀리 날아가는 녀석.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통로 쪽이다.

기회를 찾은 패트가 개처럼 뛰어 도망가는 건 덤.

천천히 검 끝을 땅에 댔다.

녀석의 얼굴은 기억했다. 권능이 통하는 것도 확인했고, 내 선에서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는 것도 분명하다.

“이게 네 선택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턱을 까딱였다.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는 녀석이 작은 한숨과 함께 안경을 고쳐 쓴다.

“후우. 너야말로 너무 쉽게 움직이는구나. 나에 대한 신뢰가 그렇게 없나.”

“당연하지. 나한테 말하지 않은 게 너무 많은걸. 저 녀석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잖아.”

“그건 부인하지 않지. 이렇게 될 거 같아 말하지 않고 있었네. 아직 이용해 먹을 것도 남아 있고.”

츠르르륵.

변형한 팔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린 녀석이 한 발 가까이 온다.

“패트가 도망칠 수 있게 놔두게.”

“내가 뭐 하러? 우선 너부터 잡고 저 녀석도 마저 치울 생각인데. 안 그래도 필요한 참이었거든.”

92층에서 받은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라도 패트의 피가 필요하다.

온몸에 마력을 돌리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녀석은 온전한 힘을 쓰지 못한다. 마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5성급 몬스터로 취급되고 있으니까.

기묘한 권능 덕인지 이상하리만큼 강한 힘을 보이긴 했으나 한계는 있을 것이다.

그런 내게 녀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죽여 봤자 의미 없다는 뜻일세. 여기는 게임. 죽어도 다음 게임이 시작되면 되살아날 테니까.”

“그건…….”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지. 그게 자네한테도 도움이 될 터이니. 그리고 하나 더.”

가르티가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이번 일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한 가지 재미있는 정보를 알려 주겠네. 자네도 마음에 들 거야.”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여는 녀석.

난 잠시 녀석의 말에 집중했고.

“…그거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이내 이를 드러내며 찡그리듯 웃었다.

90층대를 오르고 있는 상위 헌터.

그중 인류를 배신한 숭배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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