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12화 (612/740)

612화 그들이 나왔다

보스 룸에 들어온 우리는 잠시 상황을 살폈다.

거대한 공간에 온갖 흉악하게 생긴 장신구와 조각이 빼곡히 들어선 곳.

그 안을 채우고 있는 독기의 수증기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저는 착한 뱀이에요…….”

저기 고개를 처박고 항복의 깃발을 흔들고 있는 녀석 말고는 보이는 게 없다.

가볍게 놈을 무시하고 탈모맨과 흩어졌다.

“잘 봐 봐. 어디 숨어 있을지 몰라.”

“땅속에 있는 거 아니야? 그림자에 숨어 있는 거면 너도 알았을 거잖아.”

“그럴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어디서 뚝 떨어지는 걸지도 모르겠네.”

-콰직

-빠드드드득

수상하게 생긴 곳을 헤집고 부수며 돌아다녔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중간에 보스 몬스터가 사라졌다?

말이 안 된다. 아니면 나보다 먼저 누군가 와서 보스 몬스터만 처리하고 튀었다던가.

“따로 침입한 흔적은 못 봤는데.”

“나도. 우리가 처음일 거야.”

가르티 또한 현재 시점에서 이곳을 올 사람이 없다고 못 박았으니 여기까지 올 사람은 없을 거다.

그렇다면.

“설마 저거?”

소거법으로 남은 건 저기 팔뚝만 한 보라색 뱀뿐이다.

워낙 허접스럽게 생기고 잔뜩 쫄아 있어서 그냥 보스 몬스터의 간식 정도겠구나 하고 있었는데.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즛

놈을 향해 권능을 사용했다.

아무리 이상해도 남은 게 하나밖에 없다면 그게 정답이지 않겠는가.

[그레이트 베놈]

-던전의 주인.

-4성급 몬스터.

-거대한 덩치와 강력한 독은 누구도 얕볼 수 없습니다!

-감정 상태에 따라 덩치가 달라집니다.

-현재 잔뜩 쪼그라져 있습니다.

“오호, 이 녀석이 보스 맞네.”

그냥 보스도 아니고 던전 이름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녀석이다.

그만큼 강력하고 상징적인 존재라는 뜻이겠지. 원래대로였다면 여기서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흘낏, 고개를 빼고 돌려보던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잽싸게 바닥에 머리를 박는다.

이 녀석 왜 이렇게 쫄아 있나 했더니만.

‘내가 던전 진행하는 걸 봐서 그런가.’

처음에는 기습이라도 하려고 우리를 지켜보나 했는데 아니었다.

웬 미친놈이 단신으로 던전을 뚫고 있으니 기겁하며 보고 있던 것.

자고로 어중간하게 강한 녀석이 들이밀면 화가 나가 나지만 압도적으로 강한 녀석이 달려들면 기가 질리는 법이었다.

어쩐지 오자마자 꼬리 말고 항복하고 있다더니.

“야.”

“끼이이잉.”

“고개 안 들어? 어? 안 일어나?”

“예, 옙!”

건들건들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차서 맞추자 녀석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다.

최대한 몸을 바닥에 붙인 채 내 쪽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리며 슬금슬금 다가온다.

“이게 보스라고?”

“키햐아아악! 놔라! 어딜 감히!”

탈모맨이 다가오는 녀석을 덥석 잡아 올리자 몸을 팔딱이며 하악질을 한다.

원래 뱀도 하악질을 하던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말도 하는데 그런 걸 따지는 게 의미가 있나 싶다.

“걔 안 건드는 게 좋을 텐데. 나중에 큰일 난다.”

“키햑! 키햐아아악!”

“어어? 이놈 봐라? 하하하하!”

날뛰는 그레이트 베놈을 잡으며 껄껄거리는 녀석.

지금 당장이야 레벨이 30대라 몸을 휘청이지만 조금만 지나면 양손으로 찢고 다닐 텐데.

진심으로 경고해 줬지만 파충류라 그런지 지능이 좀 부족한 모양이다.

여기, 양서류인 덕춘이는 똑똑한데.

“그에에.”

작게 한숨을 내쉰 덕춘이가 폴짝 뛰더니 탈모맨이 잡고 있던 녀석의 목을 콱 잡는다.

“어디 개구, 켁!”

손아귀 힘이 얼마나 센지 목을 붙잡히자마자 입을 딱 벌리고 혓바닥을 내민다.

눈에 당황함이 가득하다. 여전히 몸을 뒤틀고 있긴 하지만 저건 날뛰는 게 아니라 경련 같은데.

뱀 앞에 개구리. 아니, 개구리 앞에 꼼짝 못 하는 뱀이라는 기묘한 광경을 보는 것도 잠시.

“그러다 죽겠다.”

“그에에.”

적당히 서열 정리를 끝낸 덕춘이를 말렸다.

이때다 싶었는지 냅다 탈모맨 뒤로 숨어 하악질을 하는 녀석.

뭔가 처음에 의도한 거랑 달라지긴 했지만 결정을 내리기는 해야 했다.

[니머리 탈모 Lv.39]

며칠간 폭업을 했기에 이제 레벨 업을 한 번만 더 하면 40레벨에 도달한다.

레벨이 높아진 만큼 요구하는 경험치 양도 늘어났기에 보스 몬스터를 잡으면 적당할 거 같았는데.

“좀 꼬이기는 했지만 일단 잡을까? 레벨 업 해야지. 들어 보니 이 녀석 잡으면 독니 세트도 나온다던데.”

“끼이이잉!”

“흐음. 어쩐다.”

내 말에 기겁한 녀석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자신의 생명줄을 쥔 게 탈모맨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열심히 꼬리를 흔든다.

“레, 레벨 업이 목적이라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헤헤. 제가 괜찮은 사냥터를 하나 알고 있습니다요.”

“사냥터라, 흐으음.”

턱을 쓸어내렸다.

굳이?

어느 쪽이 더 이득인가. 살짝 고민해 봤다.

녀석을 잡으면 40레벨은 확정. 강력한 독을 지닌 무기와 독에 대한 내성을 주는 아이템들을 구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첫 던전 클리어이니 업적도 세울 수 있을 거다.

그에 반해 이 녀석을 놔두면 언젠가 다른 플레이어들이 와서 그것들을 챙겨가지 않을까?

“진짜. 진짜! 괜찮은 사냥터입니다. 레벨이 쫙쫙 올라요!”

필사적으로 머릿짓, 꼬리짓하며 설명하는 녀석.

그 모습이 재밌는지 웃던 탈모맨이 녀석을 잡아 올렸다.

처음과 달리 축 처진 채 들린 녀석이 눈알을 굴린다.

“레벨 업은 딴 데서 하고 얘는 네가 데려가서 쓰면 되지 않아? 안 그래도 강한 애들 필요하다면서. 이 정도면 얼추 맞을 거 같은데.”

“얘를?”

데리고 갈 수 있나?

그동안 고등급 몬스터는 뽑기 아니면, 개척 중에 얻거나 이벤트성으로 직접 찾아오는 형식으로 영입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인류 측 필드에 있는 몬스터를 데리고 온 적은 없었다.

정확히는 시도해 본 적이 있기는 했는데.

“인류 측에 있는 놈들은 못 데려갈걸? 저번에 필드에 있는 놈들 잡아가려 했는데 마왕성으로 안 보내지더라.”

외출해서 3성급 이상 몬스터들을 포획하려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마왕성으로 전송할 수 없었다.

“마, 마왕성? 호, 혹시 그쪽 소속이십니까! 저 갈 수 있어요. 갈 수 있습니다, 형님! 데려가 주십시오. 일평생 소원이었습니다요!”

“형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언제나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형님! 형! 아, 형아!”

빽빽거리는 것이 뱀이 아니라 병아리 같기도 하고. 귀따가운데 그냥 싹둑 해 버릴까도 싶었지만 솔직히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어찌 됐든 4성급 몬스터. 현재 태생 4성급 이상은 4명뿐이었다. 팬텀 나이트도 탈 3성 몬스터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3성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인류를 향해 원정을 떠날 계획이었으니 데리고 가서 나쁠 건 없다.

단…….

“만약 6시간 내에 탈모맨이 레벨 업 못 하면 네가 죽는 거야.”

“넵! 충성충성! 저만 믿으십쇼!”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해야 했다.

* * *

[마왕성으로 복귀합니다.]

-우우우우웅

익숙한 빛무리가 사라지자 어느덧 마왕성에 도착했다.

며칠간 빡빡하게 일정을 소화해서 그런지 오랜만에 돌아온 기분.

‘성공적인 외박이었다.’

탈모맨은 40레벨을 찍었고 가장 경계해야 할 특전을 손에 얻었다.

이걸로 인류 측에서 무지성 공략을 하는 건 불가능. 정정당당하게 본인 목숨 내걸고 공략을 이어 나가야 한다.

이게 가장 큰 성과.

그 외에도.

“이곳이 마왕성! 형님… 감격, 또 감격입니다!”

“그래, 앞으로 네가 열심히 구를 곳이니까 잘 봐 둬.”

4성급 몬스터이자 던전의 보스몹인 그레이트 베놈도 데리고 왔다.

듣자 하니 일반 필드에 있는 몬스터들은 이동이 불가능하지만 유적이나 던전과 같이 고유의 영역을 지닌 놈들은 마왕성으로 이적할 수 있다고 한다.

후반부에 이르고 마왕성 영역이 커지면 그런 곳에 있던 놈들이 넘어오기도 한다나.

이 녀석이야 마왕인 내가 직접 가서 만났기에 바로 데려올 수 있었다.

당장 해야 할 것들은 다 했기에 마왕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좀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대도시에 들어가서 필요한 물건들도 좀 사고, 플레이어들 분위기도 살피고. 간만에 먹을 만한 음식도 좀 먹고.

탈모맨 녀석이 골드가 없어서 활동 자금도 따로 전해 줬다.

어찌 됐든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내 편 아니던가. 뭔가를 할 때도 골드는 계속 필요할 거다.

그렇게 꿀 같은 4시간을 보내고 마왕성으로 돌아왔는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하다?”

“전투적이고 좋지 않습니까요?”

마왕성의 기능이 확장되면서 훈련장에 우글우글 모여 있던 1성급 몬스터들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다들 무기를 쥐고 몸에 긴장을 한 채 돌아다니고 있었지. 군기가 바짝 든 모습이 나쁘진 않았으나 평소 뒹굴거리던 녀석들이 이러고 있으니 뭔가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빠른 걸음으로 마왕성으로 진입하자.

“왔다! 돌아왔다아앗!”

뽈뽈뽈 복도를 날아다니던 삐에르가 빼액거리며 정신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데시벨 높은 거 봐라. 귀에서 피 나겠네.

생체 다이너마이트에 이어 생체 경보기 기능까지 있을 줄이야.

아무튼 효과는 대단해서 어디 한곳에 모여 있던 것으로 보인 간부들이 우르르 몰려 왔다.

평소 안 보이는 곳에 박혀 있는 가르티까지 함께 있는 것이 뭔가 일이 있긴 한 모양.

가장 먼저 히메룬을 찾았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히메룬에게 전권을 넘겨 놨다. 짬으로 따지자면 가르티에게 넘기는 게 맞았지만 신뢰가 안 가서.

“오셨습니까, 마왕님.”

“마, 마왕?”

마왕이라는 말에 베놈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날 올려다본다.

눈이 반짝이는 것이 괜히 부담스러운데.

“내, 형님이… 마왕? 형아!”

“뭡니까, 이건. 애완동물이라도 들인 건가요.”

“그건 아니고 새로 영입한 애. 뭐 모르니까 좀 데리고 다녀 줘.”

일단 히메룬도 하체는 뱀이니까 통하는 게 있지 않을까.

“이 몸의 형님이 마왕!”

“…교육을 하긴 해야겠군요.”

“저 예의 없는 것을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주군?”

정신 못 차리는 베놈과 눈이 가려져 있음에도 벌레 보듯 보는 게 느껴지는 히메룬. 검 손잡이에 손을 얹는 나이트를 보니 알아서 잘할 거 같다.

아무튼,

“무슨 일인지 보고.”

이쪽 상황부터 파악해 보자.

“적들이 침공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전부입니다.”

으음.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쓸었다.

침공이야 늘상 있는 일이다. 저번 대규모 몰살 이후에도 간간이 침공을 해 오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위험하기는 해도 성장을 위해서는 침공만 한 게 없는 것이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외박 막바지, 대도시인 휴펜피디아에 머물 때 플레이어가 가득했으니 침공을 진행 중인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텐데.

“18스테이지까지 밀렸어요. 20스테이지까지는 어느 정도 구성이 됐지만 이후에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18스테이지?”

이게 무슨 소리야. 저번 침공에서 뚫린 건 기껏해야 15스테이지였다.

고작 며칠 비웠을 뿐인데 18스테이지까지 진행 중이라고?

“언제 들어온 녀석들인데.”

“이틀 전입니다.”

고작해야 이틀. 이전 15스테이지까지 파고든 녀석들도 4일이 넘게 걸렸었다. 그만큼 스테이지를 뚫는 것은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한다.

스펙이 높아지면 낮은 단계의 스테이지는 그냥 깨겠지만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니까.

사람인 이상 체력과 컨디션 관리도 필수고 잠도 자야 한다.

이런 조건을 무시하고 이틀 만에 18스테이지에 도달했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몇 없다.

“그놈들이군.”

“맞다. 그들이 유적을 클리어했지.”

놈들이 이렇게 빠르게 공략을 이어 나가는 이유는 하나.

최초 클리어 보상을 독식하기 위함.

그것도 내가 아직 준비하지 못했을 때 말이지.

한마디로 이건.

“빈집털이.”

눈을 번뜩였다.

마왕성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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