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1화 뭐 하냐?
마을과 충분히 거리를 두고 떨어진 곳.
산맥을 타고 올라가다 중간부터 나무가 사라지고 바위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협곡이다.
과거에는 물이 흘렀던 건가. 다채로운 색의 자갈이 쫙 깔려 있는 광경이 볼 만했지만 이내 시선이 다른 곳으로 쏠렸다.
저기, 초록 쫄쫄이를 입고 나무 기둥을 허벅지로 조여 매달린 채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탈모맨이 보였으니까.
어그로 미쳤네.
허공을 보며 히죽거리는 것이 커뮤니티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중독되다시피 커뮤니티에 살길래 평소 어떤 모습으로 하나 궁금했는데 저러고 있었나.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질린다고 해야 할지.
“나 왔다.”
“오! 공듀 왔, 억!”
-따악!
냅다 자갈을 던져 녀석의 머리를 맞췄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하하하하! 하고 웃는 녀석.
“밖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맞네. 공공아이!”
“아니, 그. 그래. 그게 어디냐.”
뭐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누굴 탓하겠는가. 이렇게 살아온 내 업보지.
“그에에.”
턱. 덕춘이가 어깨에 손을 올린다.
역시 너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덕춘아!
감동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니 경멸하는 눈빛이 보인다.
네가 그렇게 바라보면 안 되지. 내가 네 주인인데. 좋든 싫든 우린 운명공동체다. 받아들여라.
“따로 쫓아오는 녀석은 없었고?”
“몇 명 쫄래쫄래 따라오길래 좋게 타일러 줬지.”
그러면서 주먹을 붕붕 휘두르는 것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허술해 보이기는 해도 특임대에 있던 탈모맨이다. 전술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일반인 출신인 나와 달리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뜻.
추적이 따라붙거나 할 일은 없을 거 같았다.
“커뮤니티로 말했지만 이 층에는 숭배자가 있어. 분명 플레이어나 다른 NPC 중에도 있을 거야.”
“그놈의 숭배자들은 어딜 가나 있네. 이전 층에서도 만나서 두들기다 왔는데.”
90층대에 들어서고 난 숭배자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지만 다른 멤버들은 아닌 모양.
종종 커뮤니티에 숭배자 욕하는 글이 올라오고는 했다.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연합 사람들도 그랬으니 여전히 놈들은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마왕성 쪽은 괜찮고?”
“여기도 한 명 있어. 지켜보는 중이야.”
“오? 웬일로 바로 안 잡고 지켜봐?”
“숭배자 집단을 배신하고 싶다는 거 같은데 온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분명 내가 내린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고, 여러 도움을 주고 있는 건 맞지만 의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숭배자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워낙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해 공작을 펼치던 녀석이라 역으로 첩자일 가능성도 버릴 수 없기 때문.
그러니까 이거다.
“비즈니스 관계인 거지.”
“비, 비지. 찌개 맛있지. 음. 맞아.”
뭐라는 거야.
그래도 비즈니스 정도는 알아야지 이 양반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핥짝이 말대로 날 잡아서 영어 공부를 시키든 해야겠다.
쁘찡 연합은 미국의 빅스타 길드, 로얄 나이트와도 인연이 있는 곳.
나중에 탑에서 나가더라도 교류하거나 합동 작전을 할 일이 생길 테니 미리 공부를 해 둬야…….
“아, 통역 스킬 있지.”
생각해 보니 단어가 머리에 없어 쓰기가 안 될 뿐 읽고 말하고 듣는 건 다 된다.
됐다. 이거야 나중에 생각하고.
녀석의 머리에 떠오른 창을 확인했다.
[니머리 탈모 Lv.34]
커뮤니티 닉네임을 그대로 쓰는 건 사뿐히 무시해 주고 레벨을 체크했다.
내가 마왕성에 있는 사이, 탈모맨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닌지 그새 레벨 업을 3번이나 했다.
내가 오면 안 된다고 해서 침공도 안 했을 텐데.
‘어쩐지 오면서 몬스터가 없더라니. 다 잡았구만.’
나야 편하게 올라왔으니 고맙지.
첩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유적에 들어선 화무선과 기타 등등은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탈모맨이 게임 중반쯤에 유적에서 나온 걸 생각하면 좀 더 시간이 흘러야 클리어하지 않을까.
물론 탈모맨과 달리 작정하고 파티를 꾸린 채 들어갔으니 공략 기간은 더 짧을 거다.
‘놈들이 나왔을 때 추정 레벨이 대략 37 정도.’
확실하다. 이 정도면 가능성이 있다.
가장 먼저 축복을 받는 건 탈모맨이 될 거다.
자갈을 파헤쳤다. 여러 색깔의 자갈이 흩뿌려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보랏빛을 띠는 자갈이 유독 몰려 있는 곳.
여기가 가르티가 말한 히든 피스 중 하나.
여러 회차 진행된 게임. 가르티가 위치를 알 정도면 플레이어들에게도 퍼졌을 만한 유적이었지만 주변에 사람은 없었다.
도전 난이도에 비해 얻는 건 그만큼 많지 않았으니까.
던전을 클리어하고 난 후에는 공략에 필요한 장비를 얻을 수 있지만 정작 도전할 때는 그 장비를 얻을 수 없어 버려진 곳.
오히려 내게는 좋았다.
“미리 말해 두기는 했지만 빠르게 끝낼 거야. 오래 머물면서 안에 있는 걸 모두 챙기면 좋겠지만 레벨 업이 우선이니까.”
“그럼! 나만 믿으라고.”
퉁. 자신의 가슴을 치는 녀석.
암 믿고말고. 다른 놈도 아니고 탈모맨인데 어련히 잘하겠지.
하지만…….
[던전, 그레이트 베놈에 입장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해결한다.
* * *
-푸쉬쉬쉬쉬
-푸화아아아악!
갈라진 바닥과 벽에서 흘러나오는 맹독 가스.
축축한 동굴에 가스가 차올라 안개라도 깔린 것처럼 뿌예진다.
초록색 빛을 띤 괴상한 식물이 피를 잔뜩 머금은 모기 배처럼 부풀더니 그대로 터져 사방에 독을 뿌려 댄다.
돌까지 녹여 버리는 독한 물질이었지만 좋아하는 녀석도 있었으니.
“게헤헤. 챱!”
덕춘이가 요플레 먹듯 양손에 독액초를 잡고 쪽쪽 빤다.
마음에 드나 본데. 나도 마음에 든다.
“이거 가져다 키우면 쓸 만하겠다. 안 그래도 흡혈충으로는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겸사겸사 덕춘이 간식으로도 쓰고.
독액초를 뜯어 따로 들고 온 가방에 챙겼다. 혹시 몰라서 가져왔는데 잘 가져왔다.
“키헤에엑!”
“어허.”
천장을 타고 몰래 기어 오다가 독이빨을 번뜩이며 달려드는 도마뱀을 잡아 그대로 양쪽으로 뜯었다.
피마저도 독성이 있는지 바닥에 떨어진 피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던전 이름부터 그레이트 베놈이더라니 몬스터고 식물이고 죄다 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니 플레이어들이 기겁을 하지.
환경 자체가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는 곳이다. 특히나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플레이어라면 더더욱 노릴 이유가 없지.
그나마 덤벼드는 놈들 대부분이 2성급 정도에 덩치가 작은 편이긴 했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니었다.
-구구구구구구구궁
지축을 울리는 굉음 거대한 뭔가가 온다는 뜻이었고.
“구아아아아악!”
“오, 젤라틴 웜이다.”
보라색 반투명한 젤리처럼 생긴 데스 웜이 원통형 아가리를 들이밀며 덤벼들었다.
무는 힘도 엄청나고, 베어 내도 독액을 뿜는 녀석. 불로 지져도 독가스가 타올라 까다롭고 강력한 몬스터로 분류되었으나.
[독 내성(SSS) Lv.2]
내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거대한 몸으로 들이박는 녀석을 붙잡고 힘을 줬다.
말캉한 감촉이 나름 나쁘지 않았으나 이걸 가지고 놀 시간은 없다.
[파이어 밤(SSS) Lv.6]
-콰아아아아앙!
화끈한 열기와 함께 놈의 몸통을 타고 불길이 관통한다.
독성마저도 태워 버리는 화력에 재가 되어 바스러지는 녀석.
뚫고 지나온 길이 터널이 되어 바람이 한차례 분다.
“어우. 먼지.”
아무래도 깊숙하게 이어진 동굴이라 그런지 먼지가 많다. 독에 부식되어 생긴 가루도 많고. 이래서 환기를 자주 해야 하는 건데.
[던전, 그레이트 베놈의 주인이 당신의 행보를 지켜봅니다.]
“저거 아직도 보고 있네.”
던전에 들어오면서 주기적으로 떠오른 알림.
던전 주인쯤 되면 보스룸에 박혀 있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건가.
처음에 알림이 떴을 때는 혹시나 튀어나오지 않을까 긴장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척. 알람이 떠오른 천장을 가리키며 목 긋는 시늉을 했다.
“좀만 기다려. 곧 가니까.”
잠시 선전 포고를 한 후 뒤를 향해 손을 모았다.
“이제 와도 돼! 오는 길에 몇 놈 남겨 뒀으니까 막타 치고!”
“───간다아앗!”
저 멀리 메아리치며 들려오는 탈모맨의 목소리.
그렇다.
난 지금 탈모맨을 버스 태워 주고 있다.
이러나저러나 게임의 형태를 지닌 층이다. 특히나 플레이어들은 RPG.
RPG 하면 파티 플레이. 뉴비들의 레벨 업을 도와주는 고인물도 있기 마련 아닌가.
“경험치도 나눠 먹고 말이지.”
특히 막타를 치면 경험치가 더 들어오고는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인류 측이 아니다 보니 탈모맨과 파티를 맺을 수 없어 사실상 처치한 몬스터의 경험치는 모두 탈모맨이 먹는다.
애초에 난 마왕 역할이라 레벨이 의미가 없기도 하고.
“좀 할 만해?”
“보다시피, 쿨럭! 멀쩡, 케헤에엑! 하지!”
창백해진 얼굴에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 주먹을 드는 녀석.
누가 봐도 안 괜찮아 보이는데.
어쩔 수 없다. NPC의 경우 레벨을 올리면서 직업을 선택하고 스킬 트리를 올리는 형식이지만, 등반가의 경우에는 레벨에 따라 기존 능력치의 일부가 되돌아오는 형식이라서.
지금 탈모맨 레벨 30대니까 독 내성 스킬도 기껏해야 B등급 될까 말까 한 수준일 거다.
잠깐 활동하는 거라면 몰라도 격렬하게 전투를 치르고 장시간 있기에는 애매하다는 뜻.
나야 괜찮지만.
이 부분을 이용한 거다.
내가 외박 중이라 플레이어를 못 패지 몬스터를 못 패나.
“다행히 늦지는 않겠군.”
던전에 들어온 지 사흘째. 내일이면 외박 4일 차.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내일이면 도로 마왕성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원래는 이렇게까지 강행군할 생각이 없었지만 언제 놈들이 유적에서 나올지 모른다는 압박감과 나 또한 계속 마왕성을 방치할 수는 없다는 책임감에 속도를 높였다.
같이 온 녀석이 탈모맨이라서 더한 것도 있었고. 다른 건 몰라도 피지컬은 멤버들 중 원탑이다.
“마셔. 좀 나을걸.”
“단백질 보충제?”
“그거겠냐. 생명수야.”
내심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탈모맨이 생명수를 마신다.
그제야 혈색이 돌아오는 녀석. 내색은 안 해도 상당히 힘들었을 거다.
잠시 저린 몸을 풀 시간을 주고 동굴 앞에 위치한 문을 살폈다.
커다란 뱀이 괴기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보스가 뱀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거겠지.
지금까지 나타난 몬스터와 던전의 난이도를 생각했을 때 여기서 나올 몬스터는 최소 3성급. 어쩌면 4성급 몬스터일지도 모른다.
‘가르티가 이 던전은 플레이어들이 중반 지나서 독 쓰는 몬스터 상대하기 전에 들른다 했지.’
난이도가 있다 보니 어느 정도 스펙을 갖추고 준비를 한 다음 온다고 했다.
괜히 일찍 들어가 봤자 고생만 하다 나오니까.
그럼 가 보실까.
난 탈모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오오오오!”
카앙! 카앙!
탈모맨 또한 건틀릿을 부딪치며 의욕을 되살렸다.
-끼이이익
거친 표면과 달리 저항감 없이 열리는 문.
어두운 공간 세로로 찢어진 동공 한 쌍이 얼핏 보인다.
경고하듯 떠오르는 메시지.
[던전, 그레이트 베놈의 주인이 침입자를 주시…….]
[…하지 않습니다.]
“음?”
“어?”
뭐야.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거대한 홀.
파이어로 주변을 밝혔다. 척 보기에도 강력한 몬스터가 포스를 풍기며 우리를 반겨야 할 분위기인데.
“끼이이이잉. 끼잉.”
저기 팔뚝만 한 사이즈의 보라색 뱀이 벽에 머리를 박고 떨고 있다.
손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만든 건지 조잡하게 흰색 천을 묶어 만든 깃발을 꼬리로 잡고 흔들고 있었다.
“…항복. 항보오옥… 뱀 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