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화 접선하러 갑니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성공적으로 침공을 막아 내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이 흐름을 끌고 가야 해.”
누가 뭐라 하더라도 마왕 입장에서 이 게임은 디팬스 기반으로 굴러간다.
마왕성을 성장시키고, 몬스터를 뽑아 플레이어들이 끝까지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니까.
적어도 기본적인 구조는 그러했지만 반드시 그렇게만 할 필요는 없었다.
“스테이지에 쏟을 재화를 몬스터에 투자해야 할 타이밍이야.”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인류 측 타격이 컸고, 그에 대한 보상도 상당했다.
빈곤했던 시작과 달리 지금은 여러 곳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는 뜻.
이대로 각 스테이지를 강화하거나 새롭게 보스 몬스터로 지정한 녀석들을 각성시키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건 정답이 아니지.’
정말 그걸로 충분한가 스스로에게 되물었을 때 그렇다 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수동적이다. 적들이 덤벼들기 전까지는 손가락 빨면서 재정비를 거듭해야 한다는 것.
“저번 침공 때문에 적들은 위기감을 느꼈을 거야. 스테이지에 대한 불신도 생겼을 것이고.”
“맞는 말입니다. 쉽게 다시 공격해 오지는 않겠죠.”
히메룬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름 풍족해졌기 때문일까, 게임 초반보다 여유가 생긴 모습이었다. 잘 먹어서 그런지 얼굴에 생기도 돌고.
그동안 혼자 마왕성 살피느라 고생을 많이 하기는 했지.
“게임이 중반을 지난 만큼 대비는 많이 할수록 좋습니다. 축복받은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할 때가 통계적으로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어요.”
“놈들에 비해 우리 쪽은 높은 등급의 몬스터가 적으니까.”
그녀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지금 보스 몬스터로 넣어 둔 놈들도 높아 봐야 3성급이다.
40레벨대 플레이어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히메룬과 같은 4성급 몬스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여러 조합과 함정으로 녀석들을 상대해 왔다. 하지만 아직 플레이어가 평균 레벨이 20대여서 통한 방법.
“시간은 아직 있다.”
치고 나가는 녀석들이야 오래지 않아서 40레벨 확정이지만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아니다. 끽해야 30레벨대에 진입하겠지.
플레이어 간의 격차는 이미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소수의 강자? 평균적인 플레이어?
전자를 선택하면 지출이 크고, 후자에 맞추면 강자들에 의한 피해가 커진다.
내 선택은 이거였다.
‘전장을 바꾸면 되지.’
뭐 하러 둘 중 하나에 맞춰서 진행하나. 놈들이 여기서 설치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것을.
굳이 스테이지에서 맞설 필요가 없다.
누가 이기든 전장이 된 곳은 피해를 받기 마련. 놈들이 오가며 죽인 몬스터만큼 난 다시 채워 넣어야 한다.
1, 2성급이면 몰라도 3성급부터는 나도 함부로 방치할 수 없다.
40레벨대 플레이어들은 스테이지에 보스 몬스터로 배치되어 있는 3성급들을 썰어 버릴 능력이 있고, 그때마다 우리도 피해를 보겠지.
그렇다면 정신을 뒤흔드는 거다. 이쪽은 쳐다도 못 보게. 한바탕 난리가 나도 난 병력만 잃고 끝나도록. 반면에 인류 측은 국토가 황폐해지고 시설들을 잃게 될 것이다.
기반을 잃은 병력에게 미래는 없다. 어떠한 지원도, 안전하게 쉴 장소도 없어진다는 뜻이었으니까.
‘뭐,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당장은 준비하는 단계지만.’
목표는 설정했다면 단계적으로 중간 단계를 마련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마왕성은 말할 것도 없이 개척지를 늘리는 것.
생산 시설을 만들거나 광산과 같은 자원 요소를 발견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마왕군을 늘리는 데 가장 가성비 좋은 게 이거였다.
“그래. 미개척 지역도 점점 수준이 높아져야지.”
가르티가 보고한 서류를 살피며 입꼬리를 올렸다.
개척 중인 지역에서 등장한 몬스터의 종류와 등급, 개체수. 해당 지역의 요건 등등 그동안 마왕 역할을 해 온 자의 연륜이 느껴지는 보고서였다.
계획을 마련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미개척지를 찾아다녔다.
플레이어가 스테이지를 공략할수록 강력한 몬스터가 나오듯 미개척지 또한 깊숙이 들어갈수록 강력한 몬스터와 보상이 등장했다.
게임이 중반에 이른 지금, 1성급은 물론이요, 2성급도 흔히 볼 수 있었으며 3성급 몬스터도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척지의 몬스터는 내 수하로 둘 수 있으니, 영역도 넓히고 아이템도 얻고 몬스터도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했다.
그만큼 탐사할 때 보낼 몬스터의 수준도 올라가야 했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이미 인류 측에 장비를 팔아 골드를 두둑이 벌기도 했고, 남은 불량품들은 다시 녹여 페이둠이 새로운 무기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쪽은 순조롭고.
“가르티는 개척지 상황 계속 추적해 주고, 나이트.”
“예, 주군.”
“나이트, 병력 배치는 끝났지?”
“스테이지에 각각 배치 완료했고, 현재 침공을 대비한 함정을 파고 있습니다.”
“좋았어. 부비 트랩은 필수지.”
팬텀 나이트 또한 맡은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몬스터가 죽어서 비어 버린 곳에 새로 배치하고 각종 함정을 준비했다.
1, 2성 몬스터야 각성해도 큰 변화가 없다. 있다 하더라도 진화석을 사용하기에는 아깝고.
장비도 어느 정도 맞췄으니 디팬스 장비를 통해 방어선을 강화하는 게 정석이었지만…….
‘그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어차피 저등급 몬스터는 많으니 죽어도 금방 채운다.
반면에 디팬스 장비는 망가지면 비싼 돈 들여서 새로 사야 하고.
자고로 말단의 노동력만큼 값싼 건 없는지라 디팬스 장비를 대신해서 여러 함정을 만드는 중이었다.
마왕성에 필요한 시설 등은 히메룬이 담당해 주고 있으니 내가 따로 신경 써 줄 필요 없다.
“으아아암.”
머리 근처에서 눈을 끔뻑이며 날아다니는 삐에르.
스트레스 받으면 폭발을 일으키는 특성상 꿀을 빨고 있는 녀석을 제외하면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덥썩
“으엥? 왜?”
“네가 할 일이 있어.”
“나 하다 짜증 나면 큰일 날 텐데? 후후후.”
이래도 내게 일을 시킬 거냐며 웃는 녀석.
진짜 딱밤 세게 치고 싶네.
그래도 괜찮다.
“맞아. 그걸 하면 돼.”
“응? 으으응?”
그런 것도 다 이용해 먹을 방법이 있으니.
안 그래도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인류 측에는 침공이 아니더라도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
유적과 던전.
현재 인류 측 최상위권 플레이들 모두 유적을 클리어했다. 탈모맨도 그중 한 명.
여기서 든 의문.
‘여기라고 없을까?’
아무리 지배자가 만든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이곳은 탑. 시스템은 잔혹할지언정 공정하다.
내가 예상한 게 맞다면 마왕성 영역 어딘가에도 유적 같은 것이 있을 거다.
마왕성 내부에도 그렇고, 개척지에도 그렇고 수상쩍은 곳이 몇 군데 있다.
골짜기 채광 지역에서 유독 깨지지 않는 바위라던가, 인공 구조물로 보이는데 절반이 수정구에 박혀 있어 확인이 불가능한 곳이라던가.
땅을 파내든 충격으로 흔들든 해 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만큼 유적은 파괴 불가 옵션이 달려있을 테니 무너질 걱정도 없다. 때마침 여기 놀고 있는 잉여 인력도 있고.
녀석도 좋아할 거다. 알차고 보람차게 땀 흘리며 보내는 나날을.
따뜻한 눈으로 삐에르를 바라봤다. 항상 얄미웠던 녀석이 갑자기 예뻐 보인다.
“…생체 다이너마이트.”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으으응?”
* * *
마왕성 로비.
등급 상관없이 모두가 바쁘게 움직인다.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자 내가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움직이는 모양.
미개척지 십여 개를 뚫어 뒀고, 마왕성 기능도 추가로 3개 개방했다. 중간에 간부급이 나오길 바랐으나 성과는 딱히 없었다.
하기야 첨탑이나 지하 감옥 같은 곳도 따로 관리하는 몬스터가 없어서 내가 지정해 줬었다. 대장간을 개방하고 만난 페이둠과 도서관에 있던 가르티가 특이 케이스일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도 없었냐고 하면 거짓말인 게.
“저기? 안에 있어?”
“…안에 아무도 없어요오.”
한 명 있기는 했다. 간부로 추정되는 녀석이.
문을 두드리자 희미하게 늘어지는 목소리.
단순 장비야 이제 충분히 만들 수 있어 포션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 연금 공방을 개방했는데 누군가 있었다.
분명 인기척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귀신같이 사라진다.
정말 사라진 건 아니다. 잘 숨어 있는 것이지. 권능을 통해 찾아내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랬다가는 사이가 안 좋아질 거 같아 최근에는 문 너머에서 말만 건네고 있다.
페이둠과 달리 공방에서 포션을 제작해도 은근한 시선만 느껴질 뿐 모습을 드러내질 않아서.
“외출하고 올 거니까 이야기한 거 잘해 주고, 필요한 거 있으면 히메룬한테 말해. 알겠지?”
“…….”
대답은 없었다.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인가. 낯을 많이 가린다던가.
아직까지 이름도 모르는 게 말이 되나 싶기는 했지만 별수 있나. 싫다는데.
또 모른다.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종족 특성 때문에 나오지 않는 걸지도.
히메룬도 메두사라 석화의 저주를 남발하지 않기 위해 눈을 가리고 다니지 않던가.
이거 뭐 슈레딩거의 간부도 아니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파괴의 요정인 삐에르는 조용할 틈이 없는데.
“안 가! 안 가아아아아아! 싫어어엇!”
“자꾸 그러면 사탕은 없습니다. 저기 맛이라고는 느끼지도 않고 우적우적 씹어 대는 오크들한테 줄 거예요. 이 아주 맛있는 사탕을.”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빼애애애액! 거리며 유적 발굴을 위해 히메룬의 양손에 잡혀 끌려가는 모습에 괜히 뿌듯해졌다.
살짝 붉어진 얼굴에 힘차게 바둥거리는 몸짓.
역시 사람이 일을 하면서 살면 생기가 도는구나.
가는 길에 나를 알아본 히메룬이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발굴에 진전이 있습니다. 돌아오시면 결과가 나올 거 같군요.”
“그래. 고생이 많아. 파이팅 하고.”
“마왕! 마와아아앙! 나 다른 일 할래! 나 일 좋아해!”
“좋아한다니 다행이네. 그래. 즐기는 자가 일류다!”
“야──!”
요즘 몸이 허해졌나. 귀가 잘 안 들리네.
아무튼. 오늘도 착한 일을 했으니 이제는 나쁜 일을 할 차례다.
물론.
“적들한테 나쁜 일이지만.”
[외박권(3박 4일)을 사용합니다.]
* * *
-파아아아아앗!
빛과 함께 인류 측으로 전송되었다.
바닥에 안착하자마자 지도를 꺼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외출을 몇 번 하다 보니까 지리를 찾기 쉬워졌다. 내가 눈썰미가 미친 듯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고.
“파란색. 네버 데일 스타팅 지점 근처군.”
내가 인류 측에 뿌려 둔 첩자들이 해 둔 표식 덕분이다.
나무 높이 묶여 있는 파란색 천. 사냥꾼과 약초꾼으로 위장한 첩자들이 필드 곳곳을 돌아다니며 해 둔 거다.
천에 박힌 번호를 보니 이대로 위로 올라가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좋아. 가 보자.”
콰앙!
발을 박차며 달렸다.
이번에는 외출이 아니다. 무려 외박권을 여러 개 사서 사용하는 것이지.
알뜰히 쓰던 골드가 소모됐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그 골드가 아깝지 않게 사용할 거니까.
-띠링
커뮤니티 알람이 울렸다.
[니머리 탈모]: 공듀! 나 도착했는데 어디에 있어? 여기서 놀고 있으면 되나?
[냥냥펀치]: 뭐냥. 둘이 뭐 하냥!
[정수리 핦짝]: 뻘짓 하거나 나쁜 짓하거나 이상한 짓하겠지.
[냥냥펀치]: 아하! 너무 당연한 질문을 했음.
[니머리 탈모]: 하하하하! 건실 청년인 내가 그럴 리가.
[정수리 핥짝]: 니 머리카락이나 건실한 건 어떨까?
[냥냥펀치]: 헉! (건)실 같은 머리카락. 아직 한 줌 남았구나…….
저마다 떠드는 녀석들.
피식 웃으며 속도를 올렸다. 탈모맨과 만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