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화 유적이겠지
자연스럽게 정문을 통해 휴펜피디아에 진입했다.
지도를 만들기 위해 외출을 여러 번 해 왔다. 당연히 휴펜피디아 근처도 돌아다니기는 했었는데.
‘직접 안으로 들어온 건 처음이군.’
당시에는 다들 레벨이 낮았던 터라 홀로 안으로 들어가면 눈에 너무 띄어서 진입하지 않았었다.
그저 지대가 높은 지역으로 이동해 간단히 내부 구조를 파악했을 뿐.
특히나 화무선에게 정체를 들킨 후였던 터라 더 조심했던 것도 있다.
지금이야 다들 2차 전직을 완료했고 이곳을 메인 지역으로 사용하니 상관없었다.
자고로 나무는 숲에 숨기라 했듯이 북적이는 인파 속, 나 한 명에게 집중하는 이는 없었으니까.
“이번에 경험치를 쫙 뽑았다니까.”
“침공하면 좋기는 해. 사냥터에서 하는 건 좀 아쉬운 게 있더라고.”
“8스테이지 가 봤냐? 미친 흡혈충이랑 흡혈 몬스터 쫙 깔려 있더라.”
“거기 좀 그렇지. 이번에 마왕이 악랄하게 꾸몄던데?”
“차라리 몬스터들로 도배해 놨으면 모를까. 벌레 떼는 생각도 못 했다고.”
저마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플레이어들.
대장간으로 가 장비를 수리하는 이들도 보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약을 들어 올리며 살지 말지 고민하는 이들도 있었다.
살짝 난잡한 공간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치안을 유지한다. 아무렇게나 떠들고 야단을 떠는 이들도 병사들은 건들지 않았다.
‘병사 잘못 건들면 수배령이 떨어지기도 한다고 했었지.’
저걸 이용해 히든 루트를 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전대 마왕이 가르티가 들려 준 썰 중 하나. 시작은 도망자, 최종적으로 이방인 타이틀을 얻으면 직업 제한 없이 장비를 착용할 수 있다나.
만능 혹은 잡캐가 되기 딱 좋은 방법이었는데, 당시에 이 타이틀을 딴 녀석 직업이 웨폰 마스터라 고전했었다고 했다.
도끼 휘두르고, 석궁 쏘고, 스크롤 북에서 마법 날려대면 그게 먼치킨이지.
정작 막타는 뒤에서 보조해 주던 연금술사가 먹었지만.
체력과 마력을 많이 쓰는 직업이다 보니 그것을 보충할 포션을 주는 인물이 필요했었다고.
막바지에 독약이 든 걸 먹이고 연금술사 본인이 마왕을 처치함으로써 <역사는 승리자의 것> 엔딩을 봤다고 했다.
듣자 하니 엔딩 크래딧도 따로 있다던데.
흠, 턱을 긁적였다.
‘엔딩 크래딧. 이 부분이 중요해 보인단 말이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엔딩을 봐야 한다.
문제는 그 엔딩이 어떤 엔딩이냐는 것. 동시에 정말 아무 엔딩이나 상관없는지가 의문이었다.
막말로 마왕성에 있는 몬스터 싹 죽이고 나까지 자살하면, ‘짜잔! 사실 마왕군단은 없었습니다!’ 엔딩이 되는 거 아닌가.
내가 본 엔딩 목록에는 이런 게 없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짓을 한 적이 없었을까? 미친 척하고 해 볼 수도 있는 건데.
이 부분은 가르티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한다. 놈이라면 알고 있을 테니까.
당장 물어볼 건 아니지만.
-타악
골목을 돌고 돌아 시계탑 위로 올라갔다.
근처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 어디에서든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르티는 이곳 어딘가에 있다. 녀석에게 내린 지시는 화무선을 비롯한 몇몇 신경 쓰이는 자들을 파악하는 것.
침공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혹시나 내가 꾸민 계략을 눈치챈 건지 알아내라고 했다.
나 또한 가르티를 쫓으며 그런 낌새가 있는지 확인해볼 생각.
“지금까지 사람들 떠드는 걸 봐서는 모르는 눈치던데.”
본인들이 착용한 장비에 하자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곳에도 대장간이 있는 만큼 혹시나 알아보는 이가 있지는 않을까 했는데 페이둠의 말이 맞았다.
녀석은 휴펜피디아에 있는 대장장이들은 모두 허접한 쓰레기라고 했었으니까.
수도에는 들어가야 쓸 만한 놈들이 있다나.
‘수도라.’
2차 전직이 휴펜피디아라면 3차 전직은 수도로 가야 한다.
상위 직업을 얻기 위함도 있고, 갖가지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에 모두 이쪽으로 가게 되어 있다.
몇 가지 특수한 루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한 번은 들를 만한 곳.
만약 화무선이 진짜 남들보다 빠르게 3차 전직을 하느라 침공하지 못한 거라면 수도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르티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으려나.”
화무선의 위치가 파악되지 않는 지금, 가장 우선적으로 가능성에 두어야 하는 곳이다.
가르티가 아는 것이 많다고는 하지만 모든 히든 루트를 일일이 가 볼 게 아니라면 수도 먼저 확인한 후 가능성 있는 곳을 뒤져 보겠지.
내가 시계탑 위로 올라온 것도 마찬가지.
수도로 향하는 북문으로 녀석이 지나가는지 확인해 보고 있다.
가르티가 최고 등급이 5성이라고는 하지만 대놓고 깽판을 칠 수는 없다.
외출 상태인 나도 그렇지만 첩자 또한 플레이어와 전투가 금지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복귀 기능이 있기도 하고.
이유는 같았다. 첩자랍시고 강력한 몬스터 보내서 깽판 치면 밸런스가 안 맞으니까.
싸우고 싶다면 정식으로 침공을 해야만 했다.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올 게 아니라면 녀석도 플레이어인 척하던가 할 거야.”
아니면 일반 상인으로 위장할 수도 있고. 확실한 건 고블린의 형태를 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그건 너무 눈에 띄기도 하거니와 내가 짐작하기로는 녀석은 변신하는 능력이 있다.
능력을 눈치챈 건 화무선을 만났을 때.
난 분명 사람의 모습이었음에도 녀석은 마왕을 언급했다.
그 또한 가르티와 싸운 전적이 있었으니 직접 놈을 봤다는 건데, 만약 가르티가 계속 고블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날 보고도 마왕을 떠올리지는 않았을 거다.
‘당장 첩자로 떠날 때 아무런 준비 없이 가기도 했고.’
권능을 사용해 이동 중인 이들을 확인했다.
외형으로 파악이 불가능하다면 권능을 사용하면 그만이다. 녀석의 정보는 깨져 있으니 찾기 쉽다.
어떻게 움직일 거냐.
난 팔짱을 낀 채 성을 노려보았고.
“…음?”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 한가운데, 단상 위로 올라온 고블린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고블린이라는 게 흔하기는 하다만 사람들이 있는 도시에 있을 건 아니었고, 정장을 입은 채 외눈 안경을 쓰고 있는 고블린이라면 한 명밖에 없다.
“아아─! 화무선을 찾고 있다! 마왕님의 서신을 가지고 왔으니, 그자를 데리고 오거나 위치를 알리는 자에게는 1,000골드를 지불하겠다!”
쩌렁쩌렁 소리치는 녀석.
지나가던 사람들도, 갑자기 나타난 고블린에 무기를 움켜잡던 이들도 멈칫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이 직접 그린 건지 화무선의 얼굴을 그린 종이를 펄럭이며 소리를 질러 댄다.
“화무선! 이자의 행방을 아는 자 없는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 미친놈이.”
설마 저렇게 대놓고 나설 줄은 몰랐는데.
멍청한 건가, 아니면 똑똑한 건가. 그보다 1,000골드는 어디서 난 건데.
개인 자산? 아니면 마왕성 예산에서 가지고 왔나?
전자였으면 좋겠는데 만약 후자면 속이 많이 쓰릴 거 같다.
급격히 머리가 아파 오는 것도 잠시.
“집중하자.”
난 녀석과 주변에 몰려드는 인파를 눈에 담았다.
혹시 모른다. 저런 식으로 이곳에 있는 숭배자들과 접선할지.
내가 화무선의 위치를 안다! 하면서 나선 다음 뒤로 음모를 꾸밀지도 모르는 법.
단상 근처에 얼쩡거리는 이들을 보며 권능을 사용했다.
[로아 마그넷]
-93층의 NPC.
-플레이어입니다.
[니암 세링게티]
-93층의 NPC.
-플레이어입니다.
.
.
.
대략 40명 가까이 몰린 이들 중 숭배자는 없었다.
그저 1,000골드라는 말에 솔깃한 이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
“아니, 말하는 고블린? 1성짜리도 말했던가?”
“특이한 고블린인가 보지. 마왕이 직접 보내서 온 거 같은데.”
“화무선 그 사람 아닌가? 이상한 옷 입고 다니는 이상한 애.”
“그 사람 네버데일에서 스타트 끊었는데.”
“침공 중인 거 아니야?”
“아닐걸. 거기서 본 적 없어.”
“어? 나도 본 적 없는데. 이 사람 어디 있냐? 침공 중요한 건 알고 있을 텐데.”
“…화무선 말고 저번 시즌 원정대 멤버들도 침공에서 못 보지 않았냐?”
“태양전사는 있던데. 나머진 못 봄.”
어지럽게 들려오는 말소리. 난 신경을 기울이며 내용을 살폈다.
확실하다. 화무선뿐만이 아니라 저번 시즌에서 활약했던 이들 일부가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단순 우연? 아니면 이번 시즌에는 그냥 쉬고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있나.’
게임 한두 번 한 사람도 아니고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리는 없지.
그렇다고 이번 시즌은 적당히 편안하게 보내려 한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원정대와 화무선이 동시에 그렇게 할 리가 없다.
최종적으로 마왕을 잡는 건 소수. 쟁쟁한 경쟁자들이 쉬고 있다면 그때를 노려 치고 나가면 나갔지 ‘나도 같이 쉴까?’ 이러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다.
특히나 화무선은 더 그렇다. 이곳이 본진인 요정 클럽이야 그렇다 쳐도 화무선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야 한다. 평생 여기서 썩을 게 아니라면 말이지.
“침공보다 이득이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활동할 수는 없다.”
이거 완전.
“유적에 있나 본데? 던전이나. 나도 거기 있었거든.”
“유적… 어?”
나보다 먼저 답을 말하는 녀석이 있다.
광장에 모인 인파 속, 유독 눈에 띄는 존재.
초록색 타이즈. 건틀렛. 보타이.
“탈모맨?”
이 녀석이 왜 여기 있어.
그동안 커뮤니티에서도 안 보이길래 다른 곳으로 떨어져서 구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 그 보다.
“뭐, 뭐야 저 녀석?”
“레벨이 왜 저래. 버그? 버근가!”
“등반가 아니야? 나 저런 사람은 처음 보는데.”
탈모맨 머리 위로 떠올라 있는 레벨이 눈길을 끌었다. 무려 31.
광장에 있는 이들 레벨이 많아 봐야 24인 걸 생각하면 훨씬 높은 수치.
가르티 또한 흥미로운 눈으로 탈모맨을 바라본다.
“유적이라, 틀린 말은 아니구나. 그렇다 보는 게 옳은 판단이겠지. 좋다. 도움이 됐으니 보상하지.”
녀석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쿨하게 골드가 담긴 주머니를 탈모맨에게 던져 준다.
“오, 고마워. 잘 쓸게.”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를 받아드는 녀석.
주변에서 이게 뭐냐고, 그런 말은 자신들도 할 수 있다며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의미 없었다. 가르티는 이미 그곳에서 벗어나고 있었으니까.
몇몇 성급한 플레이어들이 가르티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콰앙!
그대로 발을 박차고 달리자 아무도 쫓을 수 없었다.
가공할 만한 속도에 어안이 벙벙해져 멀어져 가는 녀석을 바라볼 뿐.
어떻게 하지?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탈모맨한테 갈까, 아니면 가르티?
“일단 가르티를 쫓자.”
“그엑!”
탈모맨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았으면 됐다. 가르티가 어디로 가는지부터 확인한다.
은신 스킬을 사용하며 놈을 쫓았다.
만약 진짜 탈모맨처럼 유적 같은 곳에 있고 그 결과 30레벨을 넘긴다면? 그걸 기반으로 수도로 넘어가 기연과 이벤트, 칭호를 싹쓸이해 스펙업을 한다면?
“그럼 마왕성 박살 나는 거지.”
내가 꾸민 계획도 어디까지나 20레벨대를 겨냥하고 준비한 거지 30레벨대를 노린 게 아니다.
잠깐, 그럼 탈모맨도 침공하면 안 되지. 얘도 제정신이 아닌 녀석이라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알 수가 없다.
달리면서 커뮤니티를 켰다.
[니머리 탈모]: 난 자유다아아아! 자유인! 프리!
[냥냥펀치]: 탈모맨이 영어를? 너, 누구냥!
[정수리 핥짝]: 걱정 마. 탈모맨 맞아. 내가 증명해 볼게.
[정수리 핥짝]: 자, 탈모쉨아, 프리 알파벳 좀 말해 보렴.
[니머리 탈모]: full yeee……?
[냥냥펀치]: ㅋㅋㅋㅋㅋㅋㅋㅋ 탈모 맞네
[정수리 핥짝]: ㅋㅋㅋㅋㅋㅋㅋ 야, 넌 진짜 담에 나랑 영어 공부 좀 하자ㅋㅋㅋㅋㅋ.
아니나 다를까 신나게 채팅을 치고 있는 녀석.
[니머리 탈모]: 흠흠… 너무 하고 싶은데 갑자기 마왕 잡으러 갈 일이 생겨서…….
“갑자기 마왕성은 왜!”
엄한데 불똥이 튀기 직전, 재빨리 채팅을 쳤고.
[쁘띠공듀]: 마왕의 정체는 쁘띠☆마왕!
[쁘띠공듀]: 거기 얌전히 있으라구욧!!!!!
뒤늦게 수치심이 올라왔다.
[정신 보호(SSS) Lv.MA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