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화 미행
마왕성 내부, 대형 회의실에 앉아 홀로그램 위로 떠오르는 침입자들을 살폈다.
이제는 모든 인원이 2차 전직을 마쳤고, 개인의 능력과 테크트리에 따른 격차도 벌어지는 게 보였다.
특히나 침공을 하는 자들과 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차이가 확실했다.
“침공해야 성장이 빠르다는 게 이런 거군.”
“경험치를 많이 얻습니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몬스터는 있지만 거의 50퍼센트 정도의 차이가 있어요.”
“보상으로 장비나 아이템을 얻을 수도 있지. 인류 진영에서 하려면 재료부터 따로 모아 와야 하네. 효율이 나빠. 시간도 오래 걸리고.”
“난 저기 안 가도 돼? 심심한, 켁!”
“그에에.”
오른쪽에 히메룬, 왼쪽에 페이둠, 머리에는 덕춘이에게 멱살 잡힌 삐에르. 문가에는 팬텀 나이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칭 마왕성의 4천왕.
‘4천왕이 맞나?’
히메룬의 전투력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비서 일 하느라 바쁘고, 페이둠은 대장장인지라 전투 능력보다는 생산 능력이 더 뛰어난 거 같던데.
팬텀 나이트랑 삐에르는 전투 쪽이 확실하기는 하다만 아직까지 공개적으로 나선 적이 없다.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니 자칭 4천왕이지.
“조만간 12스테이지도 밀리겠군.”
“뒤에도 더 준비할까요?”
“4개만 더. 이번에는 2성급 위주로. 전에 이쪽으로 넘어온 녀석은 스테이지 보스로 써 버리고.”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히메룬.
예상보다 플레이어들의 진척도가 빠르다. 나 역시 그동안 놀고 있던 건 아니었지만 내가 스테이지 난이도를 낮춰 놔서 그런지 10스테이지까지는 쭉쭉 밀고 오는 중.
플레이어들도 의아한지 11스테이지를 넘어서고부터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지만.
만약 본인이 클리어한 스테이지가 마지막이면 다음은 마왕성이다.
현재 레벨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으니 귀환 스크롤이 없다면 무조건 죽는다 봐야 했다.
그걸 아니까 꾸물거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고.
그런 놈들을 보며 턱을 괴었다.
‘배치한 몬스터 등급이 낮아서 녀석들도 엄청나게 성장하지는 못했어.’
만약 정석대로 했다면 희생자는 늘지언정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들이 나왔을 거다. 죽지만 않으면 강해지니까.
RPG가 이런 쪽으로는 정직하다. 노력한 만큼 성장하는 구조라서.
그래서 더 약한 몬스터만 골라 놔둔 거지만.
하향 평준화.
내가 노린 것 중 하나다.
“페이둠, 장비 상태는?”
“추적 중이네. 오차가 있겠지만 한 파츠라도 착용한 이들은 40퍼센트는 되겠어.”
“고생한 보람이 있군.”
1차 생산한 물건에 더해 2차 물량까지 인류 측으로 보내 버린 상태. 지금도 3차 물량을 확보 중이다.
기존에는 방어구만 취급했지만 2차로 보낸 물건에는 무기도 포함시켰다.
‘무기는 불량품 만들기 힘들었지.’
갑옷 같은 거야 누르면 깨지는 부위를 교묘하게 숨길 수 있었지만 무기는 워낙에 부딪치는 곳이 많아서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공명.
일정 주파수의 소리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진동하다 깨지게 만들었다. 상당히 힘든 작업이었지만 결국에는 성공했다.
“릴카가 알면 기겁하겠군.”
누가 뭐라 해도 내게 장비 제작을 알려 준 장본인이니까.
어쨌든 거의 원가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공급하다 보니 보급률은 상당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팔았었는데 나중에는 그냥 대놓고 팔았다. 마왕성에서 만든 장비와 무기라고.
이유는 별거 없다.
“이전에도 마왕성에서 만든 장비를 팔아 자금을 모았으니 이상해 보이지는 않겠어.”
“그럼요. 오히려 인기가 좋았던걸요. 군자금이 늘어서 좋습니다.”
사실상 군수물자도 담당하고 있는 히메룬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첩자는 첩자대로 돌리고, 무역을 위한 몬스터들도 보냈으니 생필품을 비롯한 각종 물건들도 가져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은 것.
“추세를 볼 때 내일이면 작전을 시행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좋지. 다들 일 봐.”
고개를 끄덕이자 간부들이 회의실을 벗어난다.
“난 더 놀래!”
“넌 그만 좀 놀고.”
“히메룬이 난 노는 게 일이라고 했는데? 자, 잠깐! 알았어! 간다!”
“그에에.”
삐에르가 뒹굴거리며 남아 있으려 했지만. 덕춘이가 혀로 머리를 붙잡으려 하자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치. 개구리는 날파리를 먹지.
날개 파닥이면서 뽈뽈거리는 게 딱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툭툭. 테이블을 두드렸다.
“이상하군.”
계획은 순조롭다.
개척 상황도 나쁘지 않고, 뽑기를 통해 3성급 몬스터도 좀 뽑았다.
골드도 여유가 있었고, 가장 큰 문제였던 식량도 지금은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각성을 위한 재료는 그다지 소득이 없지만 진화석은 적지만 조금씩 채굴되는 광산이 발견되어 작업 중이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뭐 하나 문제 될 게 없었으나.
“왜 안 보이지?”
난 침입자들을 보여 주는 홀로그램을 지그시 노려봤다.
계속 지켜봤다. 내가 원하는 녀석들이 있는지. 요정 클럽과 루키 그룹의 화무선.
요정 클럽이야 아직 겉으로 드러난 게 없으니 보고도 못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있는데 화무선은 달랐다. 눈으로 직접 봤었으니까.
“침공이 활성화된 이상 계속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
가장 빨리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지금도 먼저 스테이지를 클리어해 댄 녀석들이 치고 올라가고 있다.
이걸 걷어찬다? 얻을 수 있는 게 많을 텐데?
신중한 걸까. 아니면 이상함을 눈치챈 걸까.
어쩌면…….
‘침공하지 않더라도 성장할 방법이 따로 있다는 걸까.’
처음부터 일반적인 플레이어를 압도하는 성장 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 속도가 유지됐다고 가정한다면.
‘이 녀석, 3차 전직을 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를 떠나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다행히 내게는 이런 상황에서 조언해 줄 자가 있었으니.
“가르티.”
나의 부름에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넉살이 좋은 건지 천연덕스러운 건지 녀석은 표정 변화 하나 없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로구나.”
“살짝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야.”
다른 간부들이 자칭 4천왕이라면 이 녀석은 중간보스 혹은 히든 보스 느낌.
마왕 노릇을 오래 해 온 만큼 무력은 보장되어 있었고, 게임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다.
이제 처음 시작한 나와 달리 알고 있는 게 많을 거라는 뜻.
“침공하지 않고 레벨을 빠르게 올리는 게 가능한가?”
“불가능하지는 않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확인해 줘. 눈여겨보고 있는 이들이 보이지 않아. 따로 뭔가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눈치챈 거야.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어. 이런 쪽은 잘 알겠지?”
가르티를 지그시 바라봤다.
마왕의 자리에서 내려왔기 때문일까. 녀석에게는 별 5개가 달려 있다.
내가 데리고 있는 유일한 5성급 몬스터. 녀석을 첩자로 보낼 생각이다.
“고급 인력을 너무 막 쓰는 것 같지만 이해 못 할 건 아니군. 히든 루트로 진행하는 이들에 대한 건 나 말고는 모를 테니.”
“준비할 시간 필요해?”
“바로 가도록 하지. 내일 작전을 수행하려면 빨리 알아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고개를 끄덕이고 골드를 사용했다.
곧이어 빛무리와 함께 사라지는 녀석.
텅 빈 회의실. 난 다리를 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다른 녀석들도 내일 있을 이벤트를 위해 움직이고 있고, 가르티도 시스템을 이용해 확실히 첩자로 보냈다.
그렇다면…….
“내가 움직일 시간이로군.”
[외출을 사용합니다.]
[골드가 차감됩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고 돌아오길 바랍니다!]
-우우우우웅
망설임 없이 외출을 선택했다.
빛이 퍼지며 시야가 바뀐다. 이미 펠라인 세트는 인벤토리에 넣고 마왕성 장비로 갈아입은 상태.
그 위로 어두운색의 망토를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썼다.
-파앗!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가장 급선무는 이곳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외출이 좋기는 한데 전송되는 위치가 랜덤이라 문제다.
첩자를 보낼 때처럼 위치를 지정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다행히 그리 멀지는 않아.”
가르티를 보낸 곳은 휴펜피디아. 플레이어들이 스타팅 지점을 지나 2차 전직을 하러 가는 곳이자 교통의 중심지인 대도시.
현재 마왕성에서 만든 장비들을 유통하는 곳이기도 했다.
저 멀리 휴펜피디아의 성벽이 보인다. 이 정도 거리면 금방 간다.
“가자, 덕춘아.”
“그에에.”
기척을 죽이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가르티. 탑 숭배자.
녀석과의 대화가 떠오른다.
-영생. 그것의 부질없음을 이곳에서 느끼고 있었다네.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 그 어디에도 구원은 없었지.
-이곳은 닫힌 세계이네. 도망칠 곳은 없어. 안식과 나락 둘 중 하나뿐이야.
아무런 위협 없이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가던 녀석.
-난 숭배자들의 왕을 배신하려 하네.
배신자.
탑 숭배자들의 배신자였다. 이미 이곳에 오기 전부턴 나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내가 마왕 자리를 가지게 된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놈이 그렇게 되도록 유도한 것이지.
시작부터 모든 패를 까는 건 어리석은 짓. 가르티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몇 가지 본인을 증명할 만한 것과 내가 흥미를 느낄 만한 이야기를 하고 입을 다물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무언의 메시지.
놈과 싸우지 않고 마왕성의 간부로 받아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처음 만난 숭배자들의 배신자. 녀석이 내게 건넨 물건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플레티넘 증명패]
-탑 숭배자들의 숨겨진 등급, 플레티넘!
-숭배자들의 왕을 따르는 관리자들.
-플레티넘 등급을 지닌 자는 3명뿐입니다.
다른 숭배자들의 증명패와는 달리 옥같이 초록빛이 도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다.
숭배자들은 항상 증명패를 가지고 다녀 스스로를 증명했으니, 그것을 내게 줬다는 건 더 이상 숭배자로 살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플래티넘 등급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찝찝하다고 해야 하나.
놈은 자신을 믿으라 말했지만 여전히 의구심은 남아 있다.
그래서 확인해 보려는 거다. 인류 측으로 보낸 지금, 놈이 뭔가 수작질을 하려 한다면 최고의 타이밍일 테니까.
* * *
[3차 전직을 완료했습니다!]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탈모맨이 양팔을 벌렸다.
“으아아아! 드디어 끝났다!”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몸을 푼다.
탈모맨이 있는 곳은 메타 빌리지를 벗어나면 나타나는 버려진 지역.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었고, 보통 갈 생각도 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탈모맨은 달랐다.
의도했다기보다는 우연의 산물이긴 했지만.
[유적-시작의 대척점을 클리어했습니다.]
[후반 구역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극과 극은 결국 이어진다 했던가.
스타팅 지역의 뒤편으로 나아가면 게임의 후반 지역과 이어진다는 이야기.
과거, 오래된 게임의 경우 플레이어가 시작부터 후반부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이동 불가한 장애물이나 지형을 만들어 두는 경우가 있었다.
이곳도 마찬가지. 다만 그것을 뚫고 넘어가 최종 보호장치인 유적까지 클리어했을 뿐이었다.
일종의 버그 플레이, 혹은 히든 피스.
“와, 진짜 유적에 있느라 커뮤니티도 못 했네. 심심해 죽는 줄.”
보안을 위해서라도 유적 내에서는 커뮤니티가 불가했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탈모맨이었고.
“나도 이제 대도시로 간다아아아!”
이대로 유적을 지나 후반부로 가는 대신 대도시로 가는 것을 선택했다.
게임 경험이 적은 자의 알 수 없는 성장 루트였으나, 머리 위로 떠오른 Lv.31이 헛수고가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