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5화 전대 마왕
끼이이익.
녹슨 경첩이 소음을 내며 문이 열린다.
“잠깐, 잠깐! 거기, 문 열지 마!”
“음?”
-후두두두둑.
“열지 말랬잖아. 으아아아아.”
문 너머에서 누군가 뭐라 떠들었지만 이미 문은 열린 뒤.
문가에 쌓여 있던 서류들이 쏟아지며 방바닥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 뒤에 늘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고 있는 녀석.
“…요정?”
“음? 너 냄새 좋다?”
척 봐도 요정처럼 생긴 녀석이 뽈뽈뽈 날아오더니 옆에 붙어서 코를 킁킁거린다.
그렇겠지. 요정의 친구 칭호가 있으니 기본적으로 내게 우호적으로 나온다.
“오! 새로운 마왕인가? 오오오오! 색달라! 신기해! 이상해!”
내가 색이 다르긴 하지. 입고 있는 장비 전부 색이 다르니까.
피해 의식이 아니라 진짜 저런 의미로 말한 게 맞는 거 같다. 갑옷을 하나씩 두드리는 걸 보면.
“군수물자 담당자인가?”
“맞아. 내가 그 담당자 삐에르지. 깜찍한 나를 봐라!”
찡긋 윙크하면서 미묘한 자세를 취하는 녀석.
그것참, 깜찍한 요정이로군.
요정 특유의 산만함과 밝은 분위기를 보니 확실히 요정이 맞다.
등 뒤로 달린 날개도 그렇고. 다만 눈에 띄는 건.
‘얘 뭔데 기운이 무시무시하냐.’
상큼한 외형과는 달리 날갯짓을 할 때마다 묘하게 불안한 힘의 흐름이 느껴진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가다듬었음에도 느껴지는 에너지의 파동.
이거랑 비슷한 느낌을 전에도 받았었다.
‘48층의 헤이다.’
파괴의 요정.
현자와 오델토, 부활 사업의 핵심 인원들을 만나게 해 준 녀석.
곧장 권능을 사용했다.
[삐에르]
-마왕성 간부 NPC!
-파괴의 요정입니다!
-요정이라고 얕보지 마세요, 펑! 터집니다!
-살짝 멍청합니다.
진짜 파괴의 요정이었네.
역시 마왕성 간부 정도 되면 한가락 하는 건가.
그것보다.
‘멍, 청?’
이게 더 신경 쓰이는데.
아니. 군수물자 담당인데 멍청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냥 내 생각도 아니고 권능이 공식적으로 멍청하다 했으면 진짜 멍청한 거잖아.
“잠깐만. 거기 얌전히 있어 봐.”
“응? 으응.”
심각한 표정을 짓자 녀석이 뽈뽈뽈 날아가 책상에 엎드린다.
전용 침대로 사용하는지 방석까지 깔아 뒀다. 덩치가 작아서 폭 들어가는 것이 귀엽기는 했지만 지금은 이게 먼저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서류를 집었다.
히메룬이 마왕성에 있는 장비와 식량 등을 정리한 문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안건이 가득하다.
간단한 작업이면 알아서 하겠지만 이런 유형의 일은 담당자의 피드백과 결재가 필요한 법.
눈을 가늘게 뜨고 내용을 살피자.
-여분의 방패 배치와 관리 창고 지정이 필요합니다. 서관 및 동관은 구조의 특성상 식량 창고로 사용하고 있어 대체하기 어렵고…….
└적당한 곳에 박아 두면 되지 않을까?
-군수물자 이동을 위한 도로 증설 및 보수 요청. 의견을 구합니다. 자료 첨부합니다.
└도로가 없어도 돼! 날면 되잖아!
-마광석 채광 및 가공에 대한 예산 배정 목록. 결재가 필요합니다.
└도장 찾으면 찍어 둘게! 미안!
.
.
.
탁. 이마를 쳤다.
히메룬. 홀로 어떤 싸움을 해 왔던 거니.
주먹이 떨리고 머리가 아찔하다. 진짜 위험한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더니.
‘지금까지 어떻게 마왕성이 돌아간 거지?’
군수물자면 그래도 중요한 그거 아닌가?
그나마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안 돼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 개판이 됐을 거다.
-까딱.
“응? 왜?”
그새 잠들었었는지 하품을 하고는 고개만 들어 날 바라본다.
“이거 서류 언제 들어온 거야.”
“몰라. 그저께? 아닌가. 일주일 전? 그쯤 된 것도 같은데.”
“…히메룬한테 전달은 했, 그래. 안 했으니까 여기 있겠지.”
“헤헤헤. 맞아. 까먹었어. 히메룬이 늦네. 와서 가져가야 하는데.”
울컥. 혈압이 올라갔지만 일단 오케이 했다.
시설 개방이 안 됐으니 본인이 직접 나갈 수는 없었겠지. 여기까지는 이해한다.
“도장은 어디다 팔아먹었지? 이건 도장만 찍으면 되는 건데.”
“맞다! 역시 마왕은 똑똑해! 방에 어디 있을 거야. 전에 봤었거든.”
뭐가 좋은지 방석에서 뒹굴며 꺄르륵거리는 녀석.
내가 진짜 요정은 너무 쪼만해서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따악!
“꺄악! 왜 때려!”
“너야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여태 뭐 했어!”
“몰라! 모른다고! 서류 보다 보면 스트레스받아서 터진다고! 히메룬도 힘들면 보지 말랬어,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빼애애액! 소리를 지르며 날개를 파다닥거린다.
그때마다 우우우웅. 공명하며 파괴적인 힘이 응집되는 건 덤.
맞네. 파괴의 요정은 스트레스받으면 폭발 일으키지.
하하. 아하하.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곳이라 하더니 이 녀석이 전략 병기였던 건가. 히메룬 장하네. 얘도 같이 관리하고 있고.
“너 해고.”
일단 이 녀석 직책부터 없애야겠다.
* * *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꽝이네.”
혹시나 해서 왔더니만 건들면 터지는 폭탄 요정이나 있고.
녀석의 직책을 해임하고 싶었지만 시스템상 그럴 수가 없어 적당히 히메룬에게 군수물자 관리 권한을 줬다.
미안하기는 했지만 히메룬이 좀 더 고생해 줘야겠다.
“애매하군.”
시설을 개방한 것 자체는 다행이었지만 원하던 것은 얻지 못했다.
전대 마왕. 게임이 시작되고 전대 마왕 역할을 하고 있는 녀석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계속 해 왔었다. 이번에 시설을 연 것도 그 이유 때문이고.
이전에 했던 전략들을 배워도 되고 그동안의 경험이 있을 테니 내가 없을 때 스테이지를 관리하게 할 수도 있었으니 반드시 해야 하는 일.
‘그나마 얻은 정보가 있으니 다행인가.’
대장간에 있는 페이둠도 그렇고 새롭게 만난 삐에르도 그렇고 지금까지 마왕은 한 NPC가 계속 해 왔다고 증언했다. 본의 아니게 교차 검증이 완료된 셈.
이들의 말이 맞다면 마왕은 93층에서 가장 많은 엔딩을 본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플레이어가 마왕과의 결전을 펼치지는 않으나 마왕은 항상 자신을 노리는 이들을 받아들여야 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인데.
“솔직히 의심된단 말이지.”
그런 녀석이 어째서 이번에는 마왕 자리에서 벗어났는지. 그것도 딱 내가 왔을 때 말이야.
어떻게 한 걸까? 따로 의도가 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단순한 우연?
모든 것이 누군가의 의도하에 진행되는 건 아니다. 사소한 거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
그럼에도 조심해야 한다.
이곳은 탑이니까.
소득이랄 게 별로 없어 허탈한 마음에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해야 하나. 침공이 올 때까지 기다려? 아니면.
“하나만 더 개방해 볼까.”
이런저런 일을 꾸미느라 골드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나마 싼 시설이라면 개방할 수 있을 거 같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도서관을 개방합니다.]
가장 값싸게 열 수 있는 시설 중 하나.
동시에 게임이 시작될 때마다 담당자가 바뀌는 곳.
난 이곳을 열기로 결정했고.
-끼이이이익.
천천히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오래 묵은 종이 냄새, 살짝 감도는 탄내와 향초의 향기.
산만했던 군수물자 창고와 달리 정적이면서도 묘하게 안정감이 드는 분위기만 보면 훌륭했지만.
“고블린?”
“흐음. 그쪽은 이번 대 마왕이로군. 들어오게.”
커다란 책상에 앉아 펜을 쥐고 있는 고블린을 보니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고블린이 지적으로 생길 수 있나?
주름진 얼굴과 금테 외눈 안경. 깔끔하게 차려입은 셔츠와 베스트. 옷걸이에는 정장 외투도 걸려 있다.
슬쩍 일어나 내게 오는데 구두까지 신고 있다.
나도 회사 다닐 때는 책상에 앉아 있으면 슬리퍼 신고 있었는데. 구두 저거 오래 신고 있으면 발 엄청 아프다.
“편하게 앉게. 차를 내주지.”
묘하게 하급자를 대하는 것 같으면서도 차를 챙겨 오는 건 또 깍듯한 거 같고 미묘한 녀석.
새로운 마왕이 왔음에도 별다른 내색 없이 자연스레 행동한다. 다른 간부들은 한 번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마치 새로운 마왕이 오는 게 당연하다는 기색이었고.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번뜩입니다.]
난 바로 권능을 사용했다가 눈을 찌푸렸다.
[SSS급 권능,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시야를 어지럽힙니다.]
녀석 또한 만만치 않은 권능을 가지고 있다.
내 권능을 완전히 막는 것은 아니었으나 정보들이 비틀려 있다.
[가르티]
-마왕성의 간부 NPC!
-전# 마왕입니다.
-이■한 %&을 **나*!!!!
-※@티$ ▽□!##?
이름이랑 마왕성 간부라는 것 말고는 제대로 된 게 없다.
그나마 전대 마왕이라 적힌 것까지는 알아먹겠는데 그 이후로는 파악 자체가 불가능하다.
운 좋게 전대 마왕을 찾았음에도 기쁨보다는 경계심이 먼저 든다.
슬며시 놈의 정보를 살폈다.
‘이런 건 또 처음이군.’
안 보이면 안 보였고, 가려지면 가려졌지, 이렇게 뻔히 보는데 못 알아보는 건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몇 가지 알아낸 것은 있었으니.
“속을 들여다보는 자라. 높은 자리에 걸맞은 능력이지.”
내 권능에 저항한 시점에서 상대도 나의 권능을 눈치챌 수 있다.
상대의 권능을 막을 때 그 권능이 뭔지 시스템이 알려 주니까.
나도 그랬다. 현자, 존 트레일러를 만났을 때 현자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메시지가 떴었지.
‘내 정보 하나를 흘렸어.’
쯧. 속으로 혀를 찼다.
살짝 아쉬운 감이 있기는 했지만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고, 공개된다 한들 강점이 됐으면 됐지 약점이 되지는 않는다.
켕기는 게 있는 녀석들이라면 되레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될 테니까.
예전이야 남몰래 정보를 읽는 것을 들키면 상대방이 적대시하며 나올까 걱정하기도 했다. 특히 NPC들.
그때야 뭐, NPC보다 약해서 눈치 본 것도 좀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짬은 아니라서.
90층대까지 올라온 녀석들이라면 이 정도 눈대중은 기본 장착이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떠보기라도 해야지. 난 좀 더 직접적인 방법을 쓰는 것뿐이고.
가볍게 다리를 꼬며 놈이 가져온 차를 마셨다.
“맛이 좋네.”
“차를 즐기는 편이라네.”
독 따위는 없었다. 사실 있어도 상관없고.
잠시 말없이 차를 음미했다.
권능을 통해 정보를 빼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놈의 본명과 권능은 알아냈다.
내용 자체는 비틀려서 못 써먹겠지만 설명의 분량 자체는 알 수 있었고 그에 따른 결론은.
‘히메룬보다 훨씬 강해.’
적어도 마왕성 내부에서 나를 제외하면 이 녀석이 가장 강하다.
나랑 비교하면 어떨까. 짐작하기 어렵다. 질 거 같지는 않은데 저 불가사의라는 권능이 신경 쓰여서.
‘묘하게 혼돈이랑 비슷한 느낌의 권능 같단 말이지.’
권능 이름은 뜬구름 잡듯이 모호한 경우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능력을 나타내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불가사의란.
사람의 생각과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
온갖 괴상한 것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저주라든가, 괴물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재앙 같은 것들.’
무너지는 돌탑, 벌룬 파크, 소원 들어주는 연못.
생명체 같은 거로 치자면 월광의 옥토 선생이나 추월 금지의 쌍두귀.
혼돈을 기반으로 만들어져 자기만의 규칙을 지니고 있는 괴현상과 괴물들. 더 나아가면 혼돈의 파편도 이런 유형의 괴물이다.
나 역시 혼돈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못한다. 난 사람이지, 혼돈의 파편도 재앙도 아니니까.
만약 그것을 직접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까다롭긴 하겠네.’
만약 내가 혼돈 수치가 부족했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약간 긴장을 내려놨다.
혼돈의 파편과도 비빌 수 있는 지금은 오히려 이쪽이 상대하기 편하다. 상대방이 혼돈을 쓴다면 내가 가진 혼돈 역시 그 규칙을 비틀기 시작하니까.
“전대 마왕. 맞지?”
“그렇다네. 숨길 이유가 없지. 숨길 수도 없을 것이고.”
차를 마시는 짧은 순간 서로 파악을 마쳤다.
“지금까지 여기에 있는 걸 봐서는 그쪽 역시 새로운 엔딩을 보지는 못한 모양이야.”
“부정하지는 않겠네.”
“일부러 하지 않은 건가?”
정당한 의문이었다.
아무리 클리어 조건이 이상하다 하더라도 분명히 이곳을 거쳐 위로 올라간 사람들도 있을 거다.
NPC 중에도 있겠지. 새로운 기회를 얻는 것과 동시에 기억과 흔적이 사라져서 그렇지.
이 게임의 메인에 있는 마왕이 단 한 번도 기회를 얻지 못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쯤이면.
‘본인 의지로 남아 있다고 봐야 해.’
어째서?
누군가는 얻지 못해서 안달 내는 기회일 텐데.
물론 원래 세계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이미 탑에 익숙해져서, 기회를 얻게 되더라도 멸망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어서. 그것도 아니라면.
“탑 숭배자라서?”
돌릴 것 없이 질문을 던졌고.
“그렇다네.”
녀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