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02화 (602/740)

602화 내가 네 왕이다

다시 돌아온 마왕성.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고작 하루지만 꽤 길게 느껴졌다.

“저쪽에도 눈치 빠른 사람이 있었네.”

설마 보자마자 내 정체를 알아챌 줄이야. 겉모습으로 알아낸 건 아닐 거다. 위장이고 뭐고를 떠나서 난 사람이니까.

게임을 몇 번 겪어 봤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권능이나 다른 능력?

‘아니야, 이건 그냥 녀석의 감이 좋은 거야.’

만약 다른 능력을 사용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반응했을 테니까.

상당히 껄끄러운 존재다. 얻은 것도 많지만 손해도 봤다.

내 얼굴과 닉네임이 들통났으니까.

“다음 외출 때는 조심해야겠는데.”

살짝 곤란해진 건 맞지만 그렇다고 엄청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한 명에게 들킨 거고, 내 정체에 대해서 떠들고 다녀 봤자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한 사람의 주장이라는 뜻. 놈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겠지만 무작정 믿는 사람은 없을 거다.

물론 과격한 방법으로 날 확인할 수는 있다. 내가 91층에서 했던 것처럼 억지로 싸움을 붙여 확인할 수도 있겠지.

외출한 마왕은 플레이어를 공격할 수 없으니까.

그럼 뭐…….

“도망치면 그만이고.”

이번에는 내가 직접 외출을 했지만 다음에는 적당한 녀석을 대신 보내도 된다.

직접 가더라도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파고들어 수작을 벌여도 되고.

이 부분이야 나중에 천천히 한다 치고.

“화무선이라, 어디서 들어 본 거 같은데.”

직접 마주친 건 처음이지만 묘하게 낯이 익은 닉네임이었다.

탑을 오르내리면서 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서 살짝 헷갈렸으나 그것도 잠시.

“루키 그룹.”

녀석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징혁이 중간에 합류했었던 상위 헌터 집단.

대형 길드의 루키 출신들로만 이루어진 곳.

예전, 헬다잉 키친에서 마주쳤던 스마일캡도 루키 그룹의 일원이었다.

이후로 접점이 많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마주칠 때가 되기는 했어.’

상위 헌터 대부분을 만나 봤지만 아직 마주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93층까지 오른 시점, 슬슬 그들과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못 만난 게 신기한 거지. 예상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요정 클럽은 어떤지 몰라도 루키 그룹은 거의 1세대 헌터들과 동급이니 오래 있긴 했다.

“루키 그룹과 요정 클럽이라.”

가볍게 손가락을 두들겼다.

이곳에 두 그룹이 함께 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 화무선이 여기에 있다는 건 다른 멤버들도 90층대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 됐다.

요정 클럽도 다르지는 않겠지.

애매한데.

“진영이 다르니 무작정 행동하기가 좀 그렇네.”

최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헌터들을 동료로 두고 있는 이들이다. 무작정 들이박기에는 부담스럽다는 뜻.

쁘징 연합도 열심히 등반하고 있고, 인연이 있는 상위 헌터들도 90층에 머물고 있다. 멤버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서로 공격해서 관계를 악화시키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같은 상위층을 공략하고 있다 한들 90층 이하에 있는 이들과 90층대를 오르고 있는 이들의 전투력이 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90층대를 오르고 있는 이들은 한계를 초월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으며, 혼돈 또한 가지고 있을 테니까.

혼돈의 파편과 싸울 수 있는 존재. 그게 90층대를 오르고 있는 이들의 의미니까.

같은 편으로 만들면 만들었지 적으로 돌리기에는 불편한 인물들.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양쪽에서 연합하면 골치 아프겠는데.”

요정 클럽. 그곳에 소속된 이들이 최소한 한 명. 어쩌면 두 명 이상.

한 명은 이곳의 지배자일 테니까. 저번 시즌 원정대로 나섰다는 인물이 지배자 본인인지 또 다른 요정 클럽의 일원인지는 알아봐야 했다.

마그마 요정도 강하니까 이곳에 있는 이들 또한 강할 건 분명하고, 화무선이라는 녀석도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닐 거다.

루키 그룹인 것도 그렇고 눈치가 상당하다. 당장 레벨도 일반적인 플레이어를 월등히 넘어서 있고.

현재 내 상태는 그다지 대단할 게 없었다.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4성급인 히메룬을 제외하면 모두 1성급.

진화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몇 안 된다.

무엇보다 이번 게임에 대한 이해도와 경험에서 현저히 밀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대 마왕을 찾아낸다.”

마왕성을 둘러보면서 알게 된 사실.

이곳에 사람이라고는 나뿐이다. 그렇다면 이전에 마왕 역할을 하던 녀석은 어디에 있을까.

그저 그런 1성급 몬스터는 당연히 아닐 거고, 뽑기로 뽑아야 하는 것도 아닐 거다. 그랬으면 마왕 역할을 했을 리가 없으니까.

즉, 전대 마왕은 이곳에 있다.

“간부 중 하나인 거야.”

아직 기능을 개방하지 못해 만나지 못했을 뿐.

마음을 다잡았다. 요정 클럽과 루키 그룹. 가능한 맞부딪치는 건 피하려 했다만 필요하다면 부딪쳐야 했다.

특히나 이곳은 죽어도 이번 플레이에서만 아웃일 뿐 코인이 차감되지는 않으니까.

그것도 아니면.

“꼬드겨야지.”

역으로 협상을 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계획은 잘 짜야 하고 대비책도 필요하다.

협상이란 자고로 칼을 쥐고 있지 않은 이상 끌려가기 마련이니까.

* * *

외출을 마치고 진척도를 확인했다.

“그때 마왕님이 침입자들이랑 같이 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아, 왜. 그럴 수도 있지. 종종 데리고 올게.”

“이왕 데리고 올 거면 장비 잘 맞춘 이들로 데려오십시오. 골드를 듬뿍 들고 있는 사람도 좋습니다.”

놀란 건 놀란 거고 할 거면 보상 빵빵한 녀석들로 데리고 오라는 히메룬.

알뜰한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개척지는 얼추 끝난 거 같고. 광산을 발견했다고? 진화석?”

“아뇨. 진화석은 아닙니다. 마광물입니다. 이곳에서만 나오는 특수한 금속이죠.”

전에 말했던 그거군. 마왕성에서 만든 무기가 인기가 좋다더니. 그 재료인 듯하다.

“그쪽 개발 들어가자. 땅굴 좋아하는 애들로 집어넣으면 되겠어.”

“두더지 인간과 오크, 놀로 배치해 두겠습니다. 다음은 이건데요, 마왕성에 합류하고자 하는 이가 있습니다. 3성급인데 따로 면담을…….”

“합격.”

“예?”

“3성급이며, 합격.”

“불순한 의도로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류 측과 내통해 첩자 짓을 하거나요.”

“괜찮아. 마왕성에 안 놔두면 돼. 비어 있는 개척지에 놔둬. 거부하면 직접 처리하고.”

“알겠습니다.”

내가 상대 진영을 염탐한 것처럼 저쪽에서도 수작질을 할 수 있다는 것.

마왕성에서 나온 몬스터야 내 관리하에 있으니 상관없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건 검증이 필요하다.

급하다고 아무거나 삼키면 체하는 법이다.

“또 다른 건?”

“다른 개척지는 무난하게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 오전이면 탐사도가 완성될 거 같지만 한 곳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가 생겼다라.

“그쪽에 영역을 잡은 몬스터가 있어요. 1성급으로는 무리입니다. 제가 가서 정리할까요?”

영역을 잡은 몬스터라.

그래, 이런 식으로도 진행이 되겠지.

“내가 직접 간다.”

보고 쓸 만한 녀석이면 영입하고 아니면 잡든지 해야겠다.

이건 내가 봐 보고 판단하기로 하고, 다른 할 일이 필요하다.

“전대 마왕은 어디에 있지?”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

어째서?

“마왕이 바뀐 건 이번이 처음이라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어요. 마왕성에 있는 건 확실합니다.”

“기존에 있던 간부들도 역할이 바뀔 수 있나?”

“몇몇은 고정이지만 바뀌는 경우도 있죠. 저도 이전에는 비서가 아니라 군수물자 담당이었습니다.”

어쩐지 일 처리를 잘하더니 그쪽이었던 건가.

할 수 있으면 전대 마왕이 있는 곳부터 기능을 열려고 했는데 그건 어려울 거 같다.

“역할이 고정된 곳 제외하고 있을 법한 곳을 추려 줘. 그곳 먼저 개방할 거니까. 골드는 아직 남아 있지?”

“빠듯하기는 하지만 2개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오케이. 그럼 이건 히메룬에게 맡기고.

난 바로 미개척 지역 보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플레이어 수준을 보니 대충 감이 잡혔다.

‘1성급으로만 만들어진 곳은 오래지 않아서 뚫려.’

화무선이 특이한 케이스기는 했지만 나머지 플레이어들도 조만간 10레벨은 무난히 넘길 거다.

20레벨이 되면 대도시로 가서 2차 전직을 할 테니 더 강해질 거고.

그 전에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 첫 번째는 강력한 몬스터를 얻는 것. 함정을 파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고민은 끝. 움직이자.

[미개척 지역-그림자 나무 숲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우우우우웅

빛과 함께 시야가 바뀐다.

* * *

[그림자 나무 숲-미개척 지역]

-탐사도: 65퍼센트

얼추 절반은 탐사를 마친 모양.

가볍게 몸을 풀며 주변을 살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공간이었는데 먹구름 사이로 햇빛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몬스터의 사체.

“많이도 당했네. 내 소중한 몬스터들을 말이야.”

1성급으로는 안 된다고 한 걸 보니 못해도 3성급 가까이 되지 않을까?

히메룬이 나서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면 4성급까지는 아닐 거 같고.

-쉬이이이익!

-푹

그림자 사이에 숨어서 이빨을 내미는 몬스터의 목을 꿰뚫었다.

어둠 속성 몬스터, 쉐도우 스네이크.

“흐음?”

이거 1성급 몬스터 아닌데?

개척지 중간에 벌써 2성급 몬스터가 나온다? 이러니까 1성급 몬스터들이 쓸려 나갔지.

다른 속성은 몰라도 빛 속성과 어둠 속성 몬스터는 일반적인 몬스터보다 한 등급 더 높게 쳐준다.

상성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대부분 물리적인 공격에는 면역에 가까운 놈들이라서.

물론 이 게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다만 쉬운 놈들은 아니었다.

“65퍼센트까지 탐사를 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군.”

이거야 원.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돌든가 해야지. 아니면 믿을 만한 녀석으로 보내던가.

이것도 다 인력 부족이다. 3성급 몬스터가 여럿 있었으면 탐사대장으로 보냈으면 됐는데.

“그건 그거고.”

서서히 밀집되는 나무. 어지럽게 얽히는 그림자 사이, 한 인형이 보였다.

마르고 길쭉한 몸체. 날렵한 갑옷 사이에는 어둠만이 가득했으나 눈만큼은 푸르게 빛나는 괴물이 있었으니.

[팬텀 나이트]

-3성급 몬스터.

-그림자 숲의 주인입니다!

-성능만 따지면 4성급에 비견되는 OP 몬스터!

“이것 참. 꽤 괜찮은 게 있었잖아?”

가끔 있다. 게임을 하다 보면 필수 캐릭터라 불리는 녀석들이.

태생적인 등급을 씹어 먹는 성능을 자랑하는 OP. 여기에도 있었구나.

[팬텀 나이트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대상을 마주합니다.]

“그대가 새로운 마왕인가.”

본인 키만큼이나 기다란 검을 땅에 박아 넣은 녀석이 입을 연다.

풍겨져 나오는 기세가 제법 매섭다. 이 정도면 히메룬이랑 붙어도 할 만하겠는데.

특히나 지금 환경은 녀석에게 최적화되어 있다.

서늘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이 전신을 훑는다.

‘내가 오길 잘했군.’

안 그랬으면 피해가 더 커질 뻔했다.

“다시 게임이 시작되었군. 그대, 나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시험하겠다.”

-쿠드득

천천히 검을 뽑는 녀석.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놈인가. 자격 증명만 하면 내 편이 되어 준다는 거다.

운이 좋군.

“너를 꺾으면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건가.”

“합당한 자격을 지녔다면. 왕의 자리에 어울리는 자인지 확인하겠다.”

“왕이라.”

슬쩍, 머리 위를 만지작거렸다.

“아.”

생각해 보니 외출하면서 벗고 있었다.

-콰아아앙!

속으로 짧게 혀를 차는 타이밍. 놈이 달려들었다.

성격 한번 급하기는.

“왕의 자격을 원한다면 보여 줘야지.”

정면으로 달려드는 녀석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러브 앤 피스(SSS) Lv.3]

-파아아아아아앗!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빛!

순간적으로 놈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럼에도 끝까지 검을 놓지 않고 달려들었으니.

[댄싱 마스터의 왕관(B)]

-모두의 아이돌! 당신의 존재를 뽐내세요!

-당신은 이미 모두의 위에서 빛난 적이 있습니다.

-왕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난 천천히 인벤토리에서 꺼낸 왕관을 머리에 씌웠다.

조명을 받아서 그런지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왕관.

놈이 말하는 왕의 자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도 자격이라면 자격이니 괜찮겠지.

“이노오오오옴! 나를 농락하려는 것이냐!”

아닌가.

이거로는 부족한가.

그치, 하긴 이것만으로는 아쉬운 게 있지. 명색이 댄싱 마스터의 왕관인데.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하는 거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포즈(C) Lv.5]

-척! 처적!

마왕에 어울리는 근엄하고도 멋진 자세를 취하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바로 너의 왕이다.”

분명 어둠으로 가려져 있건만, 녀석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 같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