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1화 지금껏 없던 마왕
하루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뭐, 개인적으로는 길다고 생각하지만.
“잠을 안 자고 쓰면 진짜 길거든.”
“그에에.”
인류 진영으로 외출하고 한숨도 자지 않았으니 체감상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몸이 튼튼해지니 며칠 안 자는 것 정도는 버틸 만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지 않았다면 꽤 피곤했을 강행군이었다.
“드디어 도착인가. 생각보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가 쉽지 않네.”
맨 처음 도착한 곳이 네버데일. 흐름대로 따라간다고 하면 이곳에서 대도시인 휴펜피디아로 가야 했다.
가야 하는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스타팅 지점에서는 매우 간단한 직업들만 가질 수 있었고, 보다 높은 직업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도시로 가서 특수한 퀘스트들을 진행해야 했다.
“게임으로 치자면 이쪽이 1차 전직. 대도시 가서 2차 전직하는 거지.”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보니, 각 스타팅 지점들은 몇 개의 대도시로 연결되어 있는 형식이었다.
달리 말하면 다른 스타팅 지점으로 가려고 한다면 대도시를 거쳐 가야 한다는 말.
이게 문제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주는 포탈 같은 게 없어서. 마을 주민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도시에는 있다는 것 같지만.
결국 걸어가거나 탈것을 타고 움직여야 한다는 거였는데.
“대충 3일 정도 걸린다니 갈 수가 있나.”
그래서 결정했다.
대도시를 거치지 말고 직선으로 뚫고 가자.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여기 있는 놈들은 대부분 미니맵을 사용해 지도가 따로 없었기에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대략적인 방향만 알고 움직였다.
물론 스타팅 지점을 벗어나면서 저레벨 몬스터가 아닌 강력한 몬스터들도 잔뜩 나왔지만.
“키하아아악!”
-퍼석
내가 플레이어랑 못 싸우지 몬스터랑 못 싸우는 건 아니라서 뚫고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머리가 뚫린 몬스터를 발로 밀어내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속이 다 시원하네. 여기 와서 직접적으로 전투할 일이 많지가 않았어서.
“이놈들은 어떻게 못 데리고 가려나.”
적당히 피가 덜 묻은 바위에 걸터앉으며 내가 잡은 놈들을 바라봤다.
히메룬을 제외하면 내가 다루고 있는 몬스터는 1성급이 대부분. 반면 여기서 잡은 놈들은 2성급, 몇몇 객체는 3성급에 가까워 보였다.
살짝 애매한 것이 인류 측에 있는 몬스터라 그런지 성급이 아니라 레벨로 표시되어 있긴 했다.
방금 머리를 터트린 녀석이 16레벨이었으니 1성과 2성 사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살짝 아쉬웠지만 손을 털고 일어섰다. 애초에 사냥하라고 놔둔 몬스터들이다.
레벨을 봤을 때 플레이어들이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지만.
‘나는 올 수 있지만 플레이어들은 오기 힘든 곳이라.’
이건 이것대로 써먹을 수 있을 거 같다.
지금 당장은 못하겠지만.
[외출]
-남은 시간: 00:34
간신히 시간을 맞췄다.
중간에 길을 헤매지 않았다면 더 빨리 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뭐, 도착했다는 거 자체가 다행이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마을.
[빅힐]
-93층 스타팅 지점 중 하나.
-완만하면서도 큰 언덕이 특징입니다!
-93층 최대 곡창지대.
-상인들과 안면을 트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빅힐. 새로운 스타팅 지역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규모는 내가 있던 네버데일보다 컸다.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농경지 면적이 넓었다.
농업 기반으로 성장한 마을. 식량을 구매하기 위해 들리는 상인들 덕에 상업도 어느 정도 발달되어 있었다.
“외부에는 농경지. 마을 중앙 부분에 대부분의 시설이 몰려 있군.”
내가 있는 곳이 더 위에 있었기에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게 좋았다.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서 살펴봐야겠지만 대략적인 구조는 알아볼 수 있었다.
설명에도 나와 있다시피 이곳은 93층 최대 곡창지대. 그렇다는 건.
“여길 가장 먼저 불태워야겠어.”
침공할 때 우선적으로 없애야 할 곳이 이곳이라는 뜻이었다. 식량의 중요성은 말이 필요 없다.
당장 나도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었으니까.
무기는 부족해도 노획할 수 있다. 질은 떨어져도 농기구나 다른 것들을 긁어모아 새로 만들 수도 있고.
지휘부 타격? 이것도 분명히 타격이 크다. 지휘체계 자체가 무너지는 일이었으니.
다만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은 군인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개인이나 소규모 파티로 움직이는 게 대부분. 효과가 떨어진다.
“이거 외출로 얻어가는 게 많은걸?”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어간다.
남은 시간은 이제 20분 남짓. 뭔가를 더 하기에는 애매한 느낌이긴 하다만 이왕 온 거 내부도 구경해야지.
-파앗!
발을 굴렀다.
이대로 바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게임 시작 초기에 몬스터의 영역을 뚫고 온 사람은 너무나 수상하니까.
클린으로 몸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정문으로 향했다.
가벼운 복장에 흉갑과 투구만 쓰고 있는 경비들. 워낙 평화로운 곳이라 그런가 다들 경계심이 없다.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출입을 관리할 뿐.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휴펜피디아에서 왔습니다. 생활 스킬을 좀 배우려고요.”
“아아, 레벨을 보니 아직 2차 전직할 때는 아닌 거 같은데… 그쵸. 대도시에서 저렙 때 버티기가 쉽지 않잖아요. 하하.”
넉살 좋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린 병사가 출입을 허가해 준다.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나아갔다.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사람이 많아.’
그리고 건물 대부분이 목조 건물이라는 것. 아무래도 농경지 개간을 위해 나무를 자르다 보니 그걸 이용해 집을 지은 모양.
내게는 좋은 소식. 따로 뭘 하질 않아도 불나면 활활 탈 거 같다.
남들이 알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품으며 상가로 들어갔다. 이른 아침이었으나 농업이 발달한 곳만큼 네버데일보다 기상 시간이 빨랐다.
돌아갈 때는 돌아가더라도 몇 가지 사 갈 게 있다.
“감자랑 모종 몇 개. 빠르게 자라는 게 뭐가 있죠?”
“농사는 처음인가 보구만? 얼마나 키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초보면 이게 낫지.”
다름 아닌 농사지을 씨앗.
처음에는 식량을 사 갈까 했는데 이게 좀 더 좋을 거 같았다.
왜냐.
임프 농장은 농사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 현실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이곳은 게임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곳. 진짜 농사처럼 수개월, 1년씩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뭐, 이건 이거고.
“이곳에 있는 플레이어 중에 요정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 있나요? 저번 시즌 때 원정대로 나간 사람 있잖아요.”
물어볼 건 물어봐야겠다.
“아, 요정. 네임드 플레이어기는 하지. 이곳에는 없다네. 그 사람이라면 초반부는 그냥 뛰어넘길 가능성이 커서 말이야. 대신 다른 유명한 자가 있긴 하지.”
“다른 유명한 사람이요?”
“그래. 하는 짓이 좀 특이하기는 한데 이상한 사람이지 나쁜 사람은 아니야.”
묘한 설명이었으나 그러려니 했다.
탑에 이상한 사람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마침 저기 오는군. 이보게! 이상한 양반!”
대놓고 이상한 양반이라고 하다니. 나름 친한 걸까.
괜히 흥미가 생겨 고개를 돌리자.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오.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것이외다.”
요상한 말투를 쓰고 있는 동양풍 옷을 입은 남자가 보였다.
길게 기른 머리를 뒤로 묶고 눈은 지그시 감고 있다. 뭐랄까. 실눈 캐?
게임에서 실눈 캐는 조심하라 하던데.
꽃무늬가 들어간 펑퍼짐한 옷에 부채를 쥐고 흔드는 모습만 보면 어디 조선시대나 중국에서 왔나 싶었지만.
“외국인?”
금발 머리 백인이 그러고 있으니 어디 한옥촌 체험 온 사람 같기도 했다.
괴상한 조합에 눈살을 찌푸리던 찰나 녀석의 머리로 떠오른 닉네임과 레벨이 보였다.
[화무선 Lv.16]
16레벨이라니. 이곳 플레이어 평균 레벨이 10이 안 되는데 혼자 괴상하리만치 높다.
녀석 또한 내 레벨을 봤는지 눈썹을 까딱인다.
“호오, 이런 귀인이. 이 시기에 나와 동격인 자는 참으로 오랜만이오. 그대 존함이 어찌 되오?”
“…위에 적혀 있잖아요.”
“허허허허! 그것도 그렇군. 허나 통성명이란 자고로 육성으로 전달되어야 의미가 있는 법. 나 먼저 소개하지. 화무선花武仙이라 하오.”
“나는 이블, 아니. 무지개, 용사라고 합니다.”
“그것참 좋은 이름이군! 허허허!”
뭐지? 멕이는 건가?
소리 내 웃던 녀석이 내게 다가온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 법. 내 벗을 사귀는 데 주저함이 없소만 그대는…….”
가까이.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녀석이 말을 이었다.
“피 냄새가 많이 나는군.”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는 화무선.
“어찌 인세人世는 마음에 드오? 마왕성에서 온 자여.”
이것 참.
그래도 나름 잘 꾸미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들켰으면 어쩔 수 없지.
“아주 마음에 들어.”
[외출 종료!]
[마왕성으로 돌아갑니다.]
시야가 바뀌었다.
* * *
“허허. 참으로 급한지고.”
“어어? 어디 갔어! 계산은 하고 가야지!”
“너무 그러지 마시오. 계산은 대신할 터이니.”
갑자기 사라진 이블아이. 상가 주인이 펄쩍 뛰었으나 화무선이 넉넉히 계산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헤헤 웃는다.
스읍. 후.
길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은 화무선이 짧게 고개를 까딱였다.
“냄새가 사라졌구료. 이건 못 쫓겠소.”
흥미가 돋아 따라붙을까도 싶었지만 상대는 이미 사라진 상태. 그 흔적까지 완전히 없어졌으니 쫓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의 입가는 호선을 그렸으니.
“이번 놀이는 즐거울 거 같소. 이 즐거운 소식을 홀로 알고 있을 수는 없지. 벗들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어.”
그가 커뮤니티를 켰다.
탑에 있으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커뮤니티밖에 없는 법.
[화무선]: 아아, 세상일은 알 수가 없소이다.
[김조균_산군]: 얘 또 개소리 할라 한다. 좀 말려 봐.
[초코쪼코]: 쪼규나, 개소리라니. 누나가 그렇게 가르쳤니? 나처럼 말을 고상하게 해야지!
[김조균_산군]: ……? 뭐 잘못 먹음? 고상한 게 아니라 그냥 상한 사람이 그리 말하면…….
[초코쪼코]: ㅎㅎ, 요 앙큼한 녀석 같으니. 올라오면 내가 콱! 깨물어 줘야겠다.
[스마일 캡]: 해석=너를 물어 죽이겠다
[화무선]: 허허. 축생도 아니고 물어 죽이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초코쪼코]: 너도 예약 ㅎㅎㅎㅎ.
[화무선]: 저 금수는 물어도 되오. 암 그렇고말고. 세상 귀천이 없다지만 저자는 괜찮소.
[초코쪼코]: 그래서 넌 위로 언제 올라오는데. 저번에도 클리어 안 됐다매.
[화무선]: 아, 그거 말이온데 내 참으로 진귀한 것을 보았소.
평소와 같이 잡담을 나누다가 본론으로 돌아오자 화무선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웠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짙은 피 냄새. 그 안에 스며들어 있던 몬스터 특유의 체취.
처음에는 사냥꾼이나 특수 직업인 야만 전사가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도가 심했다.
오히려 마왕에 가까웠지.
이전 시즌, 마왕을 잡으러 갔었던 화무선이기에 알 수 있었다. 다만…….
‘마왕이 이곳을 염탐하기에는 너무 이르오.’
나름 이곳에 오래 있던 화무선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초반에는 성장하는 데 바빠 침공이나 염탐을 하지 않는다.
인류 측도 이제 막 시작하는 타이밍이라 구태여 찾아와 살필 것도 없고.
침공이라면 모를까 외출로는 플레이어들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이건 마치.
[화무선]: 이번 마왕, 등반가 같소.
처음 이 게임을 시작하는 자의 움직임 아닌가.
그렇게 판단한 화무선이 채팅을 했고.
[초코쪼코]: 엥? 진짜? 그런 적이 있던가.
[스마일캡]: 잘 모르겠군. 난 그쪽을 거치지 않았어서.
[초코쪼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마왕이 바뀌었다면 엔딩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잖아.
[화무선]: 나 또한 그리 생각하오.
[초코쪼코]: 좋아! 이제 내가 손을 좀 써야겠네. 요정 클럽 쪽에 접선해 볼게. 누나만 믿어!
[화무선]: 그대 말고 스마일캡이 말해 주는 것이…….
[초코쪼코]: 나 못 믿어? 나 못 믿냐고?!!!! 야!!!!!
잠시 눈을 꿈뻑이며 채팅창을 바라보던 화무선이 이내 커뮤니티를 닫았다.
“이번에는 위로 향할 수 있으면 좋겠소.”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