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9화 잘 알지
여러 가지 고민이 들었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외출권이었다.
마왕성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고, 아직 내가 부릴 수 있는 부하 중에서 몰래 사람들 사이에 잠입해 정보를 빼 올 수 있는 객체는 없었다.
무슨 상황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 빠져나올 무력과 능력도 있어야 하고.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히메룬이지만.
“넌 안 되겠지.”
“뭐가 말입니까.”
밤에 몰래 움직이더라도 메두사의 특성상 눈에 너무 띈다.
일단 다리가 없다. 라미아의 피가 섞여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덩치가 작은 편도 아니고. 꼬리까지 쫙 피면 4미터는 넘을 거다.
무엇보다 마왕성 관리를 위해서라도 히메룬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
등급에 따라 지능에도 차이가 있는지 밖에 우글거리는 1성급 몬스터들은 빡대가리 그 자체였으니까.
밭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라고 하면 터널을 뚫을 놈들이다.
“마왕성 상태는 좀 괜찮아?”
“예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졌어요. 이전까지는 벌어들이는 수익 모두를 식량을 확보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지금은 조금이나마 식비가 줄었습니다.”
“임프 농장 하나로는 부족하겠지?”
“물론입니다. 안정적으로 식량을 수급할 수 있는 곳이 더 필요합니다.”
외출하는 건 하는 거고, 내가 없는 사이에 몬스터들을 가만히 놔둘 생각은 없었다.
당장 필요한 기능들도 많았고, 내가 외출해 있는 사이 해야 할 일들도 있었다.
‘미개척지 개척.’
무작정 개척지를 늘리는 건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이번 침공을 시작으로 개방 조건이 풀렸는지 관리창 일부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그중에는 몇 가지 가이드가 적혀 있는 것도 있었는데.
‘침공 순서는 정해져 있어.’
정확히 말하면 이번에 침공을 막아 내었던 꾸물거리는 늪은 놈들이 침공해 올 시 가장 먼저 마주치는 공간이 되었다.
침공해 올 때마다 랜덤으로 개척지에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뜻.
만약 침입자들이 꾸물거리는 늪을 뚫고 다음 개척지로 이동하게 된다면, 이후엔 그 개척지가 늪 다음으로 연결되는 개척지가 된다는 거다.
게임을 플레이할 때 스테이지가 정해져 있듯이 말이다.
이런 구조를 가지게 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적들이 준비해서 공략할 수 있도록 하려는 거야.’
침입자들은 각 스테이지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몬스터가 나타나고 어떤 환경을 가지고 있는지 경험을 통해 학습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클리어 확률이 올라가고 조금씩 마왕성에 가까워지겠지.
공략이 알려진 곳에서는 아직 성장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이 몬스터를 사냥하며 성장할 거고.
즉, 어중간하게 만들어진 개척지는 놈들의 경험치 농장이 될 뿐이라는 거였다.
동시에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도 침입자들 역시 수많은 피해를 입을 거고 우리도 많은 것을 얻게 될 테니까.
나 역시 개척지를 얻어야 다른 임프 농장 같은 시설을 배치하거나 광산과 같은 곳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걸 역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있기는 한데.
“히메룬, 개척지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마왕성으로 놈들을 불러들여 싸우는 전략을 쓴 적이 있나?”
“있습니다. 꽤 효과적인 방법이었죠. 초반, 잘만 하면 중반까지도 유용한 전략입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의 격차가 커집니다.”
역시나.
마왕성으로 놈들을 불러들여 잡는 것.
확실히 내가 직접 나설 수 있고, 마왕성에서 대기 중인 몬스터도 많으니 침공해 오는 적들을 상대하는 건 편할 거다.
100퍼센트에 가까운 승률을 보일 테니까.
10레벨짜리 플레이어들이 개떼같이 몰려와도 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다만…….
“플레이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침공뿐만이 아니니까요.”
이 부분이 문제였다.
초반에는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겠지만 적들은 계속 강해져서 덤벼올 거다.
반면에 마왕 측은 덤벼오는 놈들을 통해서만 성장해야 하니 그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고.
여기까지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놈들도 침공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었으면 이번에 덤벼온 놈들도 레벨이 1이었을 테니까.’
애초에 단 한 번만 패하면 끝나는 전략이기도 했다.
난 지금까지 없었던 엔딩을 봐야 한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정석을 벗어나서 행동할 필요는 없다.
괜히 그랬다가는 뒷수습이 안 될 테니까. 적당히 평범하게, 대신 차별화 포인트를 가져가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외출권을 확인했다.
[외출권]
-즐거운 외출! 마왕성의 영역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인류 측 도시 중 한 곳으로 랜덤 전송됩니다.
-24시간 후 강제 귀환합니다.
-필요하다면 24시간보다 빠르게 귀환할 수도 있죠!
내게 주어진 건 24시간.
밖으로 출발하기 전, 난 근처에 진입할 수 있는 미개척 구역을 들렀고, 그 안에 탐사를 위한 몬스터들을 넣었다.
그 과정에서 이틀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탐사만 잘 끝나면 7개의 개척지를 더 얻을 수 있을 거다.
골드를 비롯해 필요한 아이템도 얻을 수 있을 거고.
외출권을 사고 남은 골드는 잠시 놔두었다. 어떤 개척지가 생기는지에 따라 사용처를 달리할 예정이라.
시간이 지나 이른 아침.
막 떠오르는 해를 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
“히메룬, 내가 이야기한 거 잘 기억하고 있지?”
“물론입니다. 다만 진짜 이렇게 해도 될까요?”
“난 네 판단을 믿어.”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야.”
기분이 좋은지 뱀 꼬리를 만 히메룬이 내가 건네준 진화석을 받아들였다.
[외출 기간 동안 히메룬에게 대리인 자격이 부여됩니다.]
“마왕성을 노출시키지만 않을 정도로.”
“알겠습니다.”
내가 밖에 나가 있는 사이, 마왕성은 히메룬이 관리한다.
마왕성 내부뿐만 아니라 혹시 모를 침공에 대한 것까지도.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게 침공에 대비해 전력을 배치하는 걸 해 보고 싶었던 거 같다. 이런 쪽에 흥미가 있나.
‘괜찮게 해내면 나중에 지휘권 일부를 주는 것도 생각해봐야지.’
개척지가 계속해서 생겨난다면 나 혼자 모든 곳을 관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건 그거고.
난 포탈을 넘어가기 전 마왕성을 바라봤다.
[마왕성 Lv.1]
‘저건 언제 레벨 업 하려나.’
좀 더 지켜보면 알겠지.
망설임 없이 인류 측으로 향하는 포탈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운 스텟이 발동합니다!]
* * *
가벼운 가죽 갑옷을 입고, 별다른 옵션이 없는 철검을 허리에 찼다.
간단한 위장으로 수염도 붙였는데 어색함이 없어 나름 만족한 상태로 거리를 거닐었다.
몬스터에게 내가 가진 아이템을 주는 건 못하지만 내가 쓰는 건 문제 없는 모양.
‘이렇게 입길 잘했군.’
혹시 몰라 허름한 것들로 맞춰 입었는데 돌아다니는 플레이어 태반이 나와 같은 몰골이다.
종종 멀쩡한 갑옷을 입은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도 풀 플레이트는 아니고 흉갑 하나 달랑, 각반이나 건틀렛 정도만 간신히 착용한 정도.
그러면서도 콧대 높게 다니는 걸 보니, 지금 상황에서는 사이즈 측정도 안 하고 싸구려 철로 만든 갑옷도 입기 힘든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런 놈들을 보며 감탄하는 애들도 있고.
‘확실히 처음 침공한 애들이 준비 많이 했네.’
무리해서 준비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인류 측 스타팅 지점 중 한 곳, 네버데일.
강가에 위치한 마을이었는데, 수로를 통해 위로 올라가면 대도시 휴펜피디아로 갈 수 있었다.
아마 이곳에서 힘을 기른 후 대도시로 넘어가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나중이라면 대도시인 휴펜피디아로 가겠지만 지금은 초반. 지금은 플레이어들이 스타팅 지역에 몰려 있을 시기였다.
지금 기회에 적들을 쓸어버리면 좋겠지만.
[외출 중에는 전투할 수 없습니다.]
아쉽게도 외출 상태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이게 가능했으면 밸런스가 안 맞지.
외출은 어디까지나 정찰과 탐색을 위해서다. 더불어 마왕성에서 자체 공급할 수 없는 물품을 사 드리는 용도.
전투는 못 하지만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마왕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능이 외출에 붙어 있어서 위험하지는 않았다.
“흐음, 요즘 몬스터가 많아 약초를 구하기 힘든데 도와줄 수 있나?”
“와일드 하운드의 가죽이 필요한데.”
“골목길에는 들어가지 말게. 질 나쁜 놈들이 있거든.”
잠깐만 돌아다녀도 퀘스트로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하다.
마을 밖으로 나가면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저레벨 몬스터들도 많고. 초반 성장에 필요한 조건이 상당히 괜찮았다.
‘무난하게 능력치를 키울 수 있다는 거지.’
누군 밥 먹는 것도 고민해 가면서 먹고 있는데.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개인이랑 무리의 수장이랑 같은 위치에서 시작할 수는 없는 거니까.
나도 그냥 마왕군 중 한 명으로 시작했다면 지금 하는 고민 따윈 안 했을 거다.
나 혼자 먹고살면서 스펙업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상황에 맞춰서 행동하는 거지.’
이곳에 온 목적에 집중하자.
내게 주어진 시간은 24시간. 잠을 잘 시간도 없다. 그 안에 많은 것을 파악해야 했으니까.
가능만 하다면 모든 스타팅 지점을 찾아가 보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시간이 없다. 어느 정도는 짐작으로 해결해야 한다.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은 플레이어의 수.
“파티 사냥 가실 분 있습니까!”
“제작 기술 필요하신 분?”
“물약 팝니다!”
사냥을 하는 이들뿐만이 아니라 생활 스킬을 쓰는 이들도 다수 존재했다.
각자의 능력으로 시장을 만든 것이 탑 초기 안전지대랑 비슷한 느낌.
필드가 아닌 마을에서 활동하는 이들 또한 플레이어로 계산을 해야 했고.
‘대략 이 마을에 200명 이상. 밖에서 활동 중인 사람까지 합치면 400명까지도 가능할 거 같군.’
이런 스타팅 지점이 총 4개라고 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4곳. 그 외에 알려지지 않거나 대도시에서 시작하는 이들, 특수한 상황에서 시작하는 등 다양한 경우가 있다고 했으니 숫자는 더 많겠지.
오차가 꽤 있겠지만 어림짐작하자면.
‘플레이어의 숫자는 2,000명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군.’
생각보다 많은 거 같으면서도 적당한 느낌.
침공에 실패할 때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갈 테니 그 수가 빠르게 줄어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나 예상치 못한 위험에 맞부딪친다면 말이지.
“저기요.”
사냥터를 살피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그때, 누군가 나를 불러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드루이드 혼혈로 보이는 남자와 각각 무기를 지니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파티 플레이인가. 방패를 든 녀석과 궁수. 날 부른 사람은 도끼가 주무기고, 남은 한 명은 마법사 같다.
굉장히 기본적이면서도 적당한 멤버.
그들 위로 보이는 레벨.
[미루주 Lv.10]
[맥시무스 Lv.9]
[줄리아 Lv.10]
[포맨 Lv.8]
‘아직 평균 레벨은 9 정도군.’
성장 속도가 미친 듯이 빠르지는 않은 모양.
나한테는 다행인 일이었다.
“무슨 일이신지?”
“혹시 파티할 생각 있나요? 크흠, 저희끼리 가기에는 좀 힘들 거 같아서 도와주시면 감사할 거 같은데…….”
도움? 갑자기 나한테?
뭔 소린가 싶어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 또한 내 머리를 흘낏거렸으니.
[무지개 용사 Lv.16]
-외출 중에는 닉네임과 레벨이 임의 결정됩니다.
-보안을 위한 서비스!
-감동이죠?
“이런 씨.”
“예?”
“아, 아닙니다. 좋아요. 가시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어쩐지 돌아다니는 동안 날 보는 사람들이 좀 있더라니 레벨이 16으로 되어 있던 건가.
배려가 맞기는 하다. 나 혼자 레벨이 안 떠 있으면 그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으니까.
닉네임이 무지개 용사인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쁘띠 공듀가 아닌 게 어디야.’
어쩐지 이쪽으로 넘어올 때 행운 스텟이 발동되더라니 이거 때문이었나.
고맙다, 행운 스텟! 믿고 있었다고!
속으로 부르르 떤 것도 잠시.
“아, 그런데 어딜 가려는 거죠?”
“그냥 필드에서 사냥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빠르게 강해지려면 거기죠.”
날 부른 도끼 남. 맥시무스가 입꼬리를 올린다.
“마왕성.”
아, 거기.
“가시죠. 제가 거긴 또 잘 알죠.”
진짜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