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뭐가 없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있는 곳은 마왕성. 게임에서 흔히 부르는 최종 여정지였다.
“돌겠네.”
알현실에 앉아 있던 것도 잠시. 테라스로 걸어가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이곳은 세상의 끝. 온갖 괴물들이 도사리는 곳.
자세히 보면 괴물에 불과한 이들이었지만 멀리서 보면 사람이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건을 사고 대화를 나누며, 성장을 위해 저마다 훈련하는 모습.
“아니, 뭔 최종 보스야.”
“그에에.”
나도 어릴 때는 게임을 좀 했었다.
중학교 시절에 세상이 개판이 되면서 강제적으로 철이 들기 전까지는 말이지.
RPG란 무엇인가.
Role-Playing game.
말 그대로 역할 놀이.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성장하는 게임이었다.
최종 보스라는 건 각자 성장한 캐릭터를 가지고 끝내 마무리 지어야 하는 괴물이라는 뜻이고.
게임의 마지막. 세상의 끝에서 다양한 성장 과정을 거쳐 끝내 승리하는 트로피.
게임의 목적이자, 그동안의 고생을 끝내고 위대한 업적을 끝내는 자리.
그게 내가 맡은 역할이었다.
‘내 성향이 영향을 줄줄 알았는데.’
나의 성향은 두 개.
새로운 길의 선구자.
정의할 수 없는 혼돈.
그동안 진영을 선택할 때는 정의할 수 없는 혼돈으로 규칙을 어그러트리고 내가 원하는 위치를 결정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별 쓸모 없다고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성향.
아쉽게도 이번에는 별다른 힘을 내지 못했다.
선택지가 주어진 게 아니라 내 행동에 따라 역할이 정해진 탓일 거다.
아니, 생각해 보니 어이없네.
동굴 부수고 나왔더니 마왕? 무슨 봉인을 동굴에다가 해 놨어.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며 현재 상황을 점검했다.
어찌 됐든 일은 벌어졌고 난 이곳에서 뭔가를 해야 한다.
90층대에서는 다음 층으로 가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해당 층에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91층에서 마피아 게임을 끝내고, 92층에서 뱀파이어를 잡은 것처럼.
이곳도 마찬가지.
일단은 게임 형태를 띠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겠다.
‘엔딩을 보는 것.’
게임이 끝나려면 엔딩이 있어야 하니까. 그럼 93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 거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엔딩을 보냐는 건데.
게임의 엔딩은 다양하다. 해피 엔딩도 있고, 배드 엔딩도 있고, 진엔딩이나 히든 엔딩도 있다.
일단 배드 엔딩은 안 된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 배드 엔딩은 칼 맞고 죽는 거니까.
“입장이 바뀌니 답이 없는데.”
머리를 긁적였다.
그동안 내가 활동했던 것을 요약하면 나는 문제가 되는 존재, 게임으로 치면 악당을 물리치는 입장이었다.
그 과정이 어떻든 간에 큰 골격은 비슷했다.
나는 여러 인연을 만나 강대한 적과 싸웠고 끝내 이겨냈으니까.
영웅 서사가 그러하듯 나와 내 주변 인물들은 전보다 강해져 이겨 낼 수 없는 적들을 물리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 입장인 거고.
“강해지기 전에 죽인다던가?”
순간 혹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누굴 죽인단 말인가. 나를 처치하기 위해 오는 사람이 누군 줄 알고. 나이, 성별, 이름을 떠나 몇 명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나 빼고 모든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봐야지.
“어차피 엔딩은 각자 볼 거야.”
적어도 내 예상은 그렇다.
같은 게임을 하더라도 각자 플레이 스타일이 다르고, 보고 싶은 엔딩도 다를 테니까.
사냥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활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솔플보다는 길드전과 같이 여럿이서 하는 걸 좋아하기도 한다.
잠깐만.
“그런데 꼭 저쪽 사람들만 엔딩을 보라는 법이 있나?”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내가 최종 보스라고 해서 사냥당할 것만 떠올렸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잖아.
진영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되지.
상대방은 인류 쪽. 나는 괴물 쪽.
스타트 위치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플레이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애초에 그럴 수 없는 거라면 나한테 마왕 역할을 주지도 않았겠지.
시스템은 악독하기는 하더라도 공정하다.
기회 자체는 모두에게 준다. 그게 등반가든 NPC든.
당장 중립 NPC에게도 자격만 있으면 새로운 기회를 주지 않던가.
나라고 다를까.
묘한 자신감이 생겼다.
“난 나만의 엔딩을 보면 되는 거야.”
강력한 괴물들을 앞세워 세계 정복이라는 엔딩을 볼 수도 있는 거잖아.
아니면 요주 인물들만 쓱싹 해치운다던가. 뒤에서 선동질해서 서로 치고받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살짝만 생각을 바꾸면 방법은 많다.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상황 보면서 차차 정하면 되고.
-똑똑
“들어와라.”
내 말에 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인물은 비서. 눈을 가리고 있는 메두사였다. 이름이 히메룬이었던가.
상체는 사람, 하체는 뱀. 라미아랑 비슷한 게 혼혈이 아닐까 싶다.
“내부 안내 준비를 마쳤습니다, 마왕님. 가시죠.”
존대를 쓰기는 하지만 격식을 차리지는 않는 말투.
마왕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사실 신처럼 떠받드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리더인 건 확실하지만 숭배하지는 않는 정도?
적어도 내가 느낀 분위기는 그랬다. 뭐, 어느 정도 급이 있는 이들만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이상하지는 않았다.
‘마계도 비슷했잖아.’
여긴 마계가 아니지만 분위기 자체는 흡사했다.
마족 대신 온갖 괴물이 있다는 게 달랐지.
어제 마왕성에 들어오고 나서 공식적인 업무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업무라고 해 봤자 이제 막 봉인에서 풀려난 나를 위해 마왕성 내부 일과 현재 상황을 알려 주는 것 정도지만.
안 그래도 정보가 좀 필요하던 찰나였다. 뭘 하려고 해도 뭐가 되는지는 알아야 하지.
마왕성의 기능. 보유하고 있는 괴물들의 숫자와 전투 능력.
앞으로 상대해야 할 이들의 위치와 수준까지 알아볼 게 많았다.
“출발하지.”
시작이 반이라고 하던가.
본격적으로 마왕성을 탐문할 시간이다.
* * *
결론만 말하자면 뭐가 없었다.
진짜 뭐가 없다.
“…지금까지 어떻게 마왕성이 운영된 거지?”
“없는 자금 모으고 모아서 알뜰히 사용했지요.”
“빈곤한 마왕성이라니.”
큼지막한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왕성 내부를 둘러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크게 둘러볼 곳이 없었으니까.
성 자체는 크다. 그런데 안이 비어 있다.
분명 어제는 꽉 차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건물은 텅 비어 있었군. 괴물들만 득실거렸지.’
전대 마왕들의 초상화라던가 금은보화, 화려한 샹들리에나 괴수 사육장 같은 건 없었다.
아낀다고 초 하나만 꽂아 둔 촛대나 깨끗이 빨았지만 희미한 얼룩이 묻은 이불, 직접 만든 게 분명한 나무 그릇 정도나 있었지.
할 게 청소밖에 없는지 방이 깨끗하긴 했다.
‘하다못해 훈련장에 연습용 무기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가 보니까 죄다 맨손으로 쇠기둥을 치거나 개인 무기를 휘두르고 있던데.
그나마 멀쩡하게 굴러가는 곳이라고는 주방 정도?
그 외의 공간은 온기가 식어 있었다.
마왕성 밖에 있는 연무장에 괴물들이 땀 흘리면서 훈련하고 있기에 파이팅이 넘치는구나 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 말고는 할 게 없는 거였다.
심지어 훈련장에 있는 녀석들은 죄다 하급 몬스터다. 머릿수만 많고 실속이 없다고 해야 하나.
‘90퍼센트 이상이 하급이야. 그나마 쓸 만한 애들은 비서랑 현재 일하고 있다는 놈들 몇 명 정도.’
다들 먹고 사는 데 바쁜지, 그동안 마왕이 없어 심심했던 메두사를 제외하면 다들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뭐지, 나 마왕 아닌가. 그래도 얼굴은 보여 줘야 하지 않나.
이게 말로만 듣던 은따?
갖은 생각이 들었지만 메두사인 히메룬의 설명을 듣자니 할 말이 없어졌다.
“실질적으로 마왕성을 운영하고 있는 분들이라 자리를 비우면 저희 밥 굶습니다.”
“그래. 밥은 먹어야지, 밥은.”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시작하기 전만 해도 세계 정복이니 뭐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는데 헛된 꿈이었다.
“지금 바로 쳐들어가서 승부를 본다던가?”
“자살하고 싶으면 혼자 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전 오래 살고 싶어요.”
“말이 너무하네.”
“자금을 모아서 전력을 강화하는 게 정석입니다.”
그래.
초반 러쉬는 안 된다는 거네.
어째서 디펜스 게임 같은 거에서 초반부터 보스급을 내보내지 않고 약한 녀석들부터 내보내나 했더니만 이런 이유가 있던 건가.
보내지 않은 게 아니라 보내지 못한 거였다. 병력을 뽑을 자금이 없어서.
묘하게 현실적인 이유에 발목을 잡히니 할 말이 없다.
마음 같아서는 나 혼자 쳐들어가서 깽판을 칠까도 싶었지만.
[마왕이 인류 영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외출- 100골드]
[소규모 출정- 10,000골드]
.
.
.
[플레이 Tip. 나가기 힘들다면 영역을 넓혀 보세요!]
나가는 것도 돈이 든다.
어쩐지 게임 보면 보스몹들은 죄다 자기 영역 안에만 있더라.
그 와중에 진짜 게임처럼 Tip도 준다.
기분이 이상하지만 나름 쓸모 있는 정보긴 하다. 영역을 넓히는 것도 방법이니까.
뭘 하든 자금 확보는 필수다.
“골드는 어떻게 벌지?”
“물자를 캐거나 탐색을 통해 보물을 얻는 것도 방법이죠. 물건을 만들어 파는 방식도 있습니다.”
“물건을 팔아? 누구한테?”
“인간들이요.”
“…오.”
벌써 어지럽네.
사람한테 물건 판 돈으로 사람들을 공격한다라.
어찌 보면 이거야말로 악당다운 짓이 아닐까.
“실제로 마왕성에서 만든 무기는 인기가 좋습니다. 이곳에서만 나는 광물이 있어서요. 물론 지금은 못 만듭니다. 대장간 가동할 돈이 없어요.”
아니다. 괴물한테 산 칼로 괴물 찌르는 사람이 더 사악한 거 같다.
사람과 괴물의 기묘한 관계에 피곤해져 눈 뼈를 문질렀다.
왜 갑자기 현타가 오지.
집 가고 싶다. 무한 코인 때문에 못 가지만.
잠깐 동안 이어진 정적.
“탐사, 탐사 먼저 하자.”
“좋은 선택입니다. 미개척 구역이 많거든요.”
마왕성은 대충 둘러봤으니 바깥을 좀 봐 봐야겠다.
망할 자금 확보도 좀 해야겠고.
혹시나 내가 가지고 있는 포인트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테스트해 봤지만.
[판타데미아 내부의 재화만 사용 가능합니다.]
시스템에 의해 막혀 있었다.
좋다.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진심으로 게임을 한다 생각하고 움직인다.
애초에 이곳의 지배자가 그런 식으로 규칙을 정해 뒀다는 거니까.
원한다면 나도 그렇게 어울려 줘야지.
‘대충 어떤 느낌인지 파악은 됐어.’
언제든 쳐들어올 수 있는 적들과 달리 난 영역 내에서 싸워야 한다.
출전할 수도 있지만 부담이 크기에 확실히 이길 수 있을 때 아니면 전략적으로 사용해야 하고, 정상적인 마왕성 운영을 위해서라도 이곳을 발전시켜야 한다.
한마디로.
‘디팬스, 타이쿤이 결합되어 있다는 거야.’
어떻게 보면 실시간 전략 게임이라고 볼 수도 있고.
자세한 건 겪어 보면서 알아봐야겠다.
* * *
외출 준비를 마치고 히메룬과 함께 마왕성을 나섰다.
훈련장을 벗어나면 곧 미개척 구역.
희미하게 푸른색을 띠는 장막이 눈에 보인다.
마왕성은 거대한 돔으로 둘러싸인 형태. 일종의 영역 표시 같다.
[미개척 구역에 진입하겠습니까?]
[첫 진입은 마왕 본인이 진행해야 합니다.]
“어. 들어간다.”
메시지와 함께 장막 일부가 벗겨진다.
안으로 진입하자 나를 반기는 건 푸른 초원.
낮은 언덕이 구불거리고 선선한 바람에 따뜻한 햇볕.
깡총거리며 돌아다니는 토끼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힐링…….
-빠악!
“끼엑!”
갑자기 날아든 돌멩이가 토끼를 때린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식량은 구해야죠. 여긴 좋네요. 먹을 게 많아서.”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며 주섬주섬 가방을 꺼내는 히메룬이 보였다.
“웁니까?”
“아냐.”
그냥 짠해서. 난 얼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