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4화 93층
간밤의 소동은 마무리가 됐다.
기사단이 철수하고 경비대와 특임대가 난장판이 된 외성을 관리했으며, 대피했던 주민들도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
그사이에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처리된 건 말할 것도 없고.
베가 파티는 거의 파티 분위기라나. 피해는 거의 없지만 숙원이었던 뱀파이어들을 소탕할 수 있었으니까.
시스템이 그걸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겠지만 한동안 평화로울 건 분명했다.
‘적어도 다른 NPC들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겠지.’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그때까지 층에 머물렀던 적이 없어서.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는 시점, 오드릭을 비롯해 지원을 나섰던 괴물 사냥꾼들은 병원에 실려 가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다.
부산스러운 외성과 달리 내성은 한적했으니.
“고생 꽤 했네, 아이고.”
난 영주성에 비어 있는 공터에서 기지개를 켰다.
92층은 클리어된 상태. 퀘스트도 받았고 파무다라와도 몇 가지 계약을 했다.
“미야는 어때?”
“상태가 좋아.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잠들어 있을 뿐이지.”
“다행이네.”
공터에 있는 건 나와 파무다라, 프렐다.
미야는 파무다라의 피를 먹고 변이가 멈추면서 잠들었다. 아무래도 신체가 변하는 일이다 보니 회복기가 필요한 모양.
칼리버야 뭐, 파무다라가 알아서 잘 챙기고 있을 거고.
“약속한 거 잊지 마라.”
“물론이지. 계약서까지 작성했잖아?”
파무다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퀘스트를 받아들이며 몇 가지 조건을 걸었고, 시스템이 보증하는 계약서에 사인까지 마쳤다.
내가 원한 두 가지.
첫 번째. 피 수급을 가능한 살인으로 하지 말 것.
특별히 인류애가 뛰어나거나 도덕적이라 이런 걸 요구한 건 아니다.
‘칼리버가 또 날뛰면 곤란해.’
놈이 이성을 잃고 피를 빨아 대면 변이가 가속된다.
지금도 뱀파이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변이가 심화되었다. 적어도 내가 녀석을 문 뱀파이어의 피를 뽑아 전해 주기 전까지는 인간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즉, 시간제한이 있는 퀘스트.
파무다라의 예상으로는 앞으로 정말 길어야 1년. 무난히 흘러간다면 5개월. 가속된다면 1달을 겨우 넘길 거라고 한다.
어쩐지 급하게 내게 제안을 건다 했다.
만약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으려나. 동생을 위해 층 전체를 바꿔 버린 놈인데.
작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 냈다.
벌어지지 않은 일에 힘 쏟지 말자. 결국에는 잘 해결됐으니까. 적어도 내가 퀘스트를 실패하기 전까지는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된다.
‘두 번째 조건이 중요하지.’
쁘찡 연합 사람들이 들어오면 잘 봐줄 것.
이전, 91층에 알리오스를 지배자로 내세우며 했던 것과 같은 거였다.
이름하여 90층대 안전길 확보!
가능한 많은 이들이 높이 오를 수 있도록 내 선에서 안전망을 만드는 거다.
물론 완전한 방법은 아니다. 같은 90층대라도 여러 개 있으니까.
적어도 이쪽으로 온 사람은 비교적 안전하게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 두는 것뿐이다.
이번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지배자 권한을 가지게 되니 더 안전하게 있을 수 있겠지.
“가 보자.”
준비는 끝났다.
내성에 머물면서 컨디션 회복은 모두 마친 상태.
난 포탈을 향해 걸어갔고.
“무운을 빌지.”
“조심히 가라. 고마웠어.”
“별말을. 잘 있어.”
둘의 배웅을 받으며 위로 향했다.
* * *
[93층에 진입합니다.]
-우우우우우웅
익숙한 부유감. 새하얀 빛이 나를 감싼다.
93층이라, 위에 뭐가 있으려나.
90층대에는 뭐가 나타날지 예상하기가 힘들다. 애초에 테마 자체가 혼돈이다 보니 온갖 괴상한 게 튀어나와도 할 말이 없다.
가능하면 편하게 지나가고 싶다만…….
“그러기는 힘들겠지.”
-파아아앗
[93층, 판타데미아에 입장합니다.]
빛이 사라지며 나타난 습한 공간.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 드문드문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일반인이라면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나야 야간 시야가 있어서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동굴이군.”
이번에는 어디 바다나 사막 한가운데 떨어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지, 또 모르지. 해안 동굴이나 수중 동굴에 떨어진 걸 수도 있으니까.
뭐, 다행히 그런 건 아닌 거 같지만.
습하기는 하지만 짠 내나 비린내도 안 나고 혹시나 싶어 권능을 사용해 봤지만 해안 동굴이라는 말은 없었다.
일단은 나가자. 뒷면은 막혀서 길이 없다.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생각 정리도 좀 하고.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90층대에 들어오고 숭배자 놈들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마주칠 수밖에 없겠군.”
파무다라가 내게 준 퀘스트.
그것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숭배자인 뱀파이어를 만나야 했으니까.
들어 본 적도 없는 플레티넘 등급의 부하. 증명패에도 따로 적혀 있지 않다는 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놈들이거나 그 수가 극히 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놈의 밑에 있다는 건 평범한 골드 등급이 아니라는 뜻이고. 등급에 속아 방심해서는 안 된다.
“덕분에 그런 녀석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다행이야.”
퀘스트도 퀘스트지만 플래티넘 등급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놈을 잡아야 한다.
내가 위로 향하는 데 방해하는 가장 큰 적 중 하나가 숭배자 집단이었으니.
인벤토리에 넣어 둔 서류를 확인했다.
퀘스트 수행을 위해 내게 건네준 정보.
나를 쫓는 숭배자의 이름은 패트. 외형은 앳된 남성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건 상관없다. 권능으로 알아보면 그만이니까. 정보를 감추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뭐, 정보를 못 읽는 녀석들만 골라서 조사해 보면 되겠지.
내가 주목하는 건 한 가지.
‘나를 추격하고 있다.’
심지어 91층에서도 날 지켜봤다는 것이 파무다라의 정보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91층에서 패트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이 있었는지.
92층에도 잠깐 나타났었다는 거 같은데 중간에 사라져서 현재는 파악이 안 된다고.
“층을 따라오는 놈은 처음이군. 등반가라도 되나?”
숭배자 중에는 많지는 않아도 등반가가 있으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암만 생각해 봐도 등반가가 아니라 NPC 같다. 왜냐…….
“칼리버를 잡은 건 나밖에 없어.”
굳이 따지자면 92층을 클리어하는 데 있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다.
프렐다나 미야, 오드릭 무리 등등.
그중에 패트라는 이름은 없었다. 공헌도를 나눠 가져 층을 클리어했을 리도 없다는 것.
파무다라도 말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층을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놈이라는 거야.’
놀랍지는 않다. NPC의 활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항상 그런 건 아니니까.
특별한 이벤트를 통해 다른 층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화조국에서 운용하는 상인들이나 릴카도 층을 오가며 활동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드물기는 해도 아예 없지는 않다는 것.
이런 놈들이 더 있으면 곤란하겠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다는 거니까. 91층과 92층에 안전장치를 마련해 둔 건 잘한 선택이었다.
“고민은 여기까지만 하자. 일단은 NPC라고 생각하고 움직여야지.”
“그에에.”
모르는 걸 물고 늘어져 봤자 헛짓거리만 하지.
오랫동안 지구와 탑에서의 생활을 이어 가면서 얻은 교훈이다.
생각을 이어 가면서도 발걸음을 옮긴 덕분일까, 슬슬 끝에 다다랐다.
조금씩 좁아지는 통로. 그 틈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공간이 좁아서 바닥을 기어서 나가는 것도 힘들 거 같고. 빛이 들어온다는 건 밖이랑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니.
“힘차고 신나게 부수고 나가면 되겠네.”
-콰아아앙!
발을 번쩍 들어 그대로 벽을 걷어찼다.
굉음과 함께 뻥 뚫리는 동굴. 소음이 메아리처럼 퍼지고 돌파편이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가운데.
“우오오오오오!”
“마왕님이 강림하셨다!”
“기나긴 봉인 끝에 다시금 세상에서 나타났도다!”
“오오, 세상 끝의 주인이시여.”
동굴 밖에서 괴성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있는 곳은 절벽 가운데 위치한 동굴.
그 아래 모여 있는 수많은 괴물과 괴수들.
“…뭐야 이건.”
영문을 몰라 눈을 꿈뻑이는 그때.
[판타데미아(RPG)에서의 역할이 지정됩니다!]
[당신의 역할은 마왕]
[최종 보스입니다!]
화려한 이팩트와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머리 위로 떠오른 붉은색 글씨.
거기에는 마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니까 이번 층의 이름인 판타데미아라는 건.
“게임 이름이었냐!”
머리를 붙잡으며 소리 질렀다.
확실하다. 이번 층의 주인, 분명히 등반가다.
* * *
마왕성. 정돈된 공간에 펼쳐진 커다란 테이블과 높이 쌓인 서류 더미.
은은하게 켜진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펜을 움직이는 소리만 이어진다.
고요한 공간에 반복적인 소음.
그 자체로 평안한 느낌이 반복되는 곳이었으나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압박감이 느껴진다.
-똑똑
“가르티 님, 안으로 들어갈게요.”
가벼운 노크와 함께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온다.
반바지에 멜빵. 단발에 가까운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존재의 등장에 의자에 앉아 일에 집중하고 있던 고블린이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양팔을 벌린다.
“와우. 여기서 일하는 것도 어울리네요. 동굴보다 낫지 않아요?”
“준비된 대로 됐느냐. 차질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럼요. 다 했죠. 뭘 또 그렇게 바로 일 이야기만 하세요.”
“누누이 말하지만 그분이 지켜보는 자다.”
숭배자 패트에게 잔소리를 하는 플래티넘 등급의 숭배자 가르티.
문을 닫고 온 패트가 의자에 턱 하니 앉는다.
“칭찬 좀 해 줘요. 이번에 이쪽으로 떨어질 수 있도록 세팅하느라 고생만 엄청 했는데.”
“잘했구나.”
“히히. 그쵸? 잘했죠? 잘한다니까요.”
90층대는 같은 층이 여러 개 존재하는 곳.
위로 올라갈수록 그 수가 줄어들어 결국에는 하나의 층에 도달하게 되지만 93층은 초입이었다.
얼마든지 이곳이 아닌 다른 93층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던 것.
그럼에도 한 가지 규칙이 있었으니.
“다른 쪽은 아직 준비가 덜 됐더라고요. 이미 시작한 곳도 있고. 바로 탐방하고 왔죠.”
그건 새로운 등반가가 올라왔을 때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진다는 거였다.
91층에서 진행되었던 마피아 게임. 게임이 시작된 후 다른 등반가가 91층으로 올라올 경우, 마피아 게임이 진행 중인 층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다는 뜻.
92층에서 조현수를 염탐하고 있던 패트가 중간에 사라진 이유 또한 다른 93층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가르티 님도 조금은 쉬어도 되지 않아요? 그것도 직업병이에요.”
낄낄 웃던 패트가 창가로 향했다.
세상의 끝에 세워진 마왕성. 그 안을 돌아다니는 온갖 괴물들.
시커먼 먹구름이 깔려 햇빛조차 희미한 곳 너머에는 높은 산맥이 보였다.
그 너머를 바라보듯 지그시 산을 응시하던 패트가 고개를 돌렸다.
“마왕 역할에 질릴 때도 됐잖아요?”
마왕성 인근에 있는 절벽. 그 안에 위치한 동굴.
93층 판타데미아의 마왕이 봉인된 장소였고, 오랫동안 그 역할을 수행해 온 것 인물은 가르티였다.
홀로 동굴에 처박혀 앞으로 다가올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는 것.
그리고 끝내 영웅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
그게 가르티의 역할이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패트가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고.
마왕.
불가사의不可思議의 가르티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홀가분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