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3화 92층 클리어
난 잠시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칼리버를 잡은 것까지는 좋다. 마력을 좀 쓰기는 했지만 아직은 여유가 좀 있었으니까.
영 뭐하면 신성력이나 마기를 쓰는 것도 방법이고. 아직 펠라인 스킬도 남아 있다.
궁지에 몰리더라도 반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파무다라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 또한 예상한 바.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흘러갔다.
그런데…….
‘왜 기사단이 같이 온 거지?’
단순히 생각하면 기사단이 이곳에 오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차음막을 쓰기는 했지만 건물이 무너지는 것까지 가리지는 못하니까.
미야가 이쪽으로 오면서 조명탄을 쐈으니 눈이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예상하기는 쉽겠지.
이 또한 원했던 모습이다. 기사단이 오기 전에 파무다라가 먼저 급하게 오고, 그럼 인질을 앞세워 유리한 위치에서 거래를 하려고 했으니까.
다만 파무다라와 기사단이 사이좋게 등장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슬쩍 프렐다를 바라봤지만 별로 아는 눈치는 아니었고 그저 기사단을 상대로 침을 삼키며 긴장하고 있었다.
미야야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반트 성 출신이 아니니까. 기사도 여기 와서 처음 봤을 거다.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군, 이블아이.”
“모습을 보니 잘 지내는 거 같네.”
전에 쉬네파를 잡을 때 봤던 모습이랑 똑같다. 어디 숨어 있을 줄 알았더니만 얼굴에 윤기가 도는 게 잘 먹고 잘사는 모양.
“…둘이 구면이야?”
“잠깐 봤었어. 쉬네파 처리할 때.”
“저 사람은 조심해야 돼, 정말로. 직접 싸우는 걸 본 사람은 없지만 다른 거물들도 한발 양보하는 괴물이야.”
안 그래도 긴장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변수와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대략 지금까지 잡은 뱀파이어들을 다 합친 정도로 강하지 않을까 싶을 뿐이었다.
-척. 철그렁.
파무다라와 함께 온 기사들이 포위하듯 우리를 감싼다.
정면에 선 건 파무다라와 부하처럼 보이는 기사.
다른 이들과 달리 투구에 붉은 깃을 달았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정식으로 서임을 받은 기사인 거 같은데.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곧장 권능을 사용해 놈의 정체를 알아봤다.
[뮤아 가올]
-92층의 NPC.
-반트 성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입니다.
-파무다라의 심복 중 하나.
-뱀파이어입니다.
“하.”
정보를 읽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알겠다.
어째서 파무다라가 세력을 일구지 않는지. 외성에서의 활동이 거의 없는지.
쉬네파와 자할의 피 장사에서 큰 손으로 있을 수 있는 자금이 어디서 나온 건지.
어째서 칼리버가 날뛰는데 기사단이 외성 일에 간섭하지 않는지까지.
‘힌트는 있었다.’
놈의 행동거지. 여러 상황.
오드릭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보고 배반자 출신 기사인 건 아니냐고.
당시에는 오해하게 놔두었는데 눈앞에 진짜 그런 놈들이 있다.
저 부기사단장과.
“기사단장이었군.”
홀로 정장을 입은 채 서 있는 파무다라.
녀석이 웃었다.
“나를 불러낸 건 네가 처음이군.”
“전혀 기쁘지 않은걸.”
쉬네파와 자할이 녀석을 건들지 않은 이유는 단순히 무력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기사단이 두려웠던 거지. 뱀파이어가 뭐 하러 피를 사 먹나 했네.
명색이 기사인 그가 주민들을 공격할 수는 없다 이거겠지.
-카득.
기절한 칼리버의 목을 부여잡은 채 검에 힘을 줬다. 칼날에 닿은 검을 타고 피가 흘러내린다.
의식이 없을 때는 피의 구속력이 약해지는 모양. 잘됐다. 상황 잘못되면 그대로 목을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내 동생은 피 흘리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데.”
“걱정 마. 뭐라 말 못 하게 목을 예쁘게 따 줄 테니까. 검 솜씨는 자신 있거든.”
“싸울 생각인가?”
“필요하다면.”
상황 자체는 좋지 않다.
프렐다는 전투 불능. 미야는 괜찮은 거 같지만 뱀파이어의 천적이나 다를바 없는 기사들을 상대로 얼마나 잘해 줄지는 모르겠다.
남은 건 나랑 덕춘이뿐.
기사단은 내 편이 아니다.
파무다라와 그의 부하 몇몇만 기사단에서 활동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저렇게 당당히 칼리버가 자신의 동생임을 밝히는 걸 보면 기사단은 이미 완전히 장악됐다고 봐야 했다.
“칼리버의 신변을 기사단에 넘겨라.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쪽도 곤란하겠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일을 돕기 위해 온 것이니까 말이야.”
대외적인 명분은 자신에게 있다는 뜻이다.
협조하기로 했던 괴물 사냥꾼이 칼리버를 확보했음에도 전달하지 않고 기사단과 싸우다.
모르는 사람들이 봤으면 내가 나쁜 놈이고 내 목에 현상금을 달아도 이상할 게 없다.
등반가인 나나 NPC인 녀석은 진실을 알지만 다른 중립 NPC들은?
“재밌는 희극이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기서 혈전을 벌인다면 살아남을 확률은 어떻게 되는가.
뒤에 있는 프렐다와 미야의 안전은 장담하지 못한다.
다 떠나서 나한테 현상금이 붙고 추적이 들어오면 이번 층에서 활동하는 건 쉽지 않다.
반트 성은 파무다라의 홈그라운드.
한 층의 지배자가 어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으나.
“한 번 죽는 것 정도야 쉽지.”
정말로.
다른 이들에게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놈이 강경하게 나오겠다면 나 또한 그에 준하는 스탠스를 취한다.
내 목숨을 가져가려면 본인 목숨은 아니더라도 친동생 목숨 정도는 내줘야지.
“일이 터지면 너희는 최대한 멀리 빠져나가. 내가 어떻게든 붙잡아 둘 테니까.”
“너는 어떻게 하려고?”
“가, 갈 거면 같이 가요!”
그걸 못 하니까 하는 말이다.
둘이 도망칠 수 있도록 발을 묶어 두는 것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게릴라전을 펼친다면 반트 성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할 거다.
내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녀석이라는 걸 파무다라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짝. 짝.
고조되는 긴장감 속, 파무다라가 손뼉을 쳤다.
뭐 하자는 건가 싶어 바라보니 양손을 들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난 싸우려고 온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믿지?”
“단순히 등반가를 억누를 거였다면 쉬네파를 만났을 때 처리했겠지.”
틀린 말은 아니다. 녀석에게 기회는 충분히 있었을 테니까.
대폭발 사건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는 건 모종의 이유가 있을 터.
“물론 네가 가치가 없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기대를 하고 있어. 쉬네파와 자할이라는 소중한 자원을 포기하더라도 베팅하고 싶을 정도로.”
기대?
뜬금없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애매한 부분이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녀석은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거다.
예상컨대 놈이 원하는 건.
‘등반가만 할 수 있는 거야.’
92층에 한해서라면 못 할 게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쉬네파와 싸웠을 때도 가만히 지켜봤던 이유는…….
“날 가늠해보고 있었군. 더 위로 올라갈 수 있을지 없을지.”
“눈치가 빨라. 맞아, 난 위로 올라갈 사람이 필요해. 그래서 말인데…….”
-띠링.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잠시 대화 좀 나누지 않겠나.”
정말 오랜만에 보는 퀘스트창이었다.
* * *
반트 성의 내성.
사실상 귀족이나 영주의 가솔들만 거주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기사들은 예외였다.
그들의 목숨과 재산을 지켜 줘야 하는 소중한 전력이었으니까.
괴물 사냥꾼도 내성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해당 시대를 뛰어넘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베가 파티도 외성에 있고.
가만 생각해 보면 나도 내성에 진입한 적은 없었다.
지금까지만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몰랐군. 내성에 들어오는 데 제한이 있었다니.”
“일종의 눈가림이지. 시스템이라고 모든 것을 해 주지는 않거든. 지배자의 요구에도 제한이 있으니까.”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높은 벽으로 둘러쌓인 내성. 그 안에 가득 들어선 건물들과 사람들.
얼핏 보면 번화하고 생동감 있는 공간이었지만 유심히 들여다 보면 달랐다.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어.’
웃고 떠들고 걷고 인사하고. 그 패턴마다 시간이 길다뿐이지 했던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묘하게 소름 끼치는 광경에 권능을 사용한 결과.
[A110]
-92층 내성에 배치된 NPC형 장식
[D113_1]
-92층 내성에 배치된 NPC형 장식
중립 NPC도 아닌 장식이라는 설명만 나와 있었다.
그저 그럴싸하게 꾸며 두었을 뿐 이들은 사람이 아니다.
성의 주인인 영주 또한 장식에 불과할 뿐, 내성에서 자아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멸망한 세계의 파편을 가져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이런 곳이 많지는 않을 거라는 뜻인가.”
“아마도. 더 위에 있는 곳은 어떨지 알 방법이 없어서 말이지.”
탑 안에 세계의 일부가 들어오는 경우는 많았다.
당장 정령계나 연옥계와 같은 곳도 있었고, 다른 세계관을 가진 층도 여럿 있었으니까.
차이가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시스템의 기준에서 필요해 만들어진 것.
이곳은 지배자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시스템 외의 간섭으로 만들어진 곳은 내 기억에는 한 곳밖에 없다.
‘프램버그.’
혼돈의 파편과 거래를 통해 숨겨진 공간에 마련된 지하도시.
멸망한 세계의 파편을 가져왔다는 건 그런 뜻이었다.
“그래서 결정이 됐나. 장난질을 치지 않았는데.”
“그건 나도 봐서 알지.”
파무다라가 내게 준 퀘스트.
[피의 주인- 히든 퀘스트]
-피의 광기를 앓고 있는 뱀파이어, 칼리버.
-변이가 끝나기 전에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처음 자신을 문 뱀파이어의 피를 마시는 것이죠.
-칼리버를 문 뱀파이어의 피를 구해오세요!
-보상: 칭호, 혈문개방血門開放, 혈술血術, 92층의 지배자 자격
다름 아닌 칼리버의 변이를 막기 위해 녀석을 문 뱀파이어의 피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놀랍군. 완전히 뱀파이어가 된 줄 알았는데.”
“직전이지. 내 피를 주입하고 온갖 수단을 써도 완전히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여기서 살짝 의문.
“그냥 뱀파이어가 돼도 괜찮지 않아? 너도 뱀파이어잖아.”
본인도 뱀파이어인데 왜 동생의 변이를 막으려는 걸까.
“동생의 모습을 봤겠지. 칼리버는 변이에 실패하고 죽을 거야. 모든 객체가 변이에 성공하지는 않거든. 동생을 문 녀석이 고약한 짓을 해 두기도 했고.”
등에 불룩 올라온 피 주머니. 괴상하게 비틀린 몸통.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냥 신체 변화가 과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변이에 실패하고 있었던 거였군.
그것도 칼리버를 문 녀석이 악의를 가지고 작업을 쳐서 말이다.
“그럼 미야를 문 것도?”
“뭐라도 해 보려 했던 거다. 베가 파티의 초대를 받은 이들은 자질이 뛰어나니까. 그리 좋은 일을 한 건 아니지.”
“동생과 같은 상황을 만들려고 했던 거군. 변이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을 테니.”
“부정하지 않겠다.”
작게 눈을 찌푸린 녀석이 턱을 쓸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그 또한 자신의 동생이 당한 것과 동일한 짓을 미야한테 저지른 것이었으니까.
그건 됐다. 그 부분은 해결되었으니까.
내성으로 초대받은 건 나를 포함한 프렐다와 미야.
나와 우호적인 대화를 하고 싶다는 표현으로 미야에게 자신의 피를 먹였다. 그걸로 변이는 끝. 한동안 요양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거다.
부작용인지 뭔지 뱀파이어의 특성 일부를 가지게 되기는 할 테지만 말이다. 유독 뾰족한 송곳니라던가 일반인보다 몸이 튼튼하다던가.
프렐다에게는 제한적이지만 기사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 쉬네파와 자할을 대신할 새로운 NPC가 배치될 터. 그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이제 남은 건 녀석과 나의 거래.
다리를 꼬며 커피를 홀짝였다. 놀랍게도 여기에는 커피가 있었다. 내성에서만 공급이 되는 모양이지만.
인스턴트가 아닌 커피를 마시자 카페인이 돌며 은은하게 심장 박동이 커진다.
‘회사 다닐 때 생각나네.’
그땐 모닝커피가 일상이었는데.
잠시 맛을 음미하고 고민했다.
반트 성이란 환경 모두 동생인 칼리버를 위한 것이었다. 파무다라의 제안은 진심이다.
보상도 좋다. 칭호에 능력, 92층의 지배자 권한까지.
파격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조건이다만…….
“어떤 놈이지?”
이만한 조건을 내걸었다는 건 반대로 클리어하기가 극히 까다롭다는 뜻이기도 했다.
타깃이 있는 위치도 모르겠고. 90층대는 같은 층이어도 공간이 여러 개로 나뉜다.
당장 92층만 해도 내가 있는 곳은 반트 성이지만 다른 이들은 다른 세계관에 있다는 것.
“조사는 이미 끝났다. 흐음, 어쩌면 네게도 좋은 일일지 모르겠군. 결국에는 마주치게 될 테니.”
그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넨다.
안에 들어 있는 건 몇 장 되지 않는 정보들.
난 찬찬히 내용을 살폈고.
“퀘스트를 수락하지.”
“잘 부탁하마.”
파무다라와 악수를 나누었다.
[92층의 지배자 파무다라가 당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92층 클리어!]
그와 함께 울리는 클리어 메시지.
반가운 소리였지만 내 정신은 딴 데 가 있었다.
봉투에 적힌 한 명의 NPC의 특징과 초상화.
가장 밑 줄에 적힌 정보.
‘플레티넘 등급을 따르는 녀석이라.’
놈들이 가지고 다니는 증명패에도 없는 등급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