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화 왜 같이 왔어
수직으로 그어진 검. 자할의 피의 갑주에서 불똥이 튀는 것도 잠시.
-콰드드드득!
-찌이이익!
물리적인 타격과 영혼의 타격을 동시하는 공격에 놈의 갑주가 부서졌고.
촤아아아악!
녀석이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반트 성의 암흑가를 지배했던 자치고는 허무한 최후.
그동안 빨아 먹은 피가 많았는지 저 덩치에서 나오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피가 끊임없이 나왔다.
“확실히 처리한 거 같기는 한데.”
왠지 모를 찝찝함이 남았다.
프렐다가 녀석을 상대하면서 힘을 많이 빼두기는 했지만 이렇게 쉽게 죽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오히려 폭발에 내성이 있는 쉬네파가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자할은 쉬네파보다 더 강하다는 게 객관적인 판단이었고.
조직의 규모가 있다고는 하지만 쉬네파는 자신보다 강한 부하를 데리고 있었다. 그런 조직을 상대로 경쟁해온 게 자할이고.
“방심하면 안 돼!”
뒤에서 프렐다의 외침이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꾸물꾸물
바닥에 쏟아졌던 피가 일렁이더니 합쳐지기 시작했다.
변신.
안개나 벌레, 박쥐 따위로 모습을 바꾸는 뱀파이어의 특유의 능력.
이 녀석은 피였던 건가.
“상관은 없지.”
영혼 찢기에 당했기 때문인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지 못하는 게 사실상 게임 아웃이다.
영물도 아니고 혼돈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 영혼의 타격을 회복하기는 힘들 터.
그렇다면.
[파이어 밤(SSS) Lv.6]
-콰아아아아앙!
이깟 핏물쯤 열기로 태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놈을 향해 폭발을 연달아 일으켰다. 피가 꿈틀거리며 알 수 없는 저주와 독을 뿌려 댔지만.
[정신 보호(SSS) Lv.MAX]
[독 내성(SSS) Lv.2]
[저주 내성(SSS) Lv.1]
적어도 내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내성 스킬로는 어디 가서 꿇리지 않으니까.
조금 귀찮은 정도?
녀석이 부리던 부하들도 피로 이상한 효과를 내기에 혹시나 했는데, 이 녀석은 피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쪽인 모양이었다.
-치이이이이익
그 능력으로는 상황을 반전시킬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무리 뱀파이어의 특수한 피라고 하더라도 액체는 액체. 고온을 내뿜는 파이어 밤에 증발하는 건 시간문제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끝났네.”
“자할이 이렇게…….”
놈과 악연이 있는 프렐다가 작게 중얼거린다.
이걸로 뱀파이어의 3개 세력 중 2개가 날아갔다. 여전히 주인을 잃은 놈들은 성 곳곳을 돌아다니겠지만 그거야 기사단이 알아서 할 문제.
지금 하는 것으로 봐서는 잘 처리해 줄 듯싶다.
“마음 같아서는 쉬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할 거 같다.”
난 저 멀리 하늘로 올라오는 빛을 바라봤다.
폭죽처럼 솟아올라 밝은 빛을 내뿜으며 천천히 낙하하는 조명탄.
이 시대에는 아직 없는 물건이었으니 저걸 사용한 사람은 한 명. 미야뿐이다.
프렐다와 시선을 맞추자 고개를 끄덕인다.
자할을 처치했고 칼리버를 발견했다. 다음 작전으로 넘어갈 타이밍이다.
“터트린다.”
-푸슉
프렐다가 지키고 있던 수혈팩 일부를 터트렸다.
바닥에 뿌려지는 사람의 피. 나는 잘 모르겠지만 뱀파이어는 사람의 피와 뱀파이어의 피를 구분해서 맡는다고 했다.
피에 미쳐 있는 칼리버라면 냄새를 맡겠지. 차음막으로는 소리는 막지만 냄새를 막을 수 없으니까.
살짝 걸리는 건 기사단 쪽.
‘놈들도 냄새로 뱀파이어로 구분한다 했어.’
어쩌면 사람의 피 냄새도 알아차릴지 모르겠다. 아니면 별 차이 못 느끼거나. 이건 프렐다도 확실치 않다고 했다.
혹시 몰라 기사단을 다른 쪽으로 보내 놨으니 그 전에 상황을 종료시키는 게 좋겠지.
아무튼.
“온다.”
난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미야 또한 반쯤은 뱀파이어. 프렐다의 교육을 받으며 능력을 키운 만큼 피 냄새를 맡고 제대로 찾아오는 모양.
그 증거로.
“이아아아아악! 사람 살려!”
골목을 돌아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비명을 내지른다.
그도 그럴 것이.
“피를, 내놔!”
미야의 뒤로 칼리버가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었으니까.
망토가 펄럭이며 안이 보인다. 등 쪽이 볼록하기에 가방 같은 것을 메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저건.
“진짜 모기 새끼가 여기 있었네.”
흉측하게 부풀어 오른 피 주머니었다.
풍선처럼 늘어난 가죽 안으로 검붉은 피가 가득 차이 있었으니, 피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심한지 알 만했다.
신체를 변형시키면서까지 피를 탐하다니. 저게 녀석의 능력일까.
“톡 터트리고 싶네.”
“칼리버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어. 경계는 해야 할 거야.”
프렐다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평범한 놈은 아니었다.
피지컬만 따지면 고위 뱀파이어 이상인 미야가 전력으로 뛰고 있는데도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예상컨대 신체 능력으로는 자할보다도 높다.
그거야 어느 정도 받아치면 되니 괜찮은데 녀석이 능력이 뭔지가 불명확하다.
일단 공간 도약.
-슈슉!
-슉!
미야가 공간 도약을 쓰자마자 놈도 공간 도약을 한다.
저것만 해도 꽤 까다롭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미 자할 무리와 싸우면서 건물이 무너졌다.
저번처럼 자택 안으로 숨어들어 달아나는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는 말.
-콰아앙!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미야의 옆을 스치듯 나아가며 검을 뻗었다. 놈 또한 큼지막한 손을 휘둘렀고.
카앙!
맨손으로 쳤다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른 놈들처럼 피의 갑주를 쓴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 증거로 놈의 살가죽이 찢겨 있었으니까. 다만 기이하게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은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녀석, 혈관으로 막은 거군.’
피에 대한 집착, 구속력, 그것이 한데 모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피를 절대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체내에서 피를 빼내 싸우던 녀석들과는 결부터가 다르다.
-빠아아아악!
재차 휘두르는 팔에 맞고 뒤로 쭉 밀려났다.
검을 들어 막기는 했지만 힘이 어찌나 강한지 한참을 날아가서야 멈춘다.
괴수.
내가 받은 느낌은 그거였다.
격돌하며 놈이 온몸에 두르고 있는 옷이 찢어졌다. 드러나는 맨살. 그 위로 뿌리처럼 뻗어 있는 굵고 얇은 혈관들.
미야가 변이할 때 혈관이 부풀어 오르던 것과 흡사했지만 훨씬 정도가 심하다. 상식을 벗어난 괴력을 보이는 것도 관련이 있을 거고.
아마 눈에 띄는 외형 때문에 장갑에 망토까지 두르고 있던 거겠지.
“신체 몰빵형인가.”
우드득.
땅에 박힌 발을 뽑자 돌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검도 안 박히는 몸뚱이라. 외부에서 들어오는 공격에는 강력한 내성이 있다.
그나마 통할 거 같은 건 전격을 사용하는 일레트릭 쇼크나 관통력이 좋은 오로라 빔. 영혼에 타격을 입히는 영혼 찢기 정도일 거 같은데.
무식하게 파이어 밤이나 기타 다른 스킬들을 쏟아붓는 것도 방법이긴 하다.
놈만 상대할 거면 그게 맞지.
‘저 녀석 찾으러 파무다라가 올 거라 문제지.’
다음 싸움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
사실 칼리버만 잡으면 끝나기는 할 거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조건이 만족될 거니까.
내가 신경 쓰이는 건 파무다라.
쉬네파와 헤럴드 자할이 죽었다. 저놈은 그냥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괴물이고.
그렇다면 92층의 지배자는 누구인가.
“암만 봐도 파무다라가 지배자란 말이지.”
뱀파이어도 어쩌지 못하는 베가 파티? 직접적인 개입을 조심스러워하는 반트 성의 영주?
아니다, 다 아니다.
이곳은 먹이사슬이 잘 꾸며진 뱀파이어들의 무대였으니 그 주인 또한 뱀파이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했다.
소거법에 의해 남은 건 파무다라.
92층의 규칙을 정한 장본인. 과연 녀석이 동생을 죽인 사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걸 구경만 할까?
절대 안 그럴 거 같은데.
그러니 협상을 할 생각이다. 놈이 오기 전에 칼리버를 잡아서 말이지.
여기까지가 플랜A.
만약 계획한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때는 플랜B로 가는 거야.’
더러워서라도 보내버리 게 만들 생각이다.
이건 상황에 따라 결정하기로 하고.
“덕춘아, 망구야. 아직 할 만하지?”
“그에에.”
“끼아아아!”
사실상 전투가 힘든 프렐다에게 미야를 맡기고 칼리버를 향해 달렸다.
내가 저놈을 잡는 동안 둘을 기사들에게 보낼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건 안 된다.
이쪽으로 올 파무다라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죽을 게 뻔하니까.
‘조명탄으로 충분해.’
미야가 쏘아 올린 조명탄을 보고 의아함을 느낀 누군가가 올 거다.
그게 경비대일지 특임대일지 기사단일지는 모르겠지만 파무다라도 조급해질 거다.
-콰지지직!
검을 내리꽂았다. 영혼 찢기가 담긴 일격.
과연 영혼에 타격을 주는 만큼 놈 또한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크하아악!”
괴성과 함께 팔을 휘젓는 녀석.
조금 굼떠지기는 했지만 팔이 움직인다. 이유는 하나.
[혼돈이 ‘영혼 찢기(S)’에 저항합니다!]
미친놈처럼 굴길래 혹시나 하기는 했지만 혼돈 수치가 제법 높은 모양.
다행히 혼돈의 파편 수준은 아닌 거 같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끼아아아악!”
망구가 창대를 이용해 놈을 끌어안는 사이.
“망구야, 내가 항상 고마워하는 거 알지!”
“끼아아악!”
[오로라 빔(S) Lv.MAX]
[오로라 빔(S) Lv.MAX]
[오로라 빔(S) Lv.MAX]
.
.
.
한 번에 오로라 빔을 쏟아부었다.
오색 찬란한 빛이 한 줄기 선이 되어 놈을 때린다.
몸이 튼튼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 관통력만큼은 내가 가진 스킬 중 가장 높은 게 오로라 빔이다.
딱 한 가지 걱정되는 건 놈의 공간 도약뿐.
[공간 도약(S) Lv.MAX]
“끼에에에에엑!”
아니나 다를까 능력을 사용해 빠져 나간다.
애꿎은 망구만 타격을 입고 사라진 상황.
“…다시 말하지만 늘 고맙다.”
“그에에.”
새삼 쓰레기 보는 눈으로 바라보는 덕춘이를 무시하고 발을 박찼다.
망구의 숭고한 희생 덕에 기회가 생겼다. 가장 경계되는 공간 도약을 사용했다.
‘놈도 저걸 무한정 쓸 수는 없어.’
여력이 되면 연속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거 같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왜냐 이미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미야를 잡기 위해 수차례 사용했으니까.
만약 계속 쓸 수 있었다면 여기까지 달려오지도 않았겠지. 내 공격도 다 피했을 거고 무엇보다…….
‘수혈팩 먼저 챙겼을 거야.’
놈이 가지고 있는 광기에 가까운 피의 갈망.
지금도 수혈팩을 흘낏거리며 침을 삼키고 있다.
“프렐다! 미야! 더 터트려!”
“아, 그렇군!”
“알겠어요!”
내 말뜻을 이해한 둘이 수혈팩을 밟아 터트린다.
나도 코를 찡그릴 정도로 퍼져 나가는 피 냄새. 순간적으로 칼리버의 눈이 돌아버렸고.
“잡았다.”
[달라붙기(S) Lv.MAX]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놈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크하아악! 놔라!”
“뭔 놈의 힘이!”
후각을 자극하는 혈향에 놈이 온몸을 비튼다. 가뜩이나 물컹한 피 주머니의 촉감에 기분이 더러운데 날뛰기까지 하니 더 곤욕스럽다.
피지컬도 탈모맨과 비견할 정도라 꽉 잡은 팔이 절로 떨렸지만 붙잡기를 사용한 이상 물리적으로 벗어나기는 불가능.
“좀 가만히 있어!”
[일렉트릭 쇼크(SS) Lv.6]
-파지지지지지직!
“그그그그극!”
망설임 없이 전격을 쏟아 냈다.
전격에 대한 내성은 없는지 놈이 몸을 달달 떤다. 확실히 다른 공격에 비해 반응이 좋다.
그렇다면.
[일렉트릭 쇼크(SS) Lv.6]
[일렉트릭 쇼크(SS) Lv.6]
[일렉트릭 쇼크(SS) Lv.6]
.
.
.
“그냥 좀 쓰러지자아아악!”
“키햐아아아악!”
게거품을 물 때까지 써 주는 수밖에!
벼락이 치듯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자극받은 근육이 멋대로 수축해 버린다.
이제는 내가 풀고 싶어도 팔을 벌리기가 힘들다. 그나마 전격 내성이 있어서 버틸 만하기는 하지만 마력을 갈듯이 쏟아부으니 머리가 아찔해질 지경.
칼리버 또한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더니 그대로 머리를 떨군다.
‘이 자식 쇼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몰라 10분만 더 전격을 쏘아내려던 그때.
“거기까지 하지.”
내가 기다리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무다라.
92층의 지배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반트 성에 있는 뱀파이어들의 정점.
그런데.
‘쟤네는 왜 같이 있어.’
기사와 함께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