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하나의 답
기사를 두고 여러 말이 있다.
기사도를 가지고 있다느니, 엘리트 집안이라느니, 그냥 힘센 양아치 집단이나 광신도라는 말들.
이건 시대에 따라 세계관에 따라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주군. 무력. 명예.’
이 3가지 키워드는 어째서인지 대부분 가지고 있다.
그건 이곳도 마찬가지. 어떻게 보면 기사의 정체성과도 관련되어 있다 . 기사는 모시는 사람이 있으며,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력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명예는 조금 애매한데,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거기는 하지만 자신이 하는 행동을 포장하기 위해서도 사용됐고 진짜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정도 개인차가 있다는 것인데.
‘다른 건 몰라도 주군에 대한 명예는 지키지.’
앞서 말한 두 개의 키워드와 엮이는 단어였다.
그렇기에 이들을 움직이려면 개인의 명예가 아닌 따르고 있는 주군의 명예를 건드려야 한다.
-차캉
“영주님을 함부로 입에 담는 건 건방지군.”
물론 이런 식으로 반발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좋은 말을 하든 나쁜 말을 하든 일단은 반응이 격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잘못 수긍했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고 본인이 휩쓸리기 마련이니 더 그렇겠지.
다짜고짜 검을 뽑아 내게 겨누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공문을 봤습니다. 더 이상 반트 성에 혼란이 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이를 제압하고 반트 성의 영주민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이건 틀린 말이 아니다. 진짜로 저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기사 또한 공문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었는지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영주님의 뜻에 함께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따로 보수를 원하는 것도 아니죠. 그저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진심이다. 뭔가를 대가로 받을 생각은 없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뱀파이어를 쓸어버리고 칼리버를 잡아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었으니까.
우연하게도 영주와 이해관계가 맞는다. 영주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기사, 슈츠라이의 권능, 거짓을 마주하는 눈동자(S)가 당신의 진심을 엿봅니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거짓을 마주하는 눈동자를 마주 봅니다.]
어이쿠. 거짓말 탐지용 권능도 있네.
나도 하나 가지고 싶다. 탑이 유독 그런 걸지도 모르겠는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자고로 탑을 오르다 보면 인간불신이 패시브가 되는 법이었다.
보다 상위 권능인 별을 주시하는 눈이 마주한다면 저런 능력쯤은 무시할 수 있었지만.
-츠즈즈즈즈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SSS)이 잠시 눈을 감습니다.]
난 권능을 조절해 녀석이 내 진심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흐음. 잠시 침음성을 내는 녀석.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니군.”
“다시 말하지만 전 진실만을 말합니다.”
옆에 있던 빌러가 뭔 개소리지? 하는 눈빛을 보냈으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나중에 때려 줘야지.
“특급 괴물 사냥꾼이라…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신분 확인은 필요한 법. 도움이 된다 판단되면 기사단장님과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맞네. 이 녀석들 부하 1, 2, 3이었지.
진짜 선임 받은 기사는 2명뿐이다. 둘이서 기사단장, 부기사단장을 해 먹고 있는 모양.
상급자가 있으니 따로 보고를 올리는 건 당연했다.
과연 그들이 나를 끼워 줄까?
‘잘 모르겠는데.’
기사 나름의 프라이드가 있어서 영주의 명으로 파견 나왔다가 남의 도움을 받는다면 모양이 안 살 터.
상식이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현장 지원이니 뭐니 하면서 받아들이겠지만 세상에는 멀쩡한 놈만 있는 게 아니라서.
특히나 기사쯤 되면 자신감도 있고, 나름 뱀파이어에 대해 공부도 했겠다 지들끼리 해 먹을 가능성이 있었다.
방금 내가 명예니 뭐니 하면서 긁어 대기는 했지만 그게 꼭 나를 데리고 가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
계획이란 언제나 꼬일 수 있는 법. 그때를 대비해 플랜B, 플랜C도 준비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제 신분을 증명해 줄 이들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죠.”
“그러지. 너희는 이곳에 남아 목격자의 신변을 확보해라.”
“알겠습니다.”
조장의 명령에 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빌러에게 다가간다.
아무래도 빌러 한 명 때문에 일대를 지키고 있는 건 인력 낭비라 본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려는 모양.
이쪽은 빌러가 알아서 하도록 놔두고.
‘다른 애들은 준비 잘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나만 움직이고 있는 게 아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프렐다와 미야도 따로 작전을 진행 중이다.
사람 피를 안 마시는 만큼 기사들에게 걸릴 걱정은 없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어서.
특히나 프렐다의 경우 과거기는 하나 기사단과 마주쳤던 전적이 있다. 시간이 흐른 만큼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내 신분을 증명해 줄 사람은 오드릭 무리면 충분하다. 일단은 2급 괴물 사냥꾼이고 2급만 돼도 전문가로 인정해 준다.
여전히 통제되어 있는 골목. 난 인력 사무실 근처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미끼를 물면 좋겠다.’
자할이 어떻게 나오려나.
아직 그 녀석과는 엮인 적이 없어서. 그래도 큰 걱정은 없다. 놈은 프렐다가 잘 아니까.
권능도 말하지 않았던가.
프렐다가 자할을 궁지로 몰았었다고.
* * *
세상이 개판이 되고 계엄령이 떨어졌었다.
도로 한복판으로 전차가 돌아다니고 실탄이 든 총을 들고 다니는 군인들.
수시로 검문과 수색을 하는 이들 사이로 괜히 긴장하며 걸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중간에 대피소로 다들 모여서 말이지.
“모든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10시부터 오전 7시까지는 보행이 금지된다.”
“통금령이 떨어졌으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도록.”
“통금 시간 때 돌아다닐 경우 거동수상자로 간주할 것이며 어떠한 물리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자자. 빨리 움직여!”
기사단이 파견되고 가장 먼저 바뀐 것은 통금령의 실행.
기사들의 숫자가 적은 만큼 경비대와 특임대가 주축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온갖 사건이 일어남에도 밤에 나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돌아다녔고, 그 결과 지금까지도 칼리버의 습격이 이어졌다.
지금이야 칼리버만 잡겠다고 이러는 건 아니고 뱀파이어가 배후에 있다는 것이 밝혀진 만큼 괜한 상황에 일반인을 끌어들이지 않기 위함이 컸다.
일반인들이야 투덜거리면서도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니.
“나으리, 이러면 저희는 뭘 먹고 삽니까요!”
“직원들 월급은 줘야 할 거 아닙니까!”
“아니, 우리도 같이하겠다고! 사람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
“내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키고도 남는단 말이오!”
밤에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칼리버의 현상금을 노리고 온 현상금 사냥꾼들.
달리 말하면 양아치나 불법 영업자거나 돈 냄새를 맡고 기웃거리는 이들이었다.
하루아침에 봉변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니 억울하다면 억울할 수 있지만.
“직접 장사 접게 해 주기 전에 말 들어라.”
“영업 허가서는 어디에 있지? 불법 주류는 아니었으면 좋겠군. 양조는 영주님이 직접 관리하는 항목. 불법 양조 행위는 처형까지 가능하다.”
“자기 몸 하나는 지킨다? 그거 재밌군. 내가 확인해 보지.”
“정식으로 용병 길드에 등록하고 패를 가지고 있는 자는 허가해 주겠다. 단 최소 은패 이상이어야 한다.”
깐깐하게 확인을 하면서 실력 행사를 하기 시작하자 꼬투리 잡힐 것이 있는 자들은 슬금슬금 꼬리는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장사하지 못하는 것과 완전히 문을 닫는 건 다른 이야기였으니까.
현상금 사냥꾼들 중에서도 분위기만 흐리는 양아치들은 특임대 선에서 정리가 됐고.
밤에 돌아다닐 수 있는 건 검증된 인물뿐.
거기에 하나 더.
“괴물 사냥꾼은 통행을 허가한다. 적극적으로 협조해 준다니 고맙군.”
괴물 사냥꾼도 정식적으로 협력자로 채택이 됐다.
다행히 기사단장이라는 녀석이 꽉 막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신분을 증명하면서 어필을 많이 한 것도 있다.
뭐든 애매한 건 전문가가 나서야 하는 법이었다.
나도 밖으로 나왔고, 오드릭 무리도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이거 원. 손님이 아무도 없으니 괴물이라도 잡아야지.”
“형님, 그래도 살이 좀 빠진 거 같습니다?”
“매일 밤 반트 성 곳곳을 쏘다니는데 안 그러겠냐.”
통금령 때문에 인력거 손님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째 잠깐 신분 위장용으로 한 건데 프로 인력거꾼이 되어 있었다.
평소 일하지 않을 때는 술을 퍼먹던 녀석들인데 매일 뛰어 댕기더니 오히려 컨디션이 더 좋아졌다.
실전 감각도 여전했으면 좋겠는데. 안 그럼 죽을 수도 있어서.
콧김을 뿜으며 나름 들어간 배를 두드리는 오드릭을 보니 자신감은 있어 보여 좋았다.
차분히 긴장을 풀며 일대를 둘러봤다.
‘사실상 오늘부터가 제대로 작업에 들어가는 거라 봐야지.’
이전까지는 상황 파악을 위한 현장 검증과 목격자 확보, 상황 파악 위주였다면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기사들이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닐 거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녀석들은 물론이고, 수상하다고 판단된 곳이라면 건물 안까지 쳐들어갈 거라는 뜻.
더 이상 말로 해결을 볼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저는 단독으로 움직이죠. 아무래도 그쪽이 편해서.”
“허가하지. 단, 기사단장님과 부기사단장님께 보고를 올려야 한다.”
“기본 숙지 사항은 외워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괴물 사냥꾼이 중요 자원이기는 하지만 괴물을 잡는 것을 제외한다면 거친 용병들과 다르지 않다. 다루기 쉽지 않다는 뜻.
기사단도 그 사실을 알기에 어느 정도 체계를 잡아 놨다. 영주의 일을 돕는 거라는 명분도 있고.
고상하게 계속 이곳에 있고 싶으면 기본적인 규칙은 지키라는 걸 돌려 말한 거다.
나도 그다지 싫지는 않다. 정식 서임을 받은 기사도 한번 봐 보고 싶었던 터라.
‘얼마나 엉덩이가 무거운지 여태 안 보여.’
따로 준비한 거라도 있나.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정식으로 협력 관계를 가지면서 몇 가지 정보를 공유받을 수 있었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기사들이 준비한 게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궁. 궁. 궁. 궁.
진열을 정비한 경비대와 특임대가 움직인다.
이들은 정찰병. 뱀파이어를 몰고 갈 그물.
기사들은 각자의 위치에 대기한 채 투입할 타이밍을 기다린다. 일종의 타격대. 머릿수가 적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외에 따로 계약을 맺은 현상금 사냥꾼들이 골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무사히 빠져나왔으면 좋겠는데.”
나 역시 지붕을 박차며 이동했다.
내가 준비한 미끼는 두 명.
프렐다와 미야.
자할과 악연이 있는 자와 파무다라가 자신의 피까지 넘기며 뱀파이어로 만든 여인.
칼리버와 쉬네파의 잔당을 가지고 할 말이 많은 자할과 여전히 모습을 숨긴 채 방관하는 파무라다.
흩어져 있는 인연의 끈이 한곳에 모일 때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모든 것을 연결할 수 있는 대상은…….
‘역시나 칼리버.’
그렇게 판단했다. 자할을 자극하는 것 자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파무다라는 다르다.
쉬네파가 죽을 때까지 개입하지 않고 관망만 했던 녀석이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딱 하나, 동생만큼은 신경을 쓴다.
‘프렐다가 말했지. 쉬네파와 자할 모두 피 장사를 했고 파무다라 역시 큰 손님이었다고.’
과연 파무다라가 피를 구하기 힘들어서 그럴까?
동생인 칼리버와 관련이 있겠지. 피에 대한 갈망을 조절하지 못하는 반푼이를 진정시키려면 만족할 만큼의 피를 내줘야 할 테니.
쉬네파가 죽으면서 공급에 차질이 생겼다. 자할 또한 정신이 없었고 불만도 많다.
기사단이 깔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 칼리버는 참을 수 있는가. 파무다라는 어떤 선택지를 고를 것인가.
선택지는 많았으나 그건 허수일 뿐.
“결국에는 하나의 답만 남지.”
내가 준비한 단 하나의 답만.
지금쯤이면 프렐다가 자할의 수혈팩 창고를 털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