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88화 (588/740)

588화 영주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트 성에는 온갖 소문이 나돈다. 중세와 근대가 뒤섞인 세계인 만큼 산업적인 성장은 컸지만 놀거리는 그다지 발전하지 않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기울어져 갈 때까지 노동을 하고, 이후에는 다음 날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다반사.

유흥거리라고 해 봤자 술 도박 말고는 별로 할 게 없었고, 별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다 뒷골목에서 벌어진 세력 다툼이었다니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갔지. 자네도 들었을 거 아닌가. 천둥이 땅에서 하늘로 솟구쳤다니까? 하늘이 분노한 거야.”

“목격자가 있다잖아. 나도 집 옥상에서 멀찌감치 봤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있었어.”

“예전부터 재개발한다고 사람 한 명 없던 곳인데 말이 되나. 부랑자라면 몰라도.”

술집에 모여 저마다 떠드는 이들. 이곳에서 술집이란 일이 끝나면 모이는 장소기도 했다.

나 역시 그 사이에 껴서 맥주를 홀짝였다. 밖에 있을 때 마셨던 맥주랑 비교하면 묘하게 쌉쌀한 맛이 났는데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열심히 떠들고 다니는 모양이군.”

빌러와 조직원들은 이곳의 토박이. 꽤 오랫동안 조직을 운영했고 이래저래 반트 성의 주민들과도 깊게 엮여 있었다.

달리 말하면 이곳의 생태계와 인간관계, 어떤 소문이 빨리 퍼지는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는 이야기.

그 효과는 확실해서 내가 요구한 걸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쉬네파와 싸우며 발생한 거대한 폭발. 일명 대폭발 사건. 그것을 지켜본 목격자가 있다는 소문을 내고 다닌 것.

우선은 바람잡이가 나서고.

‘어느 정도 무르익고 기사들의 귀에도 들어갈 때쯤 빌러가 나서는 거지.’

간밤에 있었던 일을 봤노라고. 그곳에 암흑가를 양분하는 쉬네파와 자할이 있었으며, 사람이 보여 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고 기사들에게 증언하면 된다.

사실 위험한 일이기는 했다. 이러나저러나 하더라도 동네 양아치 집단에 가까운 조직이었고, 자할은 일대를 장악한 거대 조직이었으니까.

보복의 위험성이 있었으니 처음에는 꺼렸으나 내가 둘은 뱀파이어이며 쉬네파는 죽였다는 것을 말하자 조금은 풀어졌다.

옆에 있던 특급 괴물 사냥꾼인 프렐다의 증언도 있었거니와.

‘증인이 된 시점에서 기사의 보호를 받는다.’

이것도 중요했다. 아무리 기사들이 신분이 높고 많은 권한을 가졌지만 유일한 목격자를 함부로 방치하지는 않을 테니까.

거기에 내가 자할을 잡을 거라는 것까지 말하자 빌러도 함께하기로 했다.

작업을 친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시점.

“슬슬 올 때가 됐지.”

난 술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사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땀 냄새와 술 냄새가 뒤엉켜 퀴퀴한 실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지만 따로 행패를 부리지는 않았다.

대신.

“대폭발 사건의 목격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자세한 내용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라. 정보에 대한 대가는 확실히 지급하겠다.”

누가 딱딱한 기사 아니랄까 봐 오자마자 본론부터 꺼낸다.

저마다 눈치를 보는 이들. 기사가 대가를 내걸기는 했지만 일단은 신분 차이가 난다.

괜히 이상한 말을 했다가 얻어터지면 어디 가서 억울하다 말도 못 한다는 것.

그 상황이 짜증 난 기사가 빈 테이블에 돈주머니를 던진다.

느슨하게 묶어 둔 주머니에서 금화가 튀어나온다.

“흐음!”

“그, 금화 아닌가?”

“꿀꺽. 저게 얼마야.”

슬슬 눈치를 보던 이들 중 한 명이 나선다.

“크흠. 기사 나으리 제가 좀 들은 게 있습니다. 그, 간밤에 난리가 났지 않습니까. 집이 아주 떨어져 있지는 않아서 무슨 일인가 싶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본론만. 간략히.”

“어, 근처에는 웬 깡패들이랑 경비단이 몰려서 가지는 못했으니 목격자란 사람도 어디 옥상에서 지켜본 게 아닐까 싶은. 헤헤.”

-뻐억!

그 말을 끝으로 턱을 얻어맞은 사내가 바닥을 굴렀다.

주먹 좀 쓰나 보네. 펀치가 깔끔하다.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면 입을 다물도록.”

다시 찾아온 침묵. 돈 욕심이 나기는 했지만 지금 나섰다가는 방금 사내와 같은 꼴이 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다.

기사들도 큰 기대는 없었는지 작게 혀를 차고 있는 타이밍.

“제가 목격자를 압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 있는 금화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눈으로 날 노려보는 이들. 헛소리하기 전에 기선 제압을 하려는 거 같았지만 내게는 그저 센 척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거짓말을 했다가는 재미없을 거다.”

“전 진실만 말하죠.”

옆에서 덕춘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바라봤지만 눈치껏 울지는 않았다.

“제 소개를 하죠. 특급 괴물 사냥꾼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특급!”

“이거 보기 드문 인물을 만나는군.”

특급 괴물 사냥꾼이라는 말에 기사들의 눈이 빛난다.

대우를 못 받기는 하지만 기사단이나 용병을 제외하면 민간 무력 세력 중 가장 강한 게 괴물 사냥꾼.

특히나 괴물에 관해서는 전문가 취급을 받아 이상한 일에 휘말린 귀족들이 따로 찾아오기도 했다.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특급이면 기사들도 쉽게 건들 수 없는 강자.

‘물론 난 아니지만.’

따로 자격을 받은 게 아니라서. 그래도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게 베가 파티에서 언제든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허락을 받았으니 비슷한 느낌이랄까.

어쨌든 베가 파티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건 특급 괴물 사냥꾼부터니 얼추 비슷한 느낌이지. 암. 그렇고말고.

“증명할 수 있나?”

“괴물 사냥꾼은 따로 급을 증명하는 패가 있다고 들었는데.”

“저번 전투에서 잃어버려 패는 따로 없지만 제 신분을 증명해 줄 다른 괴물 사냥꾼들이 있습니다. 원한다면 베가 파티에 연락을 해도 좋고요.”

그냥 내뱉은 말이었지만 기사들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진짜 베가 파티에 연락하면 그때는 뭐, 그쪽에서 알아서 눈치껏 해 주길 바라는 거고. 공돌이들이라 잘 받아 줄지는 모르겠다만 주변에서 도와주겠지.

“일단은 믿도록 하지. 목격자에게 안내해라.”

“그러죠. 그런데…….”

슥, 술집에 모여 우리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좀 조용히 가야 할 거 같네요. 알고 있겠지만 이번 일에는 암흑가가 연결되어 있어서요. 저야 상관없지만 목격자는 보복이 들어오면 막을 방법이 없죠.”

“목격자가 진짜라면 이번 일이 수습될 동안 기사단이 직접 신변을 보호한다. 앞장서도록.”

본인 입으로 말했으니까 지키겠지.

기사단들이 칼집째로 검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물린다.

몇몇 겁을 상실한 놈들이 졸래졸래 쫓아왔지만 진짜 검을 뽑자 다들 달아난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신사적이네. 바로 팔다리 안 자른 거 보면.

아무튼.

빌러가 있는 건물로 들어가는 골목, 연락을 받은 기사들이 골목 곳곳을 통제하고 있었다.

인솔자의 얼굴을 본 이들이 옆으로 비켜섰고.

“여기입니다. 빌러! 들어간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블아, 엇. 기사님들이 여기는 어떻게.”

세차게 흔들리는 동공.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잡다한 물건들로 들어찬 테이블과 뭔가를 하는 부하들.

‘연기 잘하네.’

미리 언질을 줬기에 놀랄 일이 없을 텐데도 누가 보면 진짜 놀라는 줄 알겠다.

빌러의 부하들이 자동으로 벽에 서고 기사 둘이 문을 지킨다.

상급자로 보이는 기사가 빌러 앞에 마주 섰고.

“그쪽이 대폭발 사건의 목격자인가.”

“그, 그렇기는 한데. 설마!”

냉큼 나를 째려보는 녀석.

“기사님들이 수사를 하고 있는데 협조를 안 할 수가 있어야지.”

양손을 흔들며 어깨를 으쓱였다.

분한 표정을 지은 빌러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기사에게 의자를 권한다.

물론 앉지는 않았다. 기사가 앉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선 채로 빌러가 입을 열었다.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는 합니다만 그리 자세히 본 건 아닌지라.”

“그곳에 있었는데 자세히 모르기는. 겸손이 심하네.”

“숨기는 것 없이 아는 모든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짜고 치는 대사를 읊자 기사가 은근히 검을 매만지며 재촉한다.

오케이. 이 정도면 흥미는 충분히 끌었고.

“후우.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말했다는 것은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같이 별거 없는 사람은 그날로 목이 달아납니다. 무려…….”

꿀꺽 침을 삼킨 빌러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자할과 쉬네파가 엮인 일이니까요.”

두 이름에 기사의 표정이 굳는다. 대략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 실제로 듣는 건 다른 거니까.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기사단 역시 뱀파이어와 전쟁을 벌인 전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할의 이름을 들어 봤을 거다.

쉬네파야 그 당시에는 세력이 크지 않았으니까 모를 수도 있지만.

‘이후에 따로 조사를 했을 테니 알고는 있겠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는지 기사도 큰 반응은 없었다. 빌러가 다음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쉬네파가 죽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싸움이었어요. 피가 폭발하고 손톱이 자라고. 뱀파이어였습니다.”

“어디 가서 뱀파이어라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 그럼요! 기사님들 앞이니 하는 말입니다. 아는 대로 전부 말해야 하니까요.”

“왜 그 시간에 현장에 있었지?”

“이걸 말하기는 좀 그런데. 제가 골목에서 일을 좀 합니다. 상인들도 지켜 주고 대가로 소소한 금전도 주고받는. 흠흠, 아무튼 저희처럼 작은 조직은 이래저래 휩쓸리기 마련이라 덩치 큰 조직이 움직이면 잽싸게 어떤 일인지 알아야 하거든요.”

“염탐을 했다는 거군.”

“그래야 이 짓도 해 먹고 사니까요.”

이후 줄줄이 나와 맞춰 두었던 말을 꺼내는 녀석.

혹여나 대사를 까먹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암기력 하나는 좋은 녀석이었다.

추가적인 질문이 오가고 대략 2시간 정도 지났을 때 기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 고맙군. 일이 끝날 때까지 안전은 보장해 주지. 단, 그때까지 계속 도움을 줘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기사가 내미는 돈주머니를 챙긴 빌러가 밝게 웃는다.

요즘 재정이 안 좋다더니 좋아 죽는구만.

괜히 한 대 때려 주고 싶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내가 원했던 건 다 해 줬다.

남은 건.

“기사님.”

“음?”

“이번 일을 수습하는 데 사람 손이 좀 필요할 거 같은데요.”

자연스럽게 기사들과 어울려 놈을 치는 것뿐.

“아무래도 이쪽은 괴물 사냥꾼들이 전문가이지 않습니까. 외성에 대한 것들도 그렇고요.”

“함께하겠다는 건가, 원하는 건?”

“다른 건 없습니다. 이참에 외성에 숨어 피 빨아 먹는 녀석들을 청소하고 싶어서요. 괴물 사냥꾼이 뭘 하겠습니까. 괴물을 잡아야죠.”

이렇게 저렇게 돌아가고는 있었지만 내 목표는 명확했다.

칼리버를 찾는다. 동시에 미야를 문 게 분명한 파무라다를 확보한다.

혼자서는 힘들다. 쉬네파와 맞붙은 걸 기점으로 뱀파이어들과 뭔가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자할이라면 파무다라와 칼리버를 잡는 데 도움을 받는 대신 다른 뱀파이어들을 건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거래가 가능할 수도 있긴 했지만, 기사단이 오면서 그 가능성은 물 건너갔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하나.

‘칼리버를 함께 엮어서 자할을 압박한다. 그럼 자할도 혼자 당할 게 아니라면 파무다라를 끌어들이려 하겠지. 칼리버는 파무라다의 동생이니까.’

보니까 파무다라도 완전히 다른 뱀파이어랑 교류를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쉬네파랑도 같이 안 있었겠지. 자할도 나름 연락망은 있을 터.

“외성에 오신 이유는 치안을 확보하고 불안에 떠는 주민들에게 영주의 이름으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함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일의 범인이 자할과 이전부터 주민들을 공격해 온 칼리버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난 기사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영주님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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