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7화 연대 책임
미야에게 정식으로 프렐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 아이를 많이 챙기네? 서로 그렇고 그런 사이? 탑에서는 종종 있는 일인데.”
“그런 거 아니야. 난 무조건 탑 밖으로 나갈 거거든.”
“하기야 그러니까 이렇게 날뛰는 거겠지. 보통 등반가가 이렇게까지 NPC를 신경 쓰는 경우가 없어서 물어봤어.”
프렐다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등반가는 위로 올라가거나 밖으로 나가거나 하니까.
90층에 남은 상위 헌터들처럼 안전지대에 머물려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한데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시스템은 그리 어설프지 않으니까.
‘포인트가 사라질 거야.’
탑을 오르는 등반가 대부분이 상점창에서 식량을 구한다.
몬스터의 고기에는 조금이라도 독이 있기에 결국에는 중독되어 죽으니까. 결국 포인트를 쓸 수밖에 없고 다 쓰게 되면 굶어 죽어서 나가든지 본인 발로 나가든지 해야 한다.
요리 스킬이 있는 나도 마찬가지.
안전지대에는 몬스터가 없고 재료를 사려면 포인트가 필요하다. 자급자족하려면 결국에는 필드로 나가야 한다는 말.
미칠 정도로 심심하기는 하겠지만 거기서는 오래 버틸 수 있다. 실제로 그런 녀석도 있었고.
나와 함께 헬다잉 키친에 갔던 녀석, 박재경
초기 헌터임에도 요리하겠다고 10년 넘게 53층에 머물고 있었지.
이쯤 되면 광기가 아닌가 싶긴 한데 뭐, 본인이 좋다고 하니까.
‘박재경 그 녀석도 등반 잘하고 있나 모르겠군.’
설마 헬다잉 키친에 영원히 있을 생각은 아니겠지?
보통은 그럴 일 없겠지만 왠지 박재경이라면 그럴지도 모를 거 같아 확답을 못 하겠다.
것보다.
“일종의 징크스가 있거든.”
층에 올라오고 초반에 인연이 생긴 NPC는 층을 공략할 때 영향을 준단 말이지.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NPC 자체가 등반가가 층을 공략하는 데 있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나름의 역할을 가지고 있으니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저 탑을 오르면서 만났던 파괴의 요정 헤이다, 악마 노역소의 게일 등등 초반에 만난 이들과 꽤 얽히면서 영향을 받았던 게 큰 거 같다.
상위층에서 만난 샤일이나 다른 녀석들도 비슷하고.
또 모르지. 어쩌면 진짜 92층을 공략하는 데 큰 도움이 될지.
-똑똑
“들어간다?”
“예? 예!”
노크를 하고 미야의 방으로 들어갔다.
뭘 하고 있었는지 종이에 뭔가를 그리고 적고 있다.
“아, 이거. 절 문 뱀파이어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고 있었어요. 저번에 본 칼리버는 아니어서.”
그때의 일을 신경 쓰고 있던 모양.
답답하겠지. 반트 성에 들어온 후 별다른 소득이 없었으니. 여기저기 일은 터지는 데 큰 도움이 안 되니 뭐라도 하려고 했던 모양.
기특하긴 하다만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곧 많은 역할을 하게 될 거라.
“둘이 이름은 알지?”
“네. 알죠.”
미야가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말했다. 프렐다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몰랐을 때 미리 미야에게 언질을 줬었다.
특급 괴물 사냥꾼이니 피를 마시거나 변이 진행될 때 절대 들키지 말라고.
“제대로 소개하지. 이쪽은 뱀파이어 배반자 프렐다. 앞으로 네게 많은 걸 알려 줄 거야.”
내가 손으로 프렐다를 가리키자 미야의 눈이 커졌고.
“반가워. 밤의 영역에 들어올 아가씨.”
프렐다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미야에 대한 교육은 프렐다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좋지. 다행히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고.
프렐다가 성격이 좀 있어서 어쩌나 했지만 변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흥미가 동한 건지, 아니면 본의 아니게 뱀파이어가 되어 가는 모습에 동정을 느끼는 건지 나름 살갑게 대해 주고 있었다.
매일 뭔가를 알려 주며 중간중간 내게도 경과를 말해 주었는데.
“미야를 문 녀석, 최고위급 뱀파이어야. 어쩌면 로드급일 수도 있고.”
“로드?”
“뱀파이어의 정점. 순혈을 이어 가는 자들이 있어. 조금이라도 그들의 피를 이은 자는 뱀파이어계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지. 대단한 거야.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고위급 뱀파이어일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로드라는 단어가 나올 줄 몰랐는데.
“그걸 어떻게 알지?”
“피 냄새가 달라. 가지고 있는 능력도 그렇고. 아직 변이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피지컬만 보면 쉬네파랑 비슷해. 최근에 좀 굴렸나 봐?”
“어허, 굴리다니.”
그냥 심심할까 봐 여기저기 데리고 다닌 거지.
하긴 전투 경험이 전무한데도 작업장 털 때마다 실력이 는다 했더니만 변이한 몸에 적응하고 있던 거였나.
반트 성에 처음 올 때만 해도 인간 범위 내였는데. 뭐가 됐든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덕분에 대충 미야를 문 녀석이 누군지 알 거 같기도 하고.
‘반트 성에 있는 뱀파이어 중에 로드 급이라 할 만한 존재는 하나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 가장 접합한 인물은 그 녀석.
“파무다라.”
그놈이었다.
홀로 있음에도 3대 세력이라 불리고 실제로도 쉬네파나 헤럴드보다 강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칼리버의 형이기도 하고 말이지.
그간 칼리버가 난리를 친 걸 생각하면 어떤 식으로든 파무다라에게 항의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어야 했는데, 쉬네파도 그렇고 자할도 그렇고 그러지 않았지.
오히려 굉장히 정중한 느낌이었다.
내가 쉬네파를 찾아갔었을 때 파무다라와 쉬네파가 대화 중이었으니까. 어떤 강압적인 느낌도 들지 않았었다.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대우를 해 주고 있었다고 봐야 된다.
‘미야의 능력도 그럼 설명이 돼.’
뱀파이어의 능력은 주인의 피를 강하게 따른다.
칼리버 또한 공간 도약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형인 파무다라 또한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덕분에 가장 성가실 녀석의 능력을 알게 됐다.
“계속 봐줘. 난 밖에 나가서 분위기 좀 살피고 올게.”
“그래. 나도 한동안은 얌전히 있어야 하니까 미야랑 놀고 있지 뭐.”
쭉 기지개를 켠 프렐다가 등을 돌렸다.
기사단이 나설 거라는 공문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까지 눈에 띄는 뭔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으니 미리 상황을 알아두는 게 좋았다.
‘상황이 안 좋으면 둘을 베가 파티에 넣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둘 다 사람 피를 빨지 않으니 걸릴 걱정은 없지만 세상일은 모르니 방비책을 마련하기는 해야 했다.
이곳에서 가장 보안이 확실한 곳은 베가 파티. 다행히 나도 그렇고 프렐다도 그렇고 연줄이 있다.
기사단이 거기까지 쳐들어갈지는 미지수다. 일단 영지 내에 있으니 출입이 가능할 것도 같고.
들어가더라도 별문제는 없겠지만. 이중·삼중으로 보안이 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관계자가 아니면 길을 잃을 정도로 복잡한 구조를 가졌으니 안쪽 깊숙이 숨어 있으면 못 찾을 거다.
이쪽 대응책은 대충 완료됐고.
“나도 움직여야지.”
천천히 길거리를 걸었다. 기사단이 등장했기 때문일까 저번 대폭발 사건 이후로 썰렁했던 거리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그만큼 기사단을 신뢰한다는 뜻. 평소에는 보기 힘든 기사단을 보기 위해 몰린 인파도 많았다.
“와! 저 갑옷 좀 봐.”
“멋있지 않아? 자주 보고 싶은데.”
“봤어? 나랑 눈 마주친 거?”
“신기하게 생겼나 보지.”
“이런 씨!”
이상하군. 나도 갑옷을 잘 입는데 왜 저런 반응이 안 나오지?
퀄리티만 따지면 기사들이 입고 있는 밋밋한 갑옷보다는 펠라인 세트가 훨씬 멋있는데.
“그에에.”
“어허, 거기까지.”
뭔가 불만 섞인 울음을 내는 덕춘이의 입을 손끝으로 눌렀다.
“악!”
이때다 싶어서 냉큼 무는 녀석. 주인의 손가락도 못 알아보고. 이래서 털 없는 짐승은 거두지 말라 했는데.
그건 그거고.
‘강하긴 한데 저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만하군.’
난 권능을 사용해 대열해 움직이는 기사단을 살폈다.
아무래도 정식 기사가 아닌 녀석들인지 평균적으로 강했지만 상대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뱀파이어 같은 이들에게는 유리할지 모르겠지만 난 사람이라서.
저 정도 급이면 5명까진 충분히 상대하고도 남는다.
‘움직이는 걸 보니 일대일보다는 집단으로 싸우는 거에 익숙해 보이고.’
대열도 자세히 보면 조금씩 위치가 다르다.
상황 발생 시 바로 진을 짜기 위함이겠지.
자리를 옮기며 파견된 기사의 숫자를 확인했다. 방금 본 광장 쪽 기사가 5명. 주거지구에서 있는 게 4명. 블랙 마켓 쪽에 돌아다니는 게 6명 정도.
이전에 쉬네파와 헤럴드랑 싸웠던 곳에는 9명이나 모여 있었다.
현장 조사를 하기 위함인지 근처에 구경 온 놈들도 죄다 쫓아냈다.
‘많이도 보냈군.’
시간대에 따라 조를 나누는지 인원 배치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대략 24명 정도인가.
이 정도면 내성에 있는 기사단 절반 이상을 보내 버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기사단을 겪어 본 프렐다가 말하길 영주가 보유한 기사단의 숫자는 40명이 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그만큼 이번 일을 영주가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대충 규모는 파악이 끝났는데.
“정식 기사 모습이 안 보여.”
내성에 있는 걸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지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영주는 이미 뱀파이어와 싸운 경력이 있다. 그만큼 준비도 해 놨을 거고, 일반 기사들로는 부족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을 터.
단순 무력 시위를 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다. 본인의 이름을 걸고 파견을 보냈으니 체면 때문이라도 성과를 내야 할 테니까.
그 증거로 순찰을 돌고 있는 기사단의 눈은 날카롭다 못해 살기까지 살짝 섞여 있을 지경이었다. 특히나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는 지금은.
기사들도 뱀파이어가 밤에 활동한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진짜 기사는 밤에 활동하는 걸까.
‘아니면 순찰을 돌고 있는 녀석들은 미끼?’
그럴 가능성도 있다. 뱀파이어들도 눈치가 있으면 기사들을 피해 움직일 것이고 이건 곧 몰이 사냥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톡톡, 손가락을 두들겼다.
잘하면 계획했던 것보다 쉽게 자할을 잡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시간이 끌릴수록 귀찮아지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자할도 그렇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칼리버라도 기사단은 의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완전히 숨어 버리면 찾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러니…….
“빠르게 찔러야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목적지는 뒷골목 앙증맞은 집단의 우두머리 빌러.
-쾅!
“우리는 선량하고 투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서 옵쇼! 전혀 수상하지 않은 인력 사무실입니다요!”
평소와 같이 문을 걷어차며 안으로 들어가자 빌러를 비롯해 조직원들이 험상궂은 얼굴을 애써 펴며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외쳤다.
이것들이 뭘 잘못 먹었나. 괜히 머리통을 때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찰나.
“이블아이였군. 흠흠. 들어와라.”
“뭐냐. 어울리지도 않게 이러고.”
“알다시피 기사단이 나왔잖아. 괜히 책잡혔다가는 우리처럼 작은 조직은 그날로 날아가는 거라고. 머리도 같이 날아가겠지.”
힘없고 불량한 조직의 처세술 그런 건가.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비켜.”
“짜증 나는 녀석.”
손을 휘젓자 빌러가 얼굴을 구기며 자리를 내준다.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너희가 할 일이 있다.”
“또 뭔 수작을 부리려고.”
“어허. 고객님께 그 무슨 말버릇이냐.”
-쩔그렁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슬쩍 풀어 안에 있는 것을 보여 주자 빌러가 안색을 굳히며 일어선다.
뭐지? 하는 눈빛인 조직원들도 눈치를 보며 일어났고.
“고객님, 맡겨만 주십쇼!”
“마, 맡겨만 주십쇼!”
바로 손님 대우가 나왔다. 역시 돈이 좋구만. 오드릭 무리가 열심히 모아 놓은 돈주머니를 가져오길 잘했다.
대화할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니 계획을 시작하자.
“오늘 밤부터 너희는 목격자가 된다.”
“네, 알겠습니다! 목격자가… 어? 그런데 어떤 목격자가?”
뭐긴 뭐야.
“최근에 일어난 대폭발 사건의 목격자지.”
기사단이 왜 이곳에 왔는가.
왜긴 나랑 쉬네파가 박 터지게 싸우느라 난리 나서 그런 거지.
안타깝게도 간악하고 민폐 덩어리인 쉬네파는 죽었다. 그렇다면 기사단은 누굴 찾아야 할까.
‘꿩 대신 닭이라고 자할을 잡아가면 되지.’
기사단도 성과를 내야 할 거 아닌가. 위에서 갈구면 없는 범인이라도 만들어서 데려가야 하는 법.
아니지, 가짜 범인이 아니지.
서로 사이좋은 뱀파이어이자 뒷세계를 쪼개 먹던 자할이 잡혀 가는 게 합당하다.
우리는 이걸 연대 책임이라 부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