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화 버티는 방법
오드릭 무리의 집에 돌아오고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전투에서 쌓인 피로감이 상당했던 모양. 회복을 하는 데 있어서 잠만큼 좋은 건 없었다.
“몸은 다 회복한 거 같네.”
“그에에.”
“고맙다. 역시 덕춘이야!”
밤새 날 회복시켜 줬을 게 분명한 덕춘이를 둥개둥개 해줬다.
온몸이 축축한 것이 열심히 핥아 준 모양. 이따 씻어야지.
“일어났어?”
“컨디션은 어때?”
“나야 괜찮지.”
씨익 웃으며 오른팔 대신 달린 기어를 보이는 프렐다.
저번 전투에서는 새롭게 만든 기어를 처음 써 봐서 출력 조절에 실패했지만 몸 어딘가가 상하지는 않은 거 같았다.
튼튼하다 이거겠지. 종족도 사람이 아니고.
탑을 오르면서 느끼는 건데 종족값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뱀파이어도 그렇고, 이전에 만난 거인족도 그렇고, 탑을 오르면서 얻은 능력이 없더라도 그 자체로 강한 이가 있었으니.
그렇게 보면 사람은 나약하다고 볼 수도 있었으나.
‘알리오스를 보면 좀 다른 것도 같고.’
물론 알리오스 또한 마나가 존재하는 세계에 태어나 검사로 살아갔지만 어찌 됐든 사람인 건 맞았다.
당장 나도 사람인데 여기까지 왔고. 다른 멤버들과 연합 사람들도 열심히 탑을 올랐다.
종족이 다르더라도 어떻게 하냐에 따라 충분히 종을 초월한 힘을 보일 수 있는 곳. 그게 탑이었으니까.
“잠깐만.”
프렐다의 기어를 살폈다.
겉으로 봤을 때 몸은 괜찮은 거 같았지만 기계인 기어는 또 다를 수도 있으니까.
베가 파티에 맡겨도 어느 정도 되겠지만 이걸 만든 건 나다. 치명적인 문제라면 수리 장비 문제 때문에 못하겠지만 살피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
‘딱히 문제는 없네.’
아케인 젬이 살짝 폭주하면서 헐거워진 장비들이 있기는 했지만 살짝 조여 주기만 하면 된다.
보물 주머니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나사를 조였다.
“흐음.”
묘하게 웃으며 날 바라보는 녀석.
“왜?”
“다른 종족에게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뭔가 새롭네.”
뭐라는 거야.
대충 흘려 넘기며 팔을 툭 쳤다. 드라이버를 주는 것도 잊지 않고.
“방금 내가 조인 거 있지? 저거 2중 안전장치를 해 두기는 했는데 틈날 때 조여 줘. 괜히 풀어졌다가 빠지면 그다음에는 팔 날아간다.”
“친절하기도 하지.”
토닥거리며 어깨를 두드린 프렐다가 자리에 주저 앉았다.
방에 있는 건 우리 둘뿐. 해가 서서히 지는 시점이라 오드릭 무리는 인력거를 끌러 나간 모양이었다.
괴물 사냥꾼으로 활동한 녀석들답게 체력이 대단해서 최근에는 찾는 이도 꽤 된다나. 집이 먼 사람들도 데려다주니 인기가 있을 법도 했다. 이러다 이쪽으로 전직하는 거 아닌가 몰라.
그건 그거고.
“바깥 상황은 어때?”
나보다 먼저 깨어났으니 주변 조사를 먼저 했을 거다.
어젯밤 큰일을 터트렸으니 아무 일도 없는 게 더 이상한 일. 뱀파이어의 정보에 예민한 괴물 사냥꾼인 그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영주가 기사단을 파견했어. 드문 일이지. 나도 기사단이 직접 움직이는 걸 본 건 두 번이 고작이니까.”
“기사단은 어떻지? 이쪽 기사단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개새끼들이지.”
많은 감정과 정보가 섞인 욕 한마디.
다른 건 모르겠지만 꽤 거친 녀석들이 아닐까 싶다.
“한동안은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뱀파이어들도 상황을 눈치채고 안으로 숨었으니까.”
양지로 나오지는 못했지만 음지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뱀파이어다.
그런 녀석들도 한발 물러설 정도라면 그 실력이 보통은 아닐 터. 명성이든 악명이든 충분히 가지고 있을 거다.
“두 번째라는 건 그전에 본 적이 있다는 거군.”
“보기만 했을까. 마주치기도 했었는데.”
프렐다는 배반자. 한때 뱀파이어들과 함께했었다. 그 이유는 모른다. 괴물 사냥꾼이 된 계기도 모르고.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피식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총알받이였어. 자할이 예전에 크게 사고를 친 적이 있었거든.”
암흑가를 손에 넣고 내성을 노렸던 적이 있다고 한다.
듣자하니 자할이라는 녀석도 NPC. 90층대에 있을 만큼 강한 자신이 어째서 외성의 뒷골목에서만 머물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기어코 안쪽에도 손을 뻗은 거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내부에 밀어넣었던 세력은 전멸. 꼬리 자르기를 몇 번이나 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쉴 수 있었지. 쉬네파와 괴물 사냥꾼과 굴욕적인 협정을 맺은 이유기도 하고 말이야.”
여기서 말하는 협정은 모든 일은 밤에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결과 자할은 낮을 내줬고, 쉬네파는 세력을 얻었으며, 괴물 사냥꾼과 주민들은 절반의 하루를 가질 수 있었다.
자할은 쉬네파보다도 오랫동안 반트 성에 머무른 괴물.
쉬네파 역시 조그맣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나 자할의 세력에 크게 밀리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는데.
‘자할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이곳에 자리 잡고 있던 헤럴드와 힘을 합쳤다고 했지.’
둘이 모여 힘을 키우고 자할이 약해진 시점에 세력을 흡수해 덩치를 불렸다.
당장 어떻게 할 힘이 없으니 내줄 것을 내준 결과, 쉬네파와 자할이 암흑가를 양분하게 되었다고.
몰랐던 사실인데 헤럴드이 모신 뱀파이어는 자할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어쩐지 쉬네파보다 강하면서 함께하나 했더니 그런 배경이 있었던 모양.
당시만 해도 힘이 약했던 베가 파티와 괴물 샤낭꾼이 뭉치게 된 시점도 이때였다.
“이런 일에 휘말렸다는 건 너도 자할과 함께였다는 거군.”
“그러지 않으면 살기가 힘들었거든. 결국 내성에 작업을 친 게 나였다면서 버리는 패로 사용했지만 말이야.”
“거기서 어떻게든 살아 나왔고.”
“그땐 진짜 죽을 뻔했지.”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을 거다. 난 그 부분이 필요한 거고.
기사단. 뱀파이어를 상대한다는 것만 보면 사람들의 편일 거 같지만 엄밀히 말하면 영주의 수하일 뿐이다.
필요에 의해서라면 주민들도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뜻.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그렇기에는 프렐다의 반응이 거칠었고, 다 떠나서 어젯밤 외성 일대를 날려 버린 범인이 나라서 켕기는 부분이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검기. 불리는 말은 많지만 검에 자신의 힘을 씌우는 능력이 있어. 이건 다른 곳도 비슷하지 알겠지?”
“알지. 나도 비슷한 걸 쓰고.”
“육체적으로도 뱀파이어에게 안 꿀려. 회복 능력도 월등하고. 아, 어디까지나 제대로 서임받은 기사라는 가정하에.”
살짝 놀랍다.
종족 특성인지 뱀파이어들의 신체 능력도 보통은 아니라서. 거기에 회복 능력까지 탑재했다라.
이것만 해도 대단한 건 사실인데 한편으로는 그 생각도 든다.
그래도 이 정도로는 뱀파이어들이 두려워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인이 말하지 않았는가. 앞서 말한 건 어디까지나 정식 서임을 받은 기사 한정이다. 기사단에는 고작해야 2명 있을 뿐이고.
“여기까지만 있으면 상관없는데 여기 기사들이 쓰는 오러는 파마의 특성이 있거든. 신성력이랑은 좀 달라. 이거 앞에서는 뱀파이어의 회복이나 능력도 통하지 않거든. 이건 정식 기사가 아니더라도 공통적으로 가져가. 정도는 다르지만.”
“아하.”
“피도 못 빨아. 빨아먹는 즉시 속이 타 버리거든. 괴물들의 천적 같은 거지.”
대충 이해가 됐다.
뱀파이어가 위험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는 종족 특성을 기반한 여러 가지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
쉬네파가 폭발을 일으키고, 헤럴드가 피의 칼날을 만들어 낸 것처럼.
안개나 박쥐로 변하는 것도 이 능력에 포함된다.
프렐다의 말이 맞다면 검을 휘둘러 폭발이나 칼날을 없애는 건 물론이고, 강력한 회피기인 변신도 잘라 낼 수 있다.
‘이론상 안개 질주도 베어 버릴 수 있어.’
사실상 무적기로 분류되는 능력도 이들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는 거다.
그야말로 천적. 뱀파이어들이 꺼릴 만하다.
“괜히 영주들 옆에 정식 기사들이 있는 게 아니야. 온갖 괴이들 앞에서 지키기 위함이지.”
뱀파이어가 주를 이루고는 있지만 그 외에도 전설이나 괴담 속에서나 등장하는 괴물들이 실존하는 게 이 세계.
그런 세계관에 맞춰 발전한 것도 어색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난 살아남았어. 기사단이 떠날 때까지 굴을 파고 벌레를 잡아먹으며 버텼지. 배반자가 되고 자할 그 쓰레기 같은 녀석에게도 한 방 먹여 줬고. 죽이지는 못했지만.”
특급 괴물 사냥꾼으로서 자할을 궁지로 몰았던 전적을 가지고 있는 게 프렐다다.
이제야 그녀의 설명이 이해가 된다. 그때를 기점으로 자할과 원한 관계가 됐다는 거지.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내가 궁금한 건 더 있다.
“무슨 이야기인 줄은 알겠는데 기사단이라고 아무한테나 검을 휘두르지는 않을 거잖아.”
“아까 기사한테는 파마의 성질이 있다고 했지? 그들에게는 뱀파이어를 찾아낼 방법이 있어.”
뱀파이어의 반응을 이끌어 내는 물질. 베가 파티가 만든 시약도 그들의 기술을 베껴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뱀파이어를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터.
의문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어째서 그들이 뱀파이어를 소탕하지 않는 거지?”
“대단하기는 해도 덜떨어지는 놈들이 대부분이거든. 결국 기사단 중 진짜 기사라 불릴 만한 사람은 둘뿐이니까. 모든 걸 걸고 싸우기에는 그쪽도 부담이 커. 적당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면 다시 내성으로 돌아가지.”
다 같이 죽자는 게 아니라면 적당한 선에서 끝을 보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라 이거군.
괜히 섬멸을 외쳤다가 정식 기사가 죽기라도 했다가는 영주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괜히 영주가 어지간해서는 외성에 간섭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뱀파이어인 시체 조각가를 잡는 데 적극적이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고.
이번에는 일이 커져서 어쩔 수 없이 나선 걸 테니.
짐작이기는 하지만 기사를 포함하여 내성에 있는 이들은 모두 중립 NPC인 거 같고.
작게 손가락을 두들겼다.
‘잘하면 될 것도 같은데.’
다시 암흑가의 지배자고 되고 싶은 자할.
뱀파이어의 천적이나 다를 바 없는 기사단.
여전히 멋대로 날뛰지만 밤에만 활동하자는 협약은 지키는 칼리버.
뱀파이어를 없애고 싶어 하는 베가 파티.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4개의 세력과 개인.
그 안에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나.
원래는 칼리버만 잡고 끝내려고 했는데.
‘고생 좀 해 보니까 괜히 꼽더라고.’
갈 땐 가더라도 청소 한번 싹 하고 가자.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프렐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흐음. 그게 뭘까?”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올리는 걸 보니 왠지 모르게 딱밤을 때려 주고 싶었지만 관두었다.
이게 다 릴카의 머리를 못 때려서 생긴 금단 증상이다.
“배반자라고 했잖아. 여기도 뱀파이어가 있거든. 엄밀히 따지면 아직은 뱀파이어가 아니지만.”
미야, 녀석에 대해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대상이 생겼다.
이번 기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을 터.
“아, 그런 거야? 재미없긴. 미야 말하는 거지? 살짝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냄새가 진하지 않은 게 사람 피는 안 마셨나 봐?”
“어. 마셨으면 안 데리고 왔지.”
“잘됐네. 기사단을 피할 방법이 그거거든. 사람 피를 안 빨면 기사도 못 찾아. 그래서 숨어 있는 뱀파이어들은 동물이나 다른 것의 피를 마시는 걸 배우지.”
그런 게 있었군. 몰랐던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네가 괴물 사냥꾼이라는 건 사람 피는 마시지 않는다는 건가?”
“조금은 마셔. 수혈팩이 있으니까. 혹시 모르지. 나야 사람 피를 마시다 이렇게 된 거지만 미야는 또 어떨지.”
어쩌면 새로운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