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화 가능만 하다면
자고로 복잡하게 머리 쓰는 것보다는 무식하게 나가는 게 정답일 때도 있다.
이것도 언제나 통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도 안 되는!”
“사람 잘못 건드렸어.”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쉬지 않고 쏟아 내는 폭발. 이미 일대는 난장판이 된 것도 모자라 거대한 구덩이가 되었다.
지금도 폭파력에 못 이겨 주저앉은 대지에 쩍쩍 금이 가는 상황.
사람이 만든 지진이 이런 걸까. 폐가나 다를 바 없는 건물들이 진동에 휘청이더니 무너져 내렸고 하늘 위로 치솟은 먼지구름에 달마저 가려진다.
한창 날뛰던 헤럴드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리를 피했으며, 덕춘이 역시 멀리 벗어났다.
당연하게도 이쪽으로 달려오던 경비대나 구경꾼들은 얼씬도 못 했고.
-쿠구구구구궁!
-쿠르르르릉!
“어억!”
“그대로 죽고 싶어? 당장 꺼지지 못해!”
“접근 금지다! 저리 가!”
흔들리는 땅에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지기 무섭게, 경비대에게 목뒤를 잡혀 쫓겨나기 바빴다.
이미 주변은 통제된 상황. 이 자리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 죽겠네.’
폭발의 중심에 있는 나야 고스란히 폭발의 반발력에 두드려 맞는 중.
최근에 이렇게까지 자폭을 한 적은 없었는데, 간만에 하니 진짜 죽을 맛이다.
머리가 흔들려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것은 기본이었고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게 어딘가 부러진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전신에서 날 리가 없으니까.
내 위에 올라탔던 쉬네파?
“끼아아아아악!”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견뎌 내는 것이 고작이다.
진작에 죽고 끝나면 서로 편할 텐데, 삶에 대한 애착이 큰 건지 아니면 뱀파이어라는 족속들이 유독 생명력이 질긴 건지는 모르겠다.
몸이 타들어 갔다가 재생되고 피부가 찢어졌다가도 봉합된다. 이 정도면 마물이랑 비교해도 지지 않는 수준.
본인이 쓰는 능력이 폭발이라 그런가, 이쪽에 저항력이 있는 듯했다. 내 화력 일부가 사라지고는 했으니. 그것만 아니었으면 한참 전에 끝을 볼 수 있었다.
‘그래 봤자지만.’
온몸에 두르고 있던 피의 갑주도 허물어지는 것이 사용할 수 있는 피가 얼마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나도 그리 여유롭지는 않다는 것.
‘이렇게까지 다 쏟아부을 생각은 없었는데.’
작게 혀를 찼다.
마력이 고갈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파이어 밤이라는 게 마력을 워낙 잡아먹기도 하고. 폭발형 스킬이라는 게 죄다 강력한 대신 많은 연료를 요구했다.
그래서 보통은 필살기 비슷한 느낌으로 쓰는 거고. 나야 마력량이 많아 이렇지만.
그래도 괜찮다.
[러브 앤 피스(SSS) Lv.3]
-우우우우웅.
곧 이어 터지는 새하얀 불길.
짙은 홍염이 걷히며 밝은 빛이 하늘을 비춘다. 흙먼지로 이루어진 안개에 빛이 가득 담기자 신비로운 분위가 펼쳐졌지만, 아무도 그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대지를 울리고 건물을 무너트리는 건 똑같았으니까.
“아직, 많이 남았, 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마력이 부족하면 다른 걸 쓰면 그만이다.
내게는 마력 말고도 신성력과 마기, 혼돈이 있었으니까. 대부분 기껏해야 마력을 제외하면 마기나 신성력 둘 중 하나만 쓴다. 난 둘 다 쓰는 케이스고.
다르게 말하면 에너지가 부족해서 스킬을 못 쓸 일은 어지간하면 없다는 뜻.
안개 질주와 같이 마력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스킬이 아니라면 말이지.
피차 서로 한계까지 치달은 상황. 확실하게 끝을 보자.
이만큼 일을 벌였으니 더 이상 조용하게 끝내는 방법은 없었다.
저기,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움켜쥔 헤럴드도 마찬가지.
‘일단 한 명.’
끝까지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달라붙기 스킬이 해제되자 눈을 빛낸 쉬네파가 박쥐 떼로 모습을 바꿔 달아난다.
그 수가 처음보다 적은 것이 본체에 타격을 입으면 숫자가 주는 모양.
그래. 멀리 가라. 도망칠 수 있으면 가 봐라.
“그럴 수 있다면.”
[되갚기(SSS) Lv.3]
-구구구구궁.
-콰아아아아아앙!
대미지가 축적됐다는 가정하에 파이어 밤을 뛰어넘는 화력을 내는 스킬.
최종 자폭 병기가 터져 나갔고.
-파사사사사삭.
절대적인 파괴의 파동에 박쥐 떼가 소멸해 사라졌다.
금이 간 땅이 다시금 무너지며 지형이 바뀌었고 근처에 있던 건물들 또한 가루가 되어 흩날렸으니.
[구사일생(S) Lv.MAX]
나 역시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 번 목숨을 내주었다.
몸이 바스라지기가 무섭게 수복되는 몸. 입고 있던 옷까지 전부 사라졌지만 걱정 없었다.
-차자자작.
잔뜩 찌그러졌던 펠라인 세트 또한 복구되며 내 몸을 가려 줬으니까.
“후우. 질기게 싸웠네.”
깊은 숨을 토해 냈다. 입안에 흙이 들어갔는지 안이 껄끄럽다.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마력이 거덜 나서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결코 좋은 상태는 아니었는데.
“죽어라!”
“여태 버티고 있었다고?”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시점, 흙먼지를 뚫고 헤럴드가 내게 달려들었다.
설마 이 폭발을 감수하고 안으로 파고들 줄은 몰랐다. 그만큼 녀석의 몸도 엉망진창이었지만 나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캉!
간신히 검을 들어 공격을 쳐 냈지만 녀석 또한 손톱으로 검을 옆으로 밀어 버렸고 남은 손으로 내 목을 찔러 들어왔으니.
‘이건 못 피한다.’
안개질주라면 가능하지만 이미 마력이 바닥나 사용할 수 없다. 그나마 믿을 거라고는 보호 스킬을 믿고 어떻게든 버텨 보는 것.
죽지만 않으면 덕춘이와 포션으로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전신의 근육을 수축시키는 그때.
-지우우우우웅!
빛이 번뜩였다.
일직선으로 내리꽂히는 섬광.
정확히 목을 향해 날아오던 헤럴드의 손이 잘려 나간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녀석의 눈이 나를 향했고.
“겨우 맞췄군.”
-꽈드드득.
프렐다가 기어를 활성화한 채 헤럴드의 얼굴을 붙잡았다.
붉게 달아오른 눈동자. 굵게 튀어나온 혈관.
입 사이로 얼핏 보이는 송곳니.
‘뱀파이어였군.’
-기이이이이잉!
프렐다의 기어가 폭주하듯이 가속한다.
보호 장치 일부가 해제되며 아케인 젬이 미친 듯이 에너지를 내뿜어 댔고.
“월척이네.”
-콰아아아아아앙!
프렐다의 움켜쥔 손바닥으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로라 빔 수십 개를 동시에 쏘면 저런 느낌일까.
벼락이 땅에서 솟은 것처럼 짧지만 강렬한 빛이 사방을 비추고 상반신 전체를 잃은 헤럴드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뱀파이어라 하더라도 신체의 반이 사라지면 죽는구나. 머리가 사라져서 그런가.
뭐든 좋다.
“성능은 어때?”
“아주 마음에 드는군.”
숨길 생각도 없는지 프렐다가 송곳니를 보이며 미소 지었다. 그 표정이 꽤나 시원해 보인다.
몸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저만한 출력을 몸으로 받아 내야 하는 만큼 부담감도 상당할 터.
나를 잡아 일으켜 주는 사이에도 몸이 떨리고 있다. 핏줄이 터졌는지 눈에서 핏물이 흘러나왔으나 혀를 내밀어 핥고 만다.
슬쩍 눈을 돌려 기어가 장착된 팔을 살폈다.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출력에 집중하느라 쓰는 사람은 신경 못 썼는데, 용캐 버텼다. 어지간하면 팔 자체가 떨어져 나갈 충격이었을 텐데.
어쩐지 설명 읽을 때 정보 일부가 잠겨 있더라니. 프렐다도 폼으로 90층대에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배반자였네.”
“왜. 실망인가?”
“아니. 오히려 좋아.”
“취향 독특하군.”
내 취향이 남달라서 그런 건 아니고.
‘미야에게 도움이 되겠어.’
그동안 미야가 뱀파이어인 게 들킬까 숨겼던 게 우스울 지경.
이렇게 되면 조언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여기저기 발품 팔고 경험적인 지식으로 조언을 해 주고는 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진짜 뱀파이어인 프렐다라면 훨씬 좋은 방법을 알고 있을 거다. 힘을 다루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변이를 늦추거나 멈추는 방법까지.
본인을 문 녀석을 잡으면 해결될 문제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러질 못하고 있어서.
“그에에.”
돌아온 덕춘이가 냉큼 어깨에 올라탄다.
저 멀리서 대피해 있던 이들이 오는 소리도 들리고.
“일단 자리를 뜨자. 여기 계속 있다가는 좋은 꼴 못 보겠다.”
쉬네파와 헤럴드를 잡는 쾌거를 이루기는 했지만, 여전히 녀석들의 부하들은 가득했다.
눈에 불을 켜고 날 찾으러 다니겠지.
그래도 걱정은 별로 없다. 한동안 회복에 집중하면서 버티면 다 해결될 테니까.
눈치를 보고 있는 자할도 둘이 사라진 걸 알아차리면 그때부터는 남은 세력을 먹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일 거다.
본인이 이곳의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파무다라가 있기는 하지만 활동을 거의 안 하는 편이고 하더라도 혼자니까 거칠 게 없겠지.
‘그게 또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보면 될 일이다.
프렐다의 부축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절뚝이며 내가 빠져나온 건물을 바라봤다.
결과적으로는 좋게 끝났지만, 여전히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파무라다 그 녀석은 왜 가만히 있던 걸까.’
그 녀석까지 덤벼들었다면 내가 졌을 것 같은데.
모르겠다. 탑에 정신 나간 놈들이 한둘이어야지.
꼬르륵. 난데없이 배에서 소리가 난다.
그러고 보니 밥을 안 먹었지.
“배고프다.”
“나도.”
거처에 도착하면 뭐라도 먹어야겠다.
* * *
쉬네파의 본진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
이런저런 사건이 겹쳐 후순위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쉬네파가 찾아오라고 명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머물고 있던 뱀파이어들도 오늘 밤 피바람이 불겠구나 예상을 했으나.
“말도 안 돼.”
“이런 게 가능한가.”
그 피바람이 이렇게나 클 줄은 아무도 몰랐다.
벽과 바닥이 무너져 내린 건물. 그것까지는 괜찮다. 건물이야 다시 세우면 되고 뚫린 바닥과 벽이야 메꾸면 되니까.
중요한 건 이 많은 뱀파이어를 뚫고 이블아이가 탈출했으며 쉬네파와 헤럴드가 직접 그를 잡으러 향했다는 것이었다.
이만한 인원이 있는데도 빠져나갔다는 건 누가 들어도 부끄러운 일이었고 나중에 크게 혼이 날 일이었기에 다들 얼굴을 구겼었지만, 그런 건 이어진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원이라도 하기 위해 뛰쳐나간 인원들. 얼마 안 있어 들려오는 굉음. 폭발과 함게 치솟는 불길과 미친 듯이 울려 대는 땅.
그야말로 재앙이 찾아왔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현상에 모두가 굳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될 것 같은 불안감.
-구구구구궁.
폭음이 잦아들고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섣불리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그저 이 밤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바뀌지 않을까, 예언과도 같은 직감이 모두를 스쳐 갈 뿐.
다양한 감정이 교차되는 공간. 파무라다가 무너진 6층 창가에서 몸을 걸친 채 이블아이가 있던 곳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쉬네파와 헤럴드가 죽는 모습까지 똑똑히 봤다. 중간에 웬 개구리와 배반자가 끼어들기는 했지만.
“혼자서 잡은 거나 다를 바 없군.”
저 정도면 홀로 모든 것을 해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에게 있어 쉬네파와 헤럴드가 죽은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NPC가 된 이후 오랜 기간 마주쳤다지만 그래 봤자 마찰만 있었지 진득하게 교류하지는 않았으니까.
애초에 그는 세력을 만들지 않았다.
파무라다가 절뚝이며 멀어져 가는 이블아이를 보며 턱을 쓸어내렸다.
“저 녀석이라면 가능성이 있겠군.”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할 수 있다면.
“92층의 지배자 자리도 줄 수 있지.”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의향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