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화 그건 몰랐네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어.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야 권능을 사용해 상대방의 정체를 알 수 있지만 상대는 아니니까.
특히나 상대방은 쉬네파나 자할과 달리 겉으로 드러나는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존재다.
당연하게도 얼굴이 드러나지 않았고, 베가 파티의 괴물 사냥꾼들 또한 직접 그를 만났다는 자가 없었다.
그야 만난 사람은 다 죽었으니까. 그나만 멀찌감치 떨어져서 실루엣만 본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선객이 있었군.”
“그쪽이 느닷없이 찾아와서요. 이쪽이 이해해 준 게 다행이죠.”
가볍게 와인 잔을 기울이는 여인. 오크향이 진한 와인임에도 안에 감춰진 피 냄새를 숨길 수는 없었다.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피식 웃는다.
“나도 앉지.”
일단은 당당하게. 옆에 있는 녀석이 누군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자.
상대방도 별 관심 없는지 뭐라 하지는 않는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며 떠오른 메시지를 살폈다.
[파무다라]
-92층의 NPC.
-반트 성에 존재하는 뱀파이어 파벌의 수장 중 하나!
-따로 세력을 만들지 않지만 그의 추종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스템에 의해 정보를 읽어 올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모든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이름이 특이한 건 그렇다 치고 모든 정보를 읽어 낼 수 없다는 것이 신경 쓰인다.
시스템에 의해 막힌 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모든 정보를 읽어 낼 수 없다는 의미는 간단했다.
‘강하다. 나와 근접한 수준 아니면 그 이상이야.’
이런 경우는 오랜만이다. 그도 그럴 것이.
[쉬네파]
-92층의 NPC.
-반트 성의 유흥가와 도박장을 차지한 뱀파이어 파벌 중 하나입니다.
-그녀의 미색에 홀렸다가는 피가 쏙! 눈물이 쭉! 이 세상과 안녕입니다.
.
.
.
저기, 뱀파이어 파벌을 대표하는 뱀파이어 중 하나인 쉬네파의 정보는 거의 다 읽어 낼 수 있다.
완전히 상세하게 나오는 게 아닌 걸 보니 나보다 한 단계 아래가 아닐까 싶다.
달리 말하면.
‘반트 성에서 가장 강한 건 파무라다야.’
이제야 놈이 어떻게 세력도 없이 혼자 돌아다녔는지 알겠다.
쉬네파나 자할도 건드리기 껄끄럽겠지. 괜히 작업했다가는 역폭풍이 불 테니까.
뱀파이어라 한들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건 똑같다. 아무리 함정를 파놓더라도 변수가 생기면 목이 잘리는 게 전장이니까.
그렇다고 쉬네파를 무시할 건 또 아닌 게, 그녀의 뒤편에 기립해 있는 녀석도 만만찮은 놈이다.
[헤럴드]
-92층의 NPC.
-쉬네파의 심복입니다.
-그녀보다 고강한 존재지만 부하를 자처합니다.
-선대 뱀파이어 로드를 위기로 밀어 넣었던 자의 적통입니다.
쉬네파보다 강한 녀석이다. 따로 세력을 일구었다면 쉬네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조직의 우두머리가 됐겠지.
어째서 부하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거 빠져나갈 수 있나?’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빡센데.
기껏해야 쉬네파와 부하들이 있을 줄 알았다. 메인급 NPC가 셋이나 모여 있을 줄은 몰랐지.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아직까지는 내게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 들어오자마자 덤벼들었으면 곤란할 뻔했는데.
내가 쉽게 당해 주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일까. 어찌 됐든 내가 날뛰고 어떻게 빠져나간다면 그때부터는 영주의 기사단도 함께 상대해야 한다.
내가 놈들을 가늠하듯 녀석들도 나를 살피고 있을 게 뻔했다.
한동안 말없이 침묵만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건 쉬네파.
“안 그래도 그쪽을 만나보고 싶었어요, 이블아이.”
“만나 보니 어때?”
“괴상하네요.”
“아니…….”
그녀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전투가 일어날지 모르는 만큼 펠라인 세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아직 날개는 달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러면 쓰나.
신경전은 이만하면 됐다. 어찌 됐든 상대방이 나를 받아 줬다는 건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것.
방 안에 있는 건 이렇게 4명. 나를 안내해 줬던 녀석은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등반가일 텐데 감상은 그것뿐?”
“뭐, 크게 다를 건 없거든요. 다른 곳은 어떤지 몰라도 여긴 주기적으로 이런 일이 생겨서요. 이번에는 좀 심하지만. 아마 그쪽 때문이겠죠?”
미묘하게 뻗치는 살기.
이미 내 장비와 그동안 자체적으로 수집한 정보로 내가 등반가인 건 알고 있을 거다. 그다지 숨겨야 할 정보도 아니고.
“칼리버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움찔.
그녀의 말에 파무다라가 작게 반응을 보였다. 하기야 시체 조각가는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으니까. 가장 죽이고 싶은 동족 1위일 거 같은데.
쉬네파가 파무다라를 보며 흐응, 작게 코웃음을 친다.
“잘 살아 돌아왔네요?”
“놈이 도망쳤거든. 빠져나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더라고.”
놈이 도망친 이후에 수색을 안 해 봤던 건 아니다. 이게 어떤 기회인데 그냥 구경만 할까. 권능을 써 가면서 일대를 살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 공간 도약이 어디까지 이동할 수 있는지도 모르고, 근처에 있었더라도 건물 안으로 도망쳤다면 찾을 방법이 없다.
건물을 죄다 부수고 다니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런 이점 때문에 칼리버가 도심에서 활동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하는 짓만 보면 뇌 빼놓고 행동하는 거 같은데 은근히 철저하단 말이지. 그래서 더 짜증 난다.
하소연은 이쯤하고.
“놈을 잡을 수 있게 해 주지.”
본론을 꺼냈다.
거짓말 아니다. 진짜로 놈을 잡는 방법으로 뱀파이어와 협력할 것도 생각하고 있다.
난 위로 올라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칼리버를 잡아야 하니까.
“난 이미 놈을 찾아냈고 몰아넣었었어.”
“결국 놓쳤지만 말이죠.”
“그래서 너희가 필요하다는 뜻이야.”
이죽거리는 쉬네파의 말을 가볍게 받아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들에게 원하는 건 이거다.
“다시 녀석을 잡아 둘 수 있어. 중요한 건 놈을 찾아내는 것. 그 부분만 해결하면 돼. 놈이라고 무한정 도망칠 수는 없을 거니까.”
몰아넣는 것까지는 내가 할 수 있다. 다만 놈이 도망쳤을 때 잡는 게 문제다.
머릿수만 따지면 뱀파이어가 괴물 사냥꾼보다 많다. 놈들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더 많고. 영업장에서 용역으로 불러 모으기만 해도 그 수가 제법 될 거다.
직접 잡으라고는 안 한다. 그냥 칼리버가 나타났을 때 신호만 주면 쫓아갈 수 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죠?”
“너희는 칼리버를 찾을 수 없잖아.”
망설임 없는 단답에 쉬네파가 눈을 찡그린다.
“잡을 수 있었다면 진작에 잡았겠지. 지금 여기에 박혀 있는 것도 그걸 못 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쾅
“그건 그쪽이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죠!”
그렇긴 하지.
거칠게 와인 잔을 내려놓은 쉬네파가 살벌한 눈으로 노려본다.
그래서 뭐.
“안 잡을 거야? 나름 서로 피 적게 보자고 찾아온 거야. 쉬운 길 놔두고.”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숟가락을 쥐었다. 그 위로 올라오는 검강.
“기사로 위장하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니까. 기사단을 끌고 오면 이 지루한 추격전도 끝이 나겠지, 안 그래?”
물론 나도 어지간하면 기사단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다.
놈들이 칼리버를 찾으면 내 공헌도가 떨어지니까. 위로 올라갈 조건이 달성되면 다행인데 아니면 답이 없다.
미야를 문 범인을 찾기도 힘들어질 거고 말이지.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다. 그편이 편하기도 하고 위험 부담도 적으니. 심지어 등반가가 떠나면 기억이 리셋되는 중립 NPC다.
다만…….
‘내키지 않아.’
NPC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기회.
80층대 마지막 시나리오에서 만난 정령 마법사 샤일. 녀석 또한 중립 NPC였지만 많은 시간을 함께했고 모든 챕터가 종료됐을 때는…….
‘마지막 기회를 얻고 밖으로 나갔지.’
아직도 난 중립 NPC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그래도 알고 있는 건 그들이 진짜 시스템에서만 만들어진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라는 것.
그랬다면 기회를 얻지도 못했겠지.
NPC에게는 이 한 층짜리 세계가 삶이라고 했던가. 그들이 사람으로서 삶을 이어 나가고 나를 사람으로 대해 준다면 나 역시 그러해야지.
칼을 내민 자에게는 칼을. 손을 건넨 자에게는 손을.
간단한 이치였다.
“괜히 일을 키울 생각은 없어. 너희도 그걸 원하지는 않을 거고. 그렇다고 칼리버를 그냥 놔두는 것도 말이 안 되겠지. 내가 아니더라도 영주가 관심을 보였으니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영주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손을 잡는 게 어떠냐고 묻고 있는 거다.
이들 역시 악역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NPC. 가능하다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고 싶은 건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가능성이 있다. 물론 상대방도 날 완전히 믿지는 않을 거다.
지금까지 당한 게 있는데 좋다고 손을 잡을 리가 있나.
“후우, 원래는 그쪽을 잡아 오면 찢어 죽이려고 했어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요. 웅크리고 사리는 거? 어렵지 않죠. 그게 뭐 대수라고.”
말 한번 무섭게 하네. 찢어 죽이다니.
몸을 사리는 거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장기전으로 지속할 의향도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면 곤란한데.
“그쪽에 대한 신뢰도 없어요. 서로를 믿기에는 쌓인 업보가 있잖아요?”
“흠흠. 자고로 신뢰라는 건 차차 쌓아 나갈 수 있는 법이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아요.”
작게 한숨을 내쉰 쉬네파가 와인 잔을 기울인다.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혹하기에는 약하네요. 안 그래도 칼리버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파마다라와 함께 있었던 이유가 이거 때문이었나.
지금까지 조용히 자리를 잡고 있길래 얘는 왜 온 건가 싶었는데.
이 녀석도 칼리버를 잡으려고 손을 내민 건가.
‘꼬였네. 하필 먼저 선수 친 녀석이 있을 줄이야.’
심지어 같은 뱀파이어니 말도 통할 거고. 자할과 달리 따로 사업장 같은 걸 운영하지 않아 이권 다툼과도 거리가 멀다.
나 같아도 내가 아닌 파무다라와 힘을 합칠 거 같은 상황.
이어지는 쉬네파의 말은 내 예상 밖이었다.
“칼리버를 만났다고 했죠? 우리도 칼리버의 정체는 알아요.”
“그래, 칼리버는… 어?”
뭘 안다고?
“칼리버는 내 동생이다.”
그동안 침묵을 지켜왔던 파무다라가 입을 열었다.
아.
그건 몰랐네.
* * *
프렐다는 이블아이의 뒤를 쫓아 내성 근처까지 왔다.
내성과 가까울수록 부촌이었기에 경비는 삼엄했고 사람도 많았기에 움직임에 조심해야 했다.
실용성에 집중한 복장은 거리 사람들의 옷차림과는 거리가 있었고, 쓸데없는 시선이 모이게 되었으니까.
그리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이런 곳에 자리 잡았으니 찾기 힘들지.’
괴물 사냥꾼은 거칠고 때로는 거금을 쥐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뱀파이어를 상대하느라 소모된 물건들을 보충하고 망가진 장비를 고치고 다친 몸을 요양하다 보면 벌어들인 수익이 금방 빠져나가는 것.
거친 삶에 익숙해져 격식과 허세가 뒤섞인 곳은 은연중에 피하고는 했다. 이쪽도 같은 이유로 잘 오지 않는 곳이었다.
애초에 뱀파이어가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곳이기도 했고.
이러나저러나 괴물 사냥꾼은 괴물이 돌아다니는 곳에 모이기 마련이라.
“어떻게 할까.”
인기척을 죽이고 비교적 높은 담벼락에 올라선 프렐다가 이블아이가 들어간 건물을 바라봤다.
화려하게 꾸며진 6층 건물. 밖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가드들.
느껴지는 기세와 옅은 피 냄새로 봤을 때 뱀파이어가 분명했다. 다른 이들이라면 특수한 용액을 사용해야 알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달랐다.
‘변이 정도는 할 수 있는 놈들이군.’
그녀는 변졀자. 뱀파이어를 배신한 사냥꾼이었으니.
간단하지만 능력을 쓸 수 있는 이들을 고작 건물 입구를 지키는 가드로 쓰고 있다.
내부에는 얼마나 많은 괴물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 괜히 불안한 느낌이 들었고.
-구구구구구궁
-콰아아아아앙!
건물의 꼭대기 층, 창문이 터져 나가며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